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제주도의 용천대 목욕탕

개마두리 2015. 11. 24. 17:48

 


- 제주도의 자연 환경과 생활


제주도(오늘날의 제주특별자치도 - 옮긴이)는 여름철이 고온 다우(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내린다는 뜻 - 옮긴이)할 뿐만 아니라, 연평균 기온도 높고, 연평균 강수량도 많은 곳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냇물이나 강물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


제주도는 검은색을 띠는 다공질(多孔質. 구멍[孔]이 많은[多] 물질[質] - 옮긴이)의 현무암이 많아서, 비가 많이 온다고 해도 빗물은 곧바로 현무암의 많은 구멍을 타고 땅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지하로 스며든 빗물은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은 지하 수백 m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되어, 해안가에 가까이 다다르면 샘처럼 물이 솟아오르게 된다. 이러한 곳을 ‘용천대’라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해발 고도 200m만 되면 마을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제주도의 마을은 용수를 얻을 수 있는 해안가의 용천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용수 확보를 위한 다른 방법은 빗물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갈대 묶음을 나무에 매달고, 그 밑에 항아리를 놓아 빗물을 받는 갈대 항아리와 같은 특수한 생활 도구도 사용되었다.


제주도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는 논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비록 강수량은 많아도 논물을 담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토지는 오랫동안 고구마와 같은 밭농사 지역으로 이용되었다(그나마 고구마도 3세기 전에야 제주도에 왔고, 감자는 서기 19세기가 되어서야 왔으니, 그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곡식을 먹기가 힘들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제주특별자치도의 말인 탐라어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부른다. ‘땅에서 [열리는] 열매’라는 뜻을 지닌 ‘지실[地實]’이 바뀐 말로 보인다 - 옮긴이).


농업이 중심이었던 옛날에 인구 부양력이 가장 큰 벼를 재배할 수 없는 자연적인 조건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땅에서 나는 작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없다면, 섬 지방인 제주도 주민들은 당연히 바다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고, 돌이 많고, 여자가 많아 일찍부터 ‘삼다도(三多島. 세[三]가지가 많은[多] 섬[島]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라고 하였다. 바람과 돌이 많다는 자연적인 조건은(여름지이할 때 필요한 흙 대신 돌이 많다는 뜻이므로,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기르기가 힘들었다는 뜻이다 - 옮긴이) 남자들을 (논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하는 대신 - 옮긴이) 먼 바다로 내보냈으므로 바다에서 죽은 남자들도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여자를 많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남은 여자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주도에 해녀(‘잠녀’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가 많아지게 된 이유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 - 일본처럼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 땀이 잘 증발되지 않는 무더운 기후 조건, 다공질의 현무암이 많아 냇물이나 강물이 발달할 수 없는 지질 조건, 용천대를 통하여 생활용수를 공급받아야 하는 지형 조건, 그리고 바닷물에 몸을 담글 수밖에 없는 생업 조건들 -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제주특별자치도 토박이들이 ‘뭍’이라고 부르는 한반도와는 달리 - 옮긴이) 목욕이라는 생활양식이 특수하게 나타났다.


(한반도에서는 서기 20세기 이전에는 “대중목욕탕”이 발달하지 않았고, “냇물이나 강물”에서 몸을 담그고 씻었다. 양반의 경우 집에 있는 “목욕간”에서 몸을 씻었으며, 보통 백성이나 가난한 사람은 “목욕간”이 없으므로 물을 따로 길어와 “물통”을 물로 채운 뒤 “부엌”에서 그 물로 목욕을 했다 - 옮긴이)


그리하여 나타나게 된 시설이 용천대 주변의 간이 목욕탕이다. 이 목욕탕은 사방 약 5m 정도의 넓이로 제주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어른 가슴 높이 정도까지 쌓아 만들었다. 이 시설은 요즈음의 대중목욕탕과 같다. 물론 이 시설은 식수원으로도 빨래터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용천대에서 물은 계속 흐르므로 구태여 물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을의 용천대는 서로 인접해 있어 용천대를 이용해 만든 목욕탕은 서로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지만, 그 거리는 인접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여자가 밤에 머리를 감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남자는 낮에, 여자는 밤에 목욕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교실 밖 지리여행』(노웅희/박병석 지음, 사계절 펴냄, 서기 1994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