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매력이 사랑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개마두리 2012. 1. 18. 18:50

 

- 정여울(문학평론가)의 청소년인문학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겐 결코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력은 본래 절대적인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매력은 철저히 상황적인 것이다. 매력이 발산되는 ‘상황’이 있고, 매력이 발산되는 ‘상대’가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매우 명석해서 아무 데서나 그토록 아까운 매력을 발산하지는 않는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매력을 뿜어내기도 한다. 요컨대 진짜 필드에 나가야 진정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 물론 매력을 평소에 연습할 수도 있다. 숨겨진 매력을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걸 위해서는 ‘상황’이 필요하다. 나는 매력이 없다고 골방 속으로 숨으면 절대로 인연의 실타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모와 매력이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외모 이상의 매력으로 상대를 사로잡는 유혹의 귀재들도 많다. 미모가 뛰어난 사람들보다 매력 넘치는 사람들의 인생이 실제로는 훨씬 행복하다. 매력은 미모처럼 자신을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께하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기술이다. 미를 감상하는 데는 ‘거리’가 필요하지만, 함께하고 싶은 인연을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매력을 키우는 방법조차 상품설명서처럼 일종의 매뉴얼이 되어간다. 영화 <시라노 : 연애조직단>처럼 고백을 위한 각종 대사와 리액션을 대행해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끈다. 멋들어진 프러포즈를 위한 각종 이벤트 또한 산업화한다. <세레나데 대작전> <연애성형 프로젝트 S.O.S> 같은 예능프로그램처럼 현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시라노’ 패러디산업이 인기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처럼 사랑 고백에 서툰 사람들은 멋진 연애편지를 대신 써줄 위대한 문장가를 찾고 싶은 걸까. 희곡 속의 시라노가 만약 이런 연애대행산업의 진풍경을 본다면 ‘이건 정말 시라노답지 않다.’고 느끼지 않을까. 시라노는 단지 말주변 없는 크리스티앙의 사랑고백을 대행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티앙보다 훨씬 먼저, 오랫동안 록산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라노 정신은 ‘대행’이나 ‘연기’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빌려서라도 진심을 고백하고 싶은 열정이 아닐까.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게 되면서 시라노의 비극은 시작된다. 시라노는 커다란 코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에게 결핍된 문학적 재능을, 크리스티앙은 시라노가 동경해 마지않는 화려한 외모를 지녔다. 둘은 완벽한 커플(?)이 되어 한 여자를 사로잡는다. 여자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크리스티앙에게 시라노는 제안한다. “난 자네의 재치가, 자넨 나의 아름다움이 되는 거지.” 그렇게 시라노의 편지와 크리스티앙의 외모는 한 여인을 유혹한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 희곡의 유쾌한 반전은 그녀가 사랑했던 것이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시라노의 편지, 곧 그의 영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시라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매력을 몰랐다. 여기서 그의 안타까운 비극이 완성된다. 시라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매력을 키워 나간다. 그는 전쟁통에 위험천만한 적진을 뚫고 달려가 매일 편지를 부치는 엄청난 용기를 발휘한다. 크리스티앙의 편지로 위장된 자신의 편지를 그녀에게 부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달인, 매력만점의 남자가 되어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의 매력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셈이다. 시라노의 진짜 고백이 시작되는 순간은 수사학적 기교가 진심 어린 영혼으로, 완벽한 연기가 진정한 삶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시라노는 현란한 수사학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린다. 재능이라는 커튼으로 아무리 가려도 콤플렉스라는 칼바람은 시시때때로 영혼을 할퀸다. 록산은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을, 눈부신 상상력을, 뜨거운 격정을 원한다. 크리스티앙은 남의 문장을 빌린 얼굴마담 역에 지치고, 시라노는 자신의 절절한 편지가 타인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데 절망한다. 시라노는 급기야 본심을 들키고 만다. 타인의 사랑을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 ‘나의 사랑’을 연주하고 있음을. 아무리 매력이 철철 넘쳐도 고백의 용기가 없다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그 수많은 편지의 주인은 나’라고 고백했다면, 사랑은 이루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록산은 시라노의 편지에 감동하여 외친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당신처럼 편지를 썼다면, 정숙한 페넬로페도 집에서 수나 놓으며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 거예요.”

 

미모는 정태적이지만 매력은 동태적이다. 연애는 고백이다. 매력은 액션이다. 그러나 사랑은 고백과 액션을 훌쩍 넘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에게 쏟아지는 축복, 마침내 영원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바지런한 동사다.

 

―『한겨레』서기 2012년 1월 14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