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미스르의 자유인이 쌓은 ‘피라미드’

개마두리 2006. 1. 15. 18:35
 

*인용한 글 : 붉은색


사람들은 “미스르의 ‘피라미드’”라는 말을 들으면 공사장에서 “거대한 돌덩어리를 끌면서” 조금이라도 느리게 움직이면 “감독자의 냉혹한 채찍”을 맞은 노예들과, 백성들을 쥐어짜서 모은 재물을 제 무덤을 짓는 일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파라오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무덤에 묻힌 파라오를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거대한 건축물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을 세우는 데 들어간 노예들의 피땀을 가릴 수는 없다(칼 마르크스)”는 말을 인용하며 ‘피라미드’를 미스르의 “왕들이 재산을 헛되고 어리석게 과시한 것(로마의 저술가인 ‘대大 폴리니우스’)”이라고 평가한다. 좀 더 ‘공정한’ 사람은 이 건축물을 묘사할 때 “그처럼 유례없는 건축물을 완성시킨 노역자들은, 그 비용을 감당한 왕들보다 훨씬 더 찬양을 받을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재능과 기술을 훌륭하게 증명한 데 비해서, 왕들은 그저 상속이나 착취로 얻은 재화를 제공한 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고대 엘라스의 역사학자인 디오도루스).” 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미스르(케미)의 파라오들은 제 무덤을 지으려고 많은 노예들에게 땡볕 더위에 가죽 채찍을 맞으면서 무거운 바윗덩이를 끌어오라는 명령을 내린 ‘뻔뻔한 것들’이며, 나라 살림에 보태야 할 보물들을 ‘쓸데없는 일’에 쏟아부은 ‘돌머리들’인 셈이다.


(‘이집트’를 ‘미스르’나 ‘케미’라고 부르는 까닭을 알고 싶으면 이 게시판에 있는「▩영화 <미이라>가 왜곡한 고대 ‘이집트’의 천재」를 읽어보시라)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생각이 전혀 터무니없는 그릇된 상상도(想像圖)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이어널 캐슨’ 교수).” 역사학자들이 미스르(케미)인 안내자의 말을 인용해 “<피라미드>는 노예들을 부려서 세운 건축물”이라고 주장한 헤로도토스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냈고, ‘피라미드’의 크기와 규모를 보고 놀란 후세 사람들이 그 안에 묻힌 군주들에게 선입견을 품었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스르(케미)인들이 남긴 역사 기록과 ‘피라미드’ 근처에서 나온 사람의 뼈, 그리고 고고학자가 한 실험은 ‘피라미드’가 노예가 쌓은 건축물이 아니며, 초(超)고대문명이나 외계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예산을 헛되이 쓰는 쓸데없는 짓’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럼 새로운 지식을 동원해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아보자.


▣이름부터 잘못 알려진 건축물  


우선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고대 미스르(케미)인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파라오의 무덤으로 쓰인 건축물을 ‘피라미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건축물을 ‘메르’라고 불렀다. ‘피라미드’는 고대 엘라스 사람들이 메르를 보고 그 모양이 자기네가 늘 먹는 과자와 비슷하다고 여겨 붙인 이름이다. 과자의 이름은 ‘피라미스(Pyramis)'였으며 그 뜻은 ’세모꼴(삼각형)‘이니, 엘라스 사람들은 메르의 겉모습만 보고 무덤에 과자 이름을 갖다붙이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인부들


