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문익점 할아버지와 목화 아가씨

개마두리 2015. 11. 24. 17:09

 

- 해방 후 미국의 농업 정책과 우리 농업


면화는 아시아의 재래면, 북미(북아메리카 - 옮긴이)의 육지면, 남미(남아메리카 - 옮긴이)의 해도면 등으로 구분된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재래면으로, 조선 시대에는 함경도를 제외한 거의 전국에서 재배되었다.


1904년(대한제국 시대. ‘구한말’이라는 말은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 옮긴이), 미국에서 들여온 육지면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한 이후로는 재래면은 북부의 산간 지대에서만 재배되고, 거의가 육지면으로 교체되었다.


일제는 섬유공업을 통하여 산업 혁명을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값싼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확보, 값비싼 제품의 판매를 통하여 최대 이윤을 실현하려는 식민지 정책을 편 일제 때에 면화 재배는 매우 활성화되었다. 일제 때 매우 많았던 방직 공장에 원료(목화솜 - 옮긴이)를 공급하고도 남아 일부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패망 이후 우리 나라에서 목화 재배 지역은 급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중략)


(한국이 - 옮긴이) 원면을 100% 수입하게 된 것은 미국 때문이다. 한국은 한국 전쟁(6.25 전쟁 - 옮긴이)의 타격과 당시(서기 1950년대 초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 옮긴이)의 흉작으로 미국의 남아도는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해야 할 처지였다. 미국은 전쟁(2차 세계대전 - 옮긴이) 이후 쌓인 과잉 물자를 수출하고, 세계 경제를 자기 나라 중심으로 재편하는 수단으로 미국에서 남아도는 물자로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국의 요구와 미국의 의도가 맞아 떨어지면서, 한국에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대량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5년 5월, 한/미 잉여 농산물 협정이 채결되면서 미국 잉여 농산물은 계속해서 대량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은 주로 밀과 원면(原綿 : 무명의 원료가 되는 목화솜 - 옮긴이)이었다.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를 자기들의 식량 수입국으로 만들려는 미국(더 정확히는 미국정부와 미국의 곡물 회사들 - 옮긴이)의 의도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면화 재배 면적의 변화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42년에 257,682,5 정보(町步. 땅 넓이를 재는 단위. 1 정보는 약 3000평이다 - 옮긴이)에 이르렀던 (한국의 - 옮긴이) 면화 재배 면적은 1960년대 우리나라의 수출 경제를 이끌던 방직 공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16,443 정보에 머물렀다. 그나마 면방직 공업과는 관계  없이 대부분 자가용(自家用. 자기 집[自家]에서 쓰는[用]것. 내다 팔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이 자기 집에서 쓰려고 직접 만드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으로 재배되었다.


그 이후 면화 재배는 계속 줄어들어, 미국이 대외 원조 계획을 세운 지 5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우리나라는 필요한 원면의 100%를 수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밀 99.8%를 수입하였다.


-『교실 밖 지리여행』(노웅희/박병석 지음, 사계절 펴냄, 서기 1994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