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야! 한국사회] 회색, 성찰의 색깔

개마두리 2012. 3. 13. 16:00

 

 

- 고건혁

 

한 대학 동창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졸업한 몇 년간은 전혀 보지 못했고 대학 다닐 때도 별로 친했던 게 아닌지라 솔직히 한동안 그 존재마저 잊고 있던 친구였다. 그럼에도 뜬금없이 만나자는 제안에 선뜻 그러자고 얘기한 것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내가 여태 겪어온 이들 중 ‘회색’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그가 과연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입학 초기에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이 주관하는 세미나에서였다. 덜 여문 확신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 선배들 사이에서 그는 굉장히 지적이지만 그만큼 냉소적인 새내기였다. 선배들의 주장들에 쉽게 납득하지 않았고, 확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다 덧붙여 유머감각 전혀 없는 성격, 그래서 그는 답답한 회색의 인간으로 느껴지게 했다. 이런 까닭에 나는 호기심으로 몇 번 나왔다가 결국엔 발을 끊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여느 새내기처럼 그 역시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남아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던 그의 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오히려 학내 언론을 하겠다면서 먼저 학생회에서 손을 뗀 건 나였고, 그사이 그는 학생회 운동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의 지역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결국엔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간간이 보던 사이였던 우리는 그가 군에 입대를 하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졌다가 7년여가 지나고 나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그사이 유학을 다녀온 그는 얼마 전에 귀국해서 한 정당의 선거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외국에서도 계속 진보정당과 연계하여 ‘운동’을 이어나가던 그는 자기가 필요하다 싶어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구에서 운동원 하나 없는 어느 선거운동본부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또래 중에서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야 비로소 그가 왜 그리 까칠하게 굴면서 쉽게 확신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냉소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 위하여 신중하게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진중함이 섣부른 확신에 휘말려 현실을 망각하는 것을 막아주고 여기까지 그를 끌고 오게 된 것이다. 확신으로 가득 차서 남들에게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하던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을 찾아 주류로 편입되는 사이, 정작 남아 있는 건 한번도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회색의 인간이었다. 주류로 편입한 이들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 중에서도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꾸준하게 후원하며 진보운동을 지탱하는 데 큰 힘이 되는 이들이 있다. 그저 회색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가치를 좀더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이번에 만났을 때 그 친구가 남긴 얘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자신이 현재 운동하고 있는 정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뭐가 크게 나아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얘기, 그저 조금 달라질 가능성 정도를 생각하면서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반드시 굳건한 신념만이 지속을 담보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굳건한 이들이 본바탕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굳건한 신념마저 부러지는 엄혹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애매한 회색의 인간들이 지탱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늘 현실을 대비하고 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때의 회색은 애매함이 아니라 성찰을 의미하는 색깔이다.

 

아무쪼록 그의 건투를 빈다.

 

'논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금과 해제  (0) 2012.03.17
▩한국 자본의 ‘통념’, 인종주의  (0) 2012.03.15
▩재벌개혁 왜 실패했나  (0) 2012.01.29
▩수출 늘면 잘살게 될까  (0) 2012.01.29
▩매력이 사랑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0) 201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