‘메르’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메르를 쌓는 데 동원된 인부들이 매를 맞으며 일하는 노예였다는 인식도 잘못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고고학자들이 ‘증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서기 1990년, 미스르의 고고학자인 ‘자히 하와스’ 박사는 계단식 메르(피라미드)에서 서기전 2500년경(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7년 전)의 사람 뼈를 찾아냈다. 이는 메르를 짓는데 동원된 인부들의 뼈로 여겨졌는데, 그 뼈는 다친 부분에 치료를 받은 흔적이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인부들이 왕이 보낸 사제(이 무렵 사제들은 의사를 겸하기도 했다)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어떤 인부의 팔뼈에는 “부러진 팔을 부목으로 고정시킨 흔적(디스커버리 채널)”이 남아있었고, 어떤 인부의 다리뼈에는 “다리 하부 절단 수술을 받은 흔적(디스커버리)”이 남아있었으며, 어떤 인부의 머리뼈에는 “뇌수술을 받은 흔적(디스커버리)”“머리뼈 바깥에 칼을 댄 자국(디스커버리)”이 남아있었는데, 하와스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이야말로 “노예들의 피라미드 건설을 부정하는 증거”로 손색이 없다. 노예였다면 뇌수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와스 박사는 메르(피라미드) 근처에 있는 인부들의 거주지에서 임금 지급문서를 찾아냈는데, 노예들은 일하고 나서 따로 대가를 받진 않으므로 이것도 메르(피라미드)를 노예들이 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참고로 메르를 쌓은 “일꾼들은 봉급의 일부를 무와 마늘로 받았는데, 이 야채를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 이 때는 아직 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월급도 돈이 아닌 현물로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임금을 못 받으면 파업을 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대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서기전 1170년(지금으로부터 3177년 전 - 옮긴이)께의 일인데, 정부가 노임 지불을 두 달 가량 늦춘 적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테베의 묘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연장을 집어던지고 일터를 떠나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라고 외치면서 행진했다.


그들은 람세스 2세의 장제전(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전당 - 옮긴이)인 ‘라멧세움’까지 가서 경작지 끝에 있는 라멧세움의 벽 바깥쪽에 주저앉았다. 관리 세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일터로 돌아가기를 부탁했으나 그들은 꼼짝도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또다시 행진을 계속하여 사흘째에는 본전 구내에까지 들어갔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동했으며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 안으로 그들에게 한 달 치 노임이 지불되었는데 그들은 두 달 치 노임이 모두 지불될 때까지 여드레 동안 파업을 계속했다.”


― 라이어널 캐슨,『古代 이집트』     


정부가 파업을 일으킨 인부들에게 관리를 보내 일터로 돌아가라고 설득한 사실과, 파업이 계속되는 동안 어떤 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존중받는(그리고 자제할 줄 아는) 자유인’이었음을 말해준다. 헤로도토스가 말한 ‘피라미드를 쌓느라 혹사당한 노예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일부 중노동과 보수작업에 전쟁포로들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노역자들은 홍수기에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농민들(크리스토퍼 엔젤)”이었고, 그들이 메르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크리스토퍼 엔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인 <십계>(찰튼 헤스턴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에 나오는, ‘메르를 쌓을 돌을 나르다가 쓰러져 미스르인 감독에게 가죽 채찍으로 얻어맞는 히브리인 노예’는 이미지는 완전히 잘못된 고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이며,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이 점을 고려해서인지는 몰라도 <십계>를 재구성[리메이크]한 만화영화인 <이집트 왕자>에는 히브리인[유태인]들이 메르를 쌓는 데 동원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인부들이 노예가 아니었다면, 메르를 쌓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는 고정관념도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제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 고고학자의 실험을 바탕으로 - 한번 따져보자.

 

