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서기 1968년 남베트남 꽝남성

개마두리 2018. 1. 19. 19:54

※1968 꽝남대학살 위령비로 가는 길


* 꽝남성(省) : 베트남의 일부분. 성(省)은 한국의 도(道)와 성격이 같은 행정구역이다. 이 성은 베트남 중부의 남쪽 끝에 있다(옮긴이).


-『한겨레 21』지 기사


- 입력 : 2018.01.19


[한겨레21]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 기리는 위령비 지도와 순례길 소개/한국인 인기 여행지 다낭에서 시작된 ‘꽝남의 비극’… 민간인 4천 명 이상 희생


- 한베평화재단/『한겨레21』공동기획_1968 꽝남! 꽝남!


① 1968 꽝남대학살 지도


② 무고한 죽음에 대한 예의


③ 살아남은 자의 물음


한베평화재단/『한겨레21』은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1968 꽝남! 꽝남!’ 기사를 연재한다. 이번호에 실리는 첫 회엔 한베평화재단과『한겨레21』이 1차로 완성한 ‘1968 꽝남대학살 지도’와 이 지역을 둘러보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꽝남순례길 1코스’를 소개한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로 각각 가족 19명, 9명을 잃은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최근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한 다낭, 그 바로 밑에 올해 대학살 50주기를 맞는 꽝남이 있다. _편집자


해마다 한국 관광객 수십만 명이 찾는 베트남 중부 도시 다낭(다낭은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 옮긴이). ‘꽝남의 비극’은 다낭에서 시작됐다. 미군은 1967년 다낭의 외곽 방어를 한국군에 요청했다. 베트남전쟁 중 다낭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공군기지, 미 해병 제3상륙군 사령부, 남베트남 제1군단 사령부가 밀집한 전략 요충지였다.


한국군이 다낭 남쪽으로 약 20km 거리에 있는 꽝남성 호이안 지역을 맡아주면, 미군과 남베트남은 다낭을 방어하면서 베트남의 ‘동맥’인 ‘1번 도로’를 안정적으로 활용하고, 남베트남 정부 통제 지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한국군 처지에선 보급/항공을 지원해주는 미 해병과의 거리를 좁히는 이점이 있었다. 다만, 당시 한국군은 이 지역을 ‘베트콩(VC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우세 지역’으로 판단했다(국방부『파월한국군 전사』 제3권 890~891쪽 참조).


한국군 청룡부대(제2해병여단)는 1967년 12월22일 꽝남성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했다. 한국군 파병 전투부대로는 처음 베트남에 상륙해(1965년 10월9일) 중부 깜라인/투이호아/추라이 지역을 거쳐 호이안 지역에 자리잡은 것이다.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가 그 지역을 인계했다.


주둔 직후, 1968년 1월부터 청룡부대는 꽝남성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음력 1월30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퍼부은 북베트남군/베트콩의 ‘뗏공세’(구정대공세) 이후 학살은 잦아졌다. 호이안시 인근에서만 한 달 새 껌안 학살(1월30일/11명 사망), 퐁니/퐁넛 학살(2월12일/74명 사망), 하미 학살(2월22일/135명 사망), 하꽝 학살(2월29일/36명 사망)이 벌어졌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지난해 12월26일부터 1월2일까지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동/리 단위)에 있는,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 추모 위령비, 위령관, 묘지, 학살 현장을 찾아갔다. 한베평화재단이 입수한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총국 직속 연구소 보고서(「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1980년대 중/후반 작성) 등의 자료와 위령비 비문, 현지 주민 증언을 종합해 학살 과정과 규모를 취재했다. 대조검토(크로스체크) 과정을 걸쳐 확인된 학살 규모만 최소 646명이었다. 학살은 1968년에 집중적으로 벌어졌고 최소 1971년까지 이어졌다.


이번 취재로 확인한 학살은 전체 덩어리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 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한 5개 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카인호아성, 푸옌성)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 수를 9천 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 정부, 공공기관, 인민위원회, 군에서 작성한 자료 등 수십 건을 종합한 결과다. 1999년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 알린 구수정『한겨레21』전 호찌민 통신원(현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에 따르면, 1968년부터 꽝남성에서만 민간인 4천 명 이상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진 학살엔 이름이 붙는다. 난징대학살(남경南京 대학살 - 옮긴이), 간토대학살(관동關東 대학살 - 옮긴이), 밀라이학살…. 1968년부터 꽝남성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이번 연재에서 그 이름을 붙였다. ‘1968 꽝남대학살’.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1968 꽝남대학살’의 흔적을 찾아 떠났다.


12월26일 인천공항에서 5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도착한 곳은 베트남 중부 다낭 공항이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차로 40분, 호이안시 중심가로 들어갔다. 호이안시는 꽝남성(도 단위) 동북부에 있다. 학살의 흔적을 찾아 방문한 디엔반시, 주이쑤옌현(군 단위), 탕빈현 소재 마을(동/리 단위)들은 청룡부대가 주둔한 호이안시를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 우연히 만난 학살 유가족


베트남엔 지천이 무덤이었다.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무덤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1960~75년 베트남전쟁의 흔적이다.


12월26일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하꽝 위령비로 가는 길, 양쪽으로 듬성듬성 모가 심긴 넓은 논 사이로 좁은 포장도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누런 소 떼가 풀을 뜯다가 길을 막고는 느릿느릿 길을 비켰다. 좁은 길 양옆으로 오토바이들이 아슬아슬하게 쌩쌩 달렸다.


