논평

▩마취제로서의 대중문화

개마두리 2011. 12. 9. 20:52

 

▣이 글은 대학시절 우연히 손에 넣은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바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블로그에 올립니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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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중 문화의 정치적인 함축은 엄청나다. 그것은 사람들의 수동성을 강화함으로써 사회 통합과 유지를 위한 일종의 시멘트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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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쉽게 말해, 대중문화는 사람들을 문화 상품을 만든 사람이 의도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문열의 소설『선택』이 인기를 끌면서, (실제로는 남성 우월주의가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도덕을 바로 세우고, 우리 나라 남성들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들어진 사실을 떠올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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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 5.16 이후 라디오의 보급이 급증했던 사실, 그리고 7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도시 서민층과 농어촌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던 사실은 대중 문화가 사회 통합 기능에 어떻게 동원되었던가를 잘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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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당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대중 매체는 정부와 정부의 통제를 받는 방송국이 ‘좋다.’고 여긴 내용만(!) 내보냈다.

 

대중 매체를 골라 들을 권한이 없고, 그저 보고 듣기만 해야 했던 대중들은 매체에서 내뿜는 사상(예컨대 가족주의, 성장 지상주의, 강대국 추종, 국가주의, 남성우월주의)을 비판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고, 똑같은 내용을 듣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대중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통합”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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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있어서 대중 문화의 보편화는 동시에 비판하는 문화의 공동화(空洞化 : 텅 비게 됨. 사라짐 - 옮긴이)를 의미했다.

 

문화의 비판 기능을 봉쇄하기 시작한 사회는 그것의 역(逆)작용(: 반작용 - 옮긴이)이 미칠 곳에 대중 문화를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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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주석 :

 

쉽게 말해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게 막는 대신,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끓어오르지 못하도록 대중 문화를 권장해 대중 문화에 취한 사람들이 현실을 잊어버리게 이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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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서기 1953년, 고[故]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 통일 문제, 민주사상 함양,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 자존심의 양성을 기본 편집방향으로 잡았다. 이승만/박정희에 맞서 싸우는 양심세력을 대표하는 잡지가 되었다 - 옮긴이)가 도서관의 깊숙한 납골당에 안치된 후( : 그러니까 서기 1970년, 박정희 정권이『사상계』를 폐간한 뒤『사상계』가 - 마치 화장한 뼈가 납골당 구석에 안치되듯이 -도서관 깊숙이 처박혀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 되자 - 옮긴이), 그 빈 자리에 각양 각색인 호화 여성지들과 텔레비전 수상기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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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요즘은 컴퓨터 게임과 할리우드 영화가 “텔레비전 수상기”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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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제 문제가 아니라 화제였다(골프장 주변의 환경오염 대신 연예인의 사생활이 기삿거리가 되는 일이 좋은 예이다 - 옮긴이). 70년대 대중 문화의 팽창은 현저히 경화된(딱딱해진 - 옮긴이) 관료적 권위주의의 특징들과 상관이 있었다.

 

대중 문화는 ‘자율적인 개인의 해체’를 강요한다. 또한 익명성이라는 탈을 쓰고 인간의 개성이나 개인적 취미를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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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예컨대 우리는 ‘유행’하는 문화상품(영화건 연속극[:드라마]이건 노래건 가릴 것 없이)을 ‘함께’,‘한꺼번에’즐기지 않으면 - 그리고 평론가의 지루한 평론을 따라가거나 반대로 대중의 취향을 따라가지 않으면 - ‘튄다’는 말을 들으며‘왕따’당한다.

 

‘나’라는 개인이 평론가와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나, 대중이 모르고 있는 점을 지적하거나,대중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싫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요즘은 그나마 누리그물[:인터넷을 일컫는 순우리말. ‘세계<를 엮는>그물’이라는 뜻이다]이 발달해서 게시판에 ‘반대 의견’을 적을 수라도 있지, 그 전에는 문화상품을 만드는 사람이나 유행을 따르는 이들에게 거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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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전하게 선호(選好)의 조작이 가능하다. 우리는 ‘가요 톱 10’(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인기 가요를 선보이고, 노래의 인기 순위를 정했던 TV 프로그램 : 옮긴이)에 보내어진 우편 엽서의 숫자에 의해 우리가 이번 주에는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해야 할지 강요받는다(방송국은 당신이 개인적으로 그 노래가 싫다거나, 남들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옮긴이).

 

무엇보다도 대중문화는 대량 복제를 가능케 한 기술석 합리성에 의존함으로써(쉽게 말해,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문화상품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고 널리 퍼뜨릴 수 있게 됨으로써 - 옮긴이) ‘유기적(인간적)인 것’에 대한 ‘기계적인 것’의 우위를 유지한다.