▣생각보다 쉬웠던 메르 쌓기    


예전에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메르 한 개를 쌓을 때마다 미스르(케미)인 10만 명이 20년(또는 40년) 동안 동원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라이어널 캐슨).” 서기 1990년대 초 ‘마크 레너’가 한 ‘노바(NOVA)'라는 실험에 따르면 대원 12명이 단순한 도구들만 써서 석회석을 캐내도 “최고 2.5톤의 무게에 이르는 것까지 포함해서 석회질 암석 총 186개를 단 21일 만에 파냈(한스 크리스티안 후프)”고 그 돌들을 “예정된 공사장까지 순전히 인간의 근육 힘으로만 끌고 가서(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메르를 쌓을 때는 “무게가 1톤인 돌덩이리들을 들어 올리는 데(마크 레너)”에 “네댓 명의 남자만 있으면 충분(마크 레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무거운 돌덩어리들은 인부(실험에 참여한 대원 - 옮긴이) 몇이 지렛대를 쓰는 동안 남자 20명이 밧줄을 당기면서 들어올렸다(마크 레너).” 그렇다면 메르를 쌓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동원된 인부의 수는 기록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적었고 공사기간도 짧았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설령 헤로도토스가 전한 공사기간을 받아들인다 해도, 동원된 인력이 적었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헤로도토스는 쿠푸 피라미드에 대해 서술하면서 20년이라는 공사기간이 걸렸다고 했는데, 피라미드를 그 시간에 완공하려면 당시 석공들은 휴일을 뺀 나머지 날 동안 매일 약 340개의 돌들을 공급해야 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레너의 계산법을 참조하고 작업 중에 발생하는 통상적인 노동력의 공백을 감안하더라도 1만 명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일꾼과 기술자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임페리움』


좀 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자면 메르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는 4000명(라이어널 캐슨)”이고 “이것은 당시 인구의 1퍼센트에도 해당되지 않는 수치(라이너 슈타델만 교수)”다.


그보다 더 많은 수치를 제시한 자히 하와스 박사도 “인부들의 뼈와 문서를 바탕으로(디스커버리 채널)” “2만 명이 20년 동안 동원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므로, 1년에 동원된 숫자는 1천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며, 그 동원이 농업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메르를 수십 년 동안 연구한 ‘라이너 슈타델만’ 교수도 하와스 박사와 비슷한 수를 언급하고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메르 축조에는 “대략 2만 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피라미드(메르)의 본체 작업에 숙련공 5천 명, 돌을 나르는 데 5천 명, 돌을 다듬는 데 5천 명, 숙식을 포함해서 인부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5천 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누구의 분석을 따르건, 메르 건설에 동원된 인부의 수는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것보다 훨씬 적음이 확실하다)


이제 여러분은 메르 건설 산업이 미스르(케미)의 농업에 지장을 준 ‘헛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엘라스인/로마인의 평가는 사실과 다르며, 이는 어디까지나 메르가 세워질 때의 사정을 잘 몰랐던 외부인의 착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리라.


이로써 나와 여러분은 ‘메르를 노예가 쌓았다’는 고정관념과 ‘메르를 쌓는 일은 힘과 시간이 많이 드는 괴로운 일이었다’는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 커다란 건물을 지은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부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를 알아보자.

 