하꽝 위령비엔 ‘딘씨 사당에서 남조선(조선 공화국과 베트남에서 한국을 일컫는 말. ’남쪽 조선‘이라는 뜻이다. 냉전시절에는 지나[支那] 정부도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왜국[倭國]의 공산주의자들도 한국을 그렇게 불렀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이 이름을 쓴다는 것은 한국을 ‘정통성 있는, 올바른 나라’로 여기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 옮긴이) 병사들에게 학살당한 동포들을 기리는 위령비’라는 비문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받침대를 덮은 대리석 두 장은 깨져 내려앉았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참배를 하자, 현지 주민 서너 명이 주위로 몰려들어 말을 걸었다. “봤지? 여기 위령비가 무너졌잖아. 불쌍한 사람들이잖아.”


현지에서 길을 묻다 만난 주민들과 종종 같이 참배했다. 12월30일 주이쑤옌현 주이찐사 동옌촌의 티에우 할머니 방공호 집단묘지(1968년 10월5일 14명 학살) 앞에서 우연히 만난 당히엔(81세)이 그랬다. 알고 보니 그는 이 학살로 고모를 잃은 유가족이었다.


유가족 아닌 주민들도 같이 참배했다. 12월28일 주이쑤옌현 주이응이어사 선비엔촌에서 만난 보낌훙(35세)은 인근 의류제조업체 직원이었다. 그가 1969년 8월25일 한 할머니 방공호에서 한국군이 28명을 학살한 현장을 안내했다. 그는 유가족이 아니었지만 그곳을 정기적으로 찾아 참배했다. “우리 회사 직원들도 매달 음력 1일과 구정 때 여기 와서 향을 피우고 참배해요.”


베트남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비를 각별히 여겼다. 12월27일 주이쑤옌현 주이탄사 반꾸엇촌에서 만난, 학살 생존자이자 유가족인 쯔엉반까(60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위령비를 통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미래 세대는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그 사건을 기억하며, 아이들과 후손에게는 네 조상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한국군은 1968년 1월19일 반꾸엇촌에 있는 쯔엉반까의 할아버지 암자에서 그의 가족 6명(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작은아버지, 5촌 아저씨, 숙모, 사촌여동생)을 학살했다. 당시 10살이던 쯔엉반까도 암자에 함께 숨어 있다가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손가락 네 개를 잃고 정강이를 다쳤다.


“마을 어르신들은 ‘따이한’(대한(大韓) : 한국군을 지칭)이라고 하면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1월1일 탕빈현 빈즈엉사 1촌에서 만난 주민이 말했다. 베트남에서 만난 여러 주민들과 유가족/생존자들은 한국군이 여성, 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12월30일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쭝동에서 답사한 하미 위령비 앞면엔 희생자 명단이 쓰여 있었다. 명단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태어난 해가 적혀 있다. 전체 135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71명이 당시 18살(1950년생) 이하였다.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아이(1968년생)도 3명 있었다. 60살(1908년생) 이상은 14명이었다. 중간 이름이 ‘티’(여성 이름)인 희생자는 98명이다. 여성 희생자가 135명 중 최소한 98명 이상이란 뜻이다.


▶ 미완으로 남은 대학살 지도


베트남인들은 학살 50주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위령비를 짓고 있다(표지이야기 “그 기억은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아요” 참조). 꽝남성 곳곳에 있는 위령비들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전체 모습을 설명하기엔 여전히 불충분한 증거다. 위령비에는 건립 시점(보통 1990년대 이후)에 신원이 명확히 확인된 희생자 이름만 기록돼 있다. 가족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거나 오래돼 주검을 식별할 수 없었거나, 목격자/생존자가 없는 죽음들은 그대로 묻혔을 것이다. ‘1968 꽝남대학살 지도’가 끝내 미완의 지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꽝남(베트남)


= 글 :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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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원문 :


http://v.media.daum.net/v/20180119181810133?rcmd=rn


* 옮긴이의 말 :


나는 베트남 사람들 앞에서는 죄인(罪人)이다. 그리고 나는 가해자의 자식이며,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가 피해자들 앞에 사죄/배상하고 과거를 인정하고 청산하지 않는 한) 또 다른 가해자다.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들이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내게 화를 내고, 나를 믿지 않는 건 당연하다.


나는 동학 농민군과 대한제국의 의병을 “폭도”로 부르고, 3.1 항쟁(만세 시위)을 “조선 폭동”으로 부르고, 독립군을 “마적(馬賊)”으로 부르고, 안중근 의병장을 “살인마”로 부르고, 윤봉길 투사(鬪士)를 “폭한(暴漢)”으로 부르고, 한인애국단과 의열단 단원들을 “조선의 테러리스트”로 낙인찍고, 그것도 모자라 왜국(倭國)의 잘못된(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문제 삼으면 화를 내며 “도대체 그게 지금의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하고 미친개처럼 짖는 젊은 왜인(倭人)들처럼 굴고 싶지 않다.  


* 옮긴이의 말 2 :


나는 두 해 전(서기 2016년),『한겨레』의 논조에 실망/분노했고(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한겨레』에 실망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조선일보』나 <뉴데일리>나『동아일보』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님을 또렷하게 밝히고 싶다는 말은 덧붙이고자 한다 - 지금은『시사 IN』과「프레시안」과『한국일보』를 읽고 있다 - ), 그래서 그 신문을 끊었다.


그러나 서기 2016년 이전에 읽었던『한겨레』기사들은 (너무나 아까워서) 차마 버리지 못했고, 그것들만큼은 다시 한 번 읽어보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만 골라서 카페 회원들에게 소개하기로 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비록 내가『한겨레』에 실망해 등을 돌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군의 남베트남인 학살/강간/고문/방화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고, 한국 안에서 이 문제를 파헤치는 언론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이 기사만 내 블로그에 싣자. 지금은 제대로 된 자료 하나가 아쉬워.'하고 마음먹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