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어느 실직자의 기도

개마두리 2013. 9. 26. 22:03

아버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와 보시오. 할머니, 그 가엾은 분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잊어버렸소. 그분은

이제 편히 쉬신다오.

빨래도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종일

입을 거리 걱정도 안 해도 되고,

밤새워 애닯게 애닯게

기도할 일도, 아버지에게 애원하고, 슬며서 투덜거릴 일도 없소.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와 보시오, 하느님이 계신다면, 그렇다면

내려와 보시오.

난 이 모퉁이에서 굶어죽을 지경이오.

뭣 땜에 태어났는지 도통 모르겠소.

거절당한 손을 바라보고 있소.

일이 없어요, 일이.

좀 내려오시오, 와 보시오.

내 꼴을, 이 찢어진 신발을,

이 고뇌, 이 텅 빈 창자,

내 한 입 채울 빵 한 쪽 없는 이 도시, 온몸을

파고드는 신열,

이렇게 비를 맞으며

잠들어, 추위에 떨고 쫓기니

정말 알 수가 없소, 아버지, 내려와 보시오.

내 영혼을 어루만지고, 내 마음을

들여다봐 주시오.

난 도적질도, 살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어린아이였을 뿐

그런데도 날 때리고 또 때리고

정말이지 알 수가 없소. 아버지, 정말 하느님이 계신다면,

내려와 보시오. 내 안에서

체념을 찾지만 그런 건 없소. 이 분노를 움켜쥐고,

날을 세워 나도 때려 보렵니다.

목구멍에 피가 차오르도록 소리칠 테요.

더 이상은 못하겠으니까, 나도 창자가 있고

나도 사람이니까.

 

내려와 보시오, 당신의 피조물을

어떻게들 만들어 버렸습니까, 아버지?

거리에서 돌멩이를 씹는

성난 짐승 아니오?

 

- 후안 헬만 시인의 시

 

* 출처 :『새 한 마리 내 안에 살았지』(후안 헬만 지음, 성초림 옮김, 문학의 숲 펴냄, 서기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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