▣즐거운 공익사업


미스르(케미)인의 메르 건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공익사업에 쓸 수도 있었을) 재물을 ‘시신이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건축물’을 짓느라 낭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인부들은 자기 무덤을 짓는 일도 아닌데 무거운 돌덩이를 날라야 했잖아, 얼마나 불쌍해? 그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서 죽을 맛이었을 거야.”다. 옳은 말이다. 땡볕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해야 한다니, 얼마나 불쌍한가! 아마 그들은 마음 속으로 파라오와 감독들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솔직히 말하라면, 아니다. 메르를 짓는 일은 미스르(케미)의 결속을 다지고 백성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 사업에 불려온 인부들은 자부심을 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르를 쌓는 일은 놀고 있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중요한 공공사업이기도 했다. 그럼 메르 건설이 얼마나 중요한(그리고 즐거운) 일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나일 강은 - 서기 1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세워질 때까지 - 주기적으로 범람했다. 그리고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비옥한 땅이 생겼다. 그러나 강이 범람을 하는 동안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 “나일 강의 범람은 4개월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 나라가 할 일이 없어 노는 농부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했으며, 그 때문에 메르 건설이라는 커다란 사업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그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렌초 로시)”는데, 이는 “국가에 노역을 제공하는 대가로 외적에게서 보호받고 먹을 거리를 받았기 때문(렌초 소리)”이며, 홍수가 땅을 휩쓸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기간 동안만 공사장에 가서 일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메르 공사는 1년에 넉 달 동안만 진행한 뒤 다음 해에 나일강이 다시 범람할 때까지 중단되었으며, 범람이 시작되면 다시 인부들을 징발해 일을 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부로 일하라는 ‘소집 영장’을 받은 뒤 투덜거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루하고 답답했는데 아주 잘 됐다’고 생각하며 나라의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백수가 되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사람이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놀기만 하면 우울증에 걸린다 - 필자도 다섯 달째 백수로 살고 있다 - .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환경이 사람에게 무력감을 심어주고 의욕을 앗아가는 것이다. 미스르 농부들도 이 때문에 넉 달 동안 집에서 뒹굴며 노느니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왕을 위해 일한다는 데에 보람을 느껴, 어느 노무장은 ‘누구 한 사람 지치는 일도, 목이 마르는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마치 신을 위한 멋진 제례라도 벌인 것처럼 마음껏 먹고 마셨다(라이어널 캐슨).’”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자칫 잘못하면 ‘실업자’가 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기에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말고도 그들이 “애국심을 품고 공사에 참여(디스커버리 채널)”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히 하와스 박사의 말에 따르면, 메르 건설은 “국가적인 프로젝트였기에 모든 사람이 합심해야 했고,” 그 때문에 미스르(케미)의 ‘정신적인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미스르(케미)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고(그들은 수많은 농부들 가운데서 특별히 뽑힌 노동자였기 때문에, ‘중요한 일에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메르를 쌓음으로써 왕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아니 온 미스르의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공사장에서 일할 때 온 힘을 다해 일했고 돌아갈 때는 대지에 자신의 ‘초상’을 새겼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메르 축조는 “한 사람이나 일부 계층의 업적이라고 할 수 없(렌초 로시)”으며 그것은 “노동자부터 고위 성직자, 건축가, 디자이너, 현장 지휘자를 비롯해 다양한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한 국가적 사업(렌초 로시).”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메르를 쌓는 동안 적군이 쳐들어오면 어떡하느냐고 물으실 텐데,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계곡의 바깥쪽은 사막이라 사람들이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홍수가 일어나는 동안 - 옮긴이) 이집트(미스르 - 옮긴이)는 세상에서 고립되었고, 이웃 나라 때문에 골치를 앓을 일도 없었다(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 이는 미스르(케미) 정부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이집트를 지킬 필요가 없고 … (중국이나 로마처럼 - 옮긴이) 사람들을 동원해서 성벽을 만들 필요도 없(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홍수가 나일 계곡을 휩쓰는 동안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메르 공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메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의문을 다 살펴봤으니, 우리가 어째서 메르에 대해 잘못 알게 되었는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엘라스/로마인들이 어째서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었는지를 살펴본 뒤 이 글을 끝내자.


▣후세 사람들의 착각과 잘못된 정보 전달


메르를 다룬 글의 신빙성을 따질 때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기록자가 직접 현장에 가 본 적이 있느냐와, 기록자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다룰 때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글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카이로의 독일 고고학 연구소 소장을 지낸 ‘라이너 슈타델만’ 교수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헤로도토스가 직접 기자에 가 보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기자 지역에 약탈을 일삼는 베두인족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히 스핑크스를 보았을 것이다. 근처에 가면 모래 위로 우뚝 솟은 스핑크스의 머리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만일 그걸 보았더라면 그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내 결론은 이렇다. 그는 결코 기자에 간 적이 없고, 단지 몇몇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오늘날까지 피라미드를 두고 이리저리 오가는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 라이너 슈타델만