 

동일한 내용을 비슷하게 반복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조건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이고 - 옮긴이) 기계적인 수용 구조를 만들어 놓는다. 처음엔 혐오감을 주던 대중 가요도 자주 듣다 보면 좋아하도록 대중의 청음( : 소리를 듣는 - 옮긴이) 구조를 바꾸어 놓으며, 그 다음에는 주로 그러한 음의 패턴을 기대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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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90년대 중반, 방송국이 ‘불륜’을 다룬 연속극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한국 사회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살펴보자.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고 반발이 잇따랐지만, 나중에는 그 연속극의 시청률이 2~30%나 되고 시청자들이‘불륜’을 ‘멋진 일’로 여길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다. 결국 나중에는 똑같은 소재를 다룬 연속극이 몇 편이나 만들어졌다.

 

시청자는‘불륜’이 자주 다루어지자 불쾌감을 품을 겨를도 없이 세뇌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른 문화상품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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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대중문화는 궁극적으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의 특성이 강하다(할리우드 영화사나 홍콩 영화사들, 한국과 일본/미국의 게임 제작 회사들이 왜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비슷한 주제의식을 지닌 ‘속편’을 자꾸 찍어내겠는가? - 옮긴이).

 

그리고 자본주의의 성숙 단계에 이르면 대중 문화는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된 가공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중 문화 연구가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 같다(현실을 외면한 채 ‘특수효과’나 ‘자극’만 강조하는 문화 상품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 옮긴이). 이 점은, 그 생산자와 소비자가 유기적으로 중재되어 있는 민중 문화와 그렇지 못한 대중 문화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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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그러나 나는 이 점에서 황지우씨와는 의견이 다르다. “대중문화”뿐 아니라 모든 문화가 “재생산”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설령 “대중”이 즐기는 문화라 하더라도 반드시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된 가공물”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리그물로 퍼지는 만화나 글이 “인간적 본질”을 다룬 것이라면 그것을 반대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또, 소비자가 통신망이나‘대안 언론’을 통해 문화 상품의 문젯점을 지적하고, 생산자가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대중 문화”도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글의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은 정보화 사회의 순기능을 생각하지 않은 황지우씨의 착각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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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문화 속에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 규모도 작고 거친 점이 있긴 하지만, 그 사용자들의 건강한 주체성과 자발성에 의해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하며 거기서 우러나오는 풍자와 역동적인 비판 정신이 무진장하게 저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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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

 

왜냐하면 민중 문화는 ‘스스로’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나 종교 단체나 언론 기관의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단, 민중이 애초부터 잘못된 정보에 세뇌된 ‘대중’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풍자”와 “비판”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김종철 교수가 말했듯이 “지식인과 민중 사이의 관계는 상호 교육이어야 한다(강준만 교수와 김환표씨가 지은 책『권력과 리더십』④권에서).”

 

― 쉽게 말해, 지식인은 ”억압의 구조를 파악하기 힘든“ 민중을 가르치고 민중은 모순을 단순명쾌하게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채, ‘행동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주저앉기 쉬운’ 지식인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문화 평론가와 대중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 잉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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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점적인 후기 산업 사회에 이르러 기술적 합리성과 (언론 권력이나 재벌들의 - 옮긴이) 대규모적인 표현 매체의 독점(예 : ‘알자지라’방송국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기 전, 미국의 CNN이 세계의 거의 모든 뉴스를 다룬 사실 - 옮긴이)에 의해 대중 문화가 위로부터 조작되고 강요되는 과정 속에서 자생적인 민중 문화의 공간은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어 가고 있다.

 

대중 문화는 언제나 자각(自覺 : 스스로 깨우침 - 옮긴이)이 아니라 단순한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면서 잠재운다. 그것은 마취제다. 대중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술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이같은 마취제의 대량 생산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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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주석 :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 문화”가 “마취제”가 아니라 ‘현실’을 다루고 따지기 시작한다면, -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즐기고 쉽게 퍼지는 특성상 - 대중 문화를 다루는 매체는 오히려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 문화 자체를 뿌리치지 말고, 유행’이라는 “마취제”에서 벗어나 대중 문화를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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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마취제의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야만적 충동을 자극시키고 그것을 충족시키고 또 더 큰 충동을 자극시켜야 한다는 ‘역(逆) 한계 효용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마치 코카콜라가 갈증을 해소시키면서 그것을 더 증대시키는 것처럼.

 

결국, 인쇄술이 서양으로 들어가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의 시대를 열었던 것에 반해, 서양에서 나온 대중 매체는 계몽주의적 이성을 마취시키는 야만성과 순응주의의 시대를 불러 왔다는 것은 재미있는 발견이면서 끔찍한 발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한마당 펴냄)에 실린 황지우씨의 글「마취제로서의 대중문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