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소설로 읽는 역사 - 페니키아인 이야기

개마두리 2012. 10. 18. 12:15

 

 

 

“각하께서는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 - 옮긴이)의 고대사를 좋아하십니다. 그런 이야기 하나 해줄 수 있겠소?”

 

 

국방부 장관이 묻자 대통령이 흐뭇해했다.

 

 

“각하께서 페니키아인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뱃사람들 중에 제일가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들의 함대는 북쪽 영국(로마식 이름은 브리타니아 - 옮긴이)에서부터 남쪽 남아프리카(희망봉 - 옮긴이)까지 바다를 주름잡았습니다. 장사 수완이 좋아 돈도 아주 많이 벌었죠. 경쟁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은 배가 닿는 곳마다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괴물이 먹어치운 배가 수십 척이라면서요. 거짓말은 정말 그럴듯해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시무시한 바다괴물 이야기가 만들어진 겁니다.”

 

 

- '라픽 샤미‘ 선생의 소설인『1001개의 거짓말』(유혜자 옮김, 문학동네 펴냄, 서기 2002년)에서

 

 

* 옮긴이(잉걸)의 보충설명 :

 

 

페니키아 인, 그러니까 레바논 사람들의 조상이 남아프리카 바닷가에 갔던 건 사실이다. 그들은 바르톨로메오 디아스(서기 16세기에 활약한 포르투갈 사람)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오기 2088년 전에 이미 남아프리카에 온 적이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프리카 대륙의 바닷가를 한바퀴 빙 돌고 왔으니 말이다.

 

 

서기전 600년, 네코(Necho)라는 파라오는 케메트(이집트의 옛 이름)의 동쪽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 이집트의 동쪽 해안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를 한 바퀴 빙 돌아 북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돈을 주고 페니키아 선원들을 고용해 이 일을 맡겼다. 그들은 1년을 항해한 뒤에야 남아프리카까지 내려갈 수 있었고, 거기서 서쪽 바닷가를 따라 북아프리카로 올라오는 데 다시 1년을 바쳐야 했다. “그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들의 성공을 믿어 주지 않았다(애니타 개너리)!”

 

당시 페니키아인과 경쟁했던 헬라스(영어 이름 그리스)의 학자와 역사가들은 이를 ‘엉터리’라고 주장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페니키아인들이 남긴 항해 기록에 뜬 해의 방향을 바탕으로 그들이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돌았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서기전 470년, 한노는 아프리카의 금을 찾으려고 원정대를 만든 뒤 그 사령관이 되어 카르타고를 출발했다. 그는 지브롤터 해협(모로코와 에스파냐 사이에 있는 해협)을 지난 뒤 모로코 바닷가를 따라 서남쪽으로 갔는데, 이 때 카나리아 제도(모로코 서남쪽에 있는 ‘서西 사하라’ 공화국의 서북쪽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그의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를 떠나 ‘모리타니(서사하라의 남쪽에 있는 나라)’의 서쪽 바닷가를 거친 뒤 “악어와 하마가 가득”한 “깊고 폭넓은 다른 하천”에 다다랐는데, “이 강은 어쩌면 세네갈 강(모리타니의 서남쪽에 있는 세네갈 공화국을 흐르는 강 - 옮긴이)이었을 수도 있다(미하엘 그레고르).” “그리고 나서 페니키아인들은 큰 숲이 있는 곶을 돌아 항해했는데 그 곶은 아마도 아프리카의 서쪽 끝인 카보 베르데(세네갈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베르데’곶 제도에 있는 공화국. 수도는 ‘프라이아Praia'다 - 옮긴이)였던 것 같다(미하엘 그레고르).”

 

 

그들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시에라리온(세네갈의 남쪽에 있는 공화국)’ 전방의 ‘셔브로’ 섬까지 갔는데, 그곳에는 ‘카르타고’인들을 따라온 통역사가 ‘고릴라’라고 부른 ‘야생 인간’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침팬지 혹은 비비였을 것이며 여하튼 오늘날 우리가 고릴라라고 부르는 유인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적도 부근 아프리카의 난쟁이 원주민으로 몸에 붉은 갈색 털이 난 피그미족이었는지도 모른다(미하엘 그레고르).”

 

 

한노의 기록에 따르면, ‘고릴라’들은 어떻게든 (‘카르타고’인들에게) 잡히지 않으려 했고 그들을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노 일행이 “여자들 중 세 명을 잡았는데, 그들은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우리를 따라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죽여서 껍질을 벗겨 가죽을 카르타고로 가져왔다. 왜냐하면 비축물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의 항해가 끝나는데, “지리역사가들 사이에는 한노가 실제로 남쪽으로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에 대해 논란이 분분(미하엘 그레고르)”하다.

 

 

(한노의 항해는 그의 선배인 페니키아 뱃사람들이 네코 파라오의 명을 받고 아프리카 땅을 한 바퀴 빙 돈 지 128년이 흐른 뒤에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미 아프리카 바닷가를 돌면서 ‘지식’과 ‘정보’를 모은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기니 만(아프리카 대륙의 서남쪽에 있는 만 - 옮긴이) 옆의 시에라리온까지만 갔을까 아니면 카메룬(나이지리아의 동남쪽에 있는 공화국. 기니 만의 동쪽 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 옮긴이)까지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4,000미터 이상인 카메룬 화산의 폭발까지도 보고 기록했을지 모르지 않는가(미하엘 그레고르)?” 만약 그렇다면 서(西)아프리카 바닷가에 ‘카르타고’인의 식민지가 세워지고, 그 식민지가 ‘본국’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수백년 동안 유지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역사 기록도 ‘카르타고’가 멸망한 뒤 활동했던 ‘카르타고’인의 식민지를 다루어 본류(‘카르타고’)가 사라진 뒤에도 지류(‘카르타고’의 서아프리카 식민지)의 흐름이 유지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한노에 의해 건설된 식민지는 여러 세기 동안 존속되었다. 한노가 탐험을 한 지 800년 후인 5세기 초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아프리카 해안에서는 페니키아어가 사용되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