다시 말해, 그는 직접 미스르(케미)에 가서 메르를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미스르인 안내인의 정보를 비롯한 몇 가지 이야기만 수집한 뒤 그걸 비판/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파피루스에 옮겨 적었을 뿐이고, 이를 후세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그대로 옮겨적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들을 부려먹어서 지은 피라미드’라는 ‘신화’가 생겨난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그는 일부러 사실을 왜곡한 게 아니라 잘못된 판단과 선입견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헤로도토스 - 옮긴이)가 기록할 때는 (메르를 쌓은 지 - 옮긴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헤로도토스는 미스르에 메르가 나타난 지 2천여 년 만에 메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 옮긴이).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피라미드 건축에 관한 실제적인 자료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들은 주로 남들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 배경에는 그런 엄청난 건축물을 주제넘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외람된 것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적 이념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왜 그런 것을 만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라이너 슈타델만 


(나는 헤로도토스가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본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메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주제넘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외람된 것”이라면 파르테논 신전도 비슷한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 내가 정보를 얻지 못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 파르테논 신전을 놓고 그런 평가를 한 엘라스인/로마인은 없다. 같은 건축물이라도 서구인이 지으면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이고 미스르인이 지으면 ‘헛되고 어리석은 낭비’란 말인가?)


비록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 하더라도 2천 4백여년 동안 사람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퍼뜨린 기록을 남겼다는 점을 생각하면(그리고 그 기록이 한 나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왜곡된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점도 고려하면), 그는 - 고대 세계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는 것과는 별도로 - ‘역사’라는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하며, 나아가 그의 기록을 바탕으로 미스르(케미)의 역사를 배운 사람들도 피해자(미스르인)에게 사죄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쳐야 할 것이다.        

 

▣끝맻음


고고학 유물과 역사학자들이 찾아낸 기록과 학자들의 실험을 바탕으로 - 메르 건설에 대해 -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 통일국가를 이룬 미스르(케미) 왕실은 나라를 상징하고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신의 화신으로 여겨진 왕의 무덤을 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나일 계곡은 1년에 넉 달 동안은 홍수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왕실은 ‘실업자’가 되어 놀고 있는 농부들을 임금을 주고 고용해 메르를 쌓으면 농부들도 구제하고 메르도 쌓아 자신의 위신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임금 문서를 만들고 다친 인부들을 치료하고 파업을 일으키면 밀린 월급도 주어서 인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농부들은 실업자 신세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미스르(케미)를 상징하는 위대한 조형물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고, 일이 끝나면 축제에라도 온 듯이 먹고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메르는 어느 한 계층의 작품이 아니라 미스르(케미)안의 모든 계층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메르 건설은 결과적으로 미스르의 정신적인 통일에 기여했고, 파라오의 위상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스르 백성들의 자존심까지 지켜 주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메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엘라스인은 건축물의 크기와 규모만 전해듣고 그 건물을 ‘허영과 낭비가 빚어낸 실패작’으로 간주했고, 이후 미스르(케미)인 자신이 남긴 기록이 사라지고 그 엘라스인(헤로도토스)이 남긴 기록만 남아 전해진 나머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후세 사람들은 메르를 - 엘라스인이 전한 대로 - ‘노예가 괴롭힘을 당하면서 힘들게 쌓은 건물’로 알게 된다.


메르를 ‘노예가 쌓은, 헛되이 재물을 낭비한 건축물’로 인식하는 태도는 한 나라(또는 민족)가 ‘자신의 기록’이라는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남의 기록(남의 목소리)으로만 자신을 알리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기록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렸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이며, 우리는 이 일을 거울삼아 고대사를 비롯한 역사를 배울 때 관련 기록(과 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보다 냉정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비판/검토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임페리움』(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박종대 옮김, 도서출판 ‘말글빛냄’, 서기 2005년)


―『이왕이면 이집트』(테리 디어리/피터 헤플화이트 지음, 이은선 옮김, 주니어김영사, 서기 1999년)


―『이집트 사람들』(렌초 로시 지음, 서정민 옮김, 사계절, 서기 2003년)


―『古代 이집트 : 라이프 인간세계사』(라이어널 캐슨, 타임라이프 북스, 1981)


―『다영이의 이슬람 여행』(정다영, 창비, 서기 2003년)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리더스 다이제스트, 서기 1989년)


―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 : 「임호텝의 사라진 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