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유선은 바보 황제가 아니다!

개마두리 2015. 8. 9. 17:24

* 유선(劉禪) :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의 마지막 황제. 중국의 삼국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유선을 용렬한 군주로 여기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유선은 친정(親政. 임금이 몸소[] 다스림[]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을 시작한 후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했다. 그러나 고대의 어느 황제 곁에도 소인은 몇 명씩 꼭 있었다. 만약 이 점 때문에 유선을 머저리 황제라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둘째, 위나라가 쳐들어오자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당시 형세로 볼 때, 유선에게는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 인용자) 철저하게 멸망할 것인지, 아니면 구차하게 삶을 구걸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고,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바보라고 부를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중국의 황제 가운데는 싸우지 않고 항복한 자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영자영은 유방[劉邦. 서한西漢을 세운 사람]이 진나라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자, 그의 군대를 막거나 그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했다 - 인용자)

 

당시 그는 투항을 거부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대신들이 모두 항복하자고 말하는데, 너는 오히려 혈기만 믿고 싸우자고 주장하니, 온 성을 (촉 백성들의 - 인용자) 피로 물들일 작정이냐?”

 

이렇게 볼 때 유선은 어진 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배은망덕했다. 이는 유비가 아이를 내동댕이쳐서 사람(조운趙雲 - 인용자)의 마음을 얻다.”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조운(‘조자룡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인용자)이 난군(亂軍) 중에서 유선을 구해냈으나, 훗날 관우, 장비, 마초(馬超), 황충(黃忠)을 추증할 때 조운만 쏙 빼먹었다. 유선은 조운에게 큰 은혜를 입고서도 이를 헌신짝처럼 저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가 조운을 추증하지 않은 것은 사실 조운에 대한 유비의 처우를 따랐기 때문이다. 유비는 장군 직에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좌장군 마초, 후장군 황충, 이렇게 네 명만 봉했다. 조운은 그 자리에 전혀 끼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강유(姜維)등이 이 문제를 제기하자, 유선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조운을 추증했다.

 

넷째, 밸이 전혀 없었다. 촉나라가 사마소(司馬昭. 사마의의 아들. 위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었다.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진西晉 왕조를 세운다 - 인용자)에게 멸망한 후 유선은 망국의 군주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갔다.

 

낙양에 도착하자, 사마소가 연회를 열어 그를 초대했다. 그런데 연회장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촉나라 것이었고, 기녀들이 추는 춤 역시 촉나라 것이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이는 고립된 항우에게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려주는 것과 흡사했다.

 

당시 투항한 촉나라 대신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지만, 유선만은 오히려 담소(談笑. 웃으면서[] 이야기함[] - 인용자)를 즐기며 태연자약했다. 그러자 사마소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이처럼 생각이 없는 자를 본 적이 없구나!”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때 유선은 이미 그물 속 물고기(어부나 낚시꾼이 그물 안에 걸린 물고기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으며, 그 물고기가 살고 싶어서 퍼덕인다 해도 그걸 물고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듯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자기를 붙잡아 둔 사람에게 처분을 맡겨야 하는 처지를 빗댄 말이다 - 인용자)’나 다름없었으니, 속없는 행동이야말로 명철보신(明哲保身.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 자기 몸을 보전함 - 인용자)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나도 허 선생의 분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만약 유선이 사마소 앞에서 자기가 독립국가의 임금이었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거나, 나라가 망해서 슬프다거나, 자기는 억울하고 고향이 그립다고 말했으면 사마소는 화를 내며 유선을 사형에 처하거나 옥에 가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선이 웃고 즐거워한 건 연기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었다고 봐야 한다. 유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마소의 비위를 맞추고 바보 멍청이인 척 해야 했을 것이다. 만약 바보로 낙인찍히면 사마소는 유선을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바보를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라는 결론을 내렸을 테니까. 실제로 유선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단지 황제 자리를 빼앗긴 뒤 안락공으로 강등당하는 데서 그쳤고, 남은 삶을 낙양에 갇혀서 살다가 자연사했다 - 인용자)

 

이렇게 볼 때 유선은 사람들 인상 속에 깊이 박힌 대로 바보가 절대 아니었다. 그가 만일 좋은 집권 환경을 만났다면 일대의 영명한(英明. 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한 - 인용자) 군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비는 죽기 전에 유선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승상(제갈량 - 인용자)이 네 지혜가 매우 뛰어나다고 말했으니, 정말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

 

아버지만큼 자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덧붙이자면, 유비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고, 그 능력이 제갈량보다 뛰어났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갈량이 유비보다 더 똑똑하고 슬기롭지 않았어?”라고 물어보시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유비는 살아생전 제갈량에게 마속[馬謖]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오.”라고 충고했지만, 제갈량은 그럴 리가 없어.’라고 판단하고 유비가 죽은 뒤 마속에게 북벌[위나라 공격]군을 맡겨 위나라를 치게 했다.

 

마속은 병법의 이론만 앞세우고 무리하게 작전을 밀고 나가다가 실패하고 돌아왔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사형에 처한 뒤 사람들에게 선제[先帝. 선황제先皇帝를 줄인 말.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바로 전에 나라를 다스린 황제를 일컫는 말이다. []먼저/앞서라는 뜻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선제라고 부르고 있다]께서 마속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고 마속을 썼다가 이렇게 되었소.”라고 말했다.

 

유비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이것을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현실을 직접 겪은 사람한 군데에 틀어박혀서 책과 글만 읽고, 이론을 앞세우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부터 - 아니 그 뒤에도 -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칼을 들고 직접 전쟁터에서 싸웠고, 이론으로 무언가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가이자 군인으로서 현실을 맛보았던 사람이었다. 또한 돌아다니는 곳이 많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났고, 제갈량보다 나이도 많아 겪은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보는 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제갈량은 암자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론을 익힌 사람이었다. 유비보다 젊었기 때문에 겪은 일이 적었고, 사람을 자주 만나거나 현실을 맛본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론에는 통달했지만 현실을 이해하거나 곤란한 일에 부딪쳤을 때 임기응변을 써서 문제를 푸는 일에는 서툴렀다.

 

이 때문에 유비는 마속의 결점을 꿰뚫어보았지만, 제갈량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론을 잘 다루고 말을 잘 하는 마속을 친근하게 여겨 그의 결점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마속에게 임무를 맡겼다가 작전이 실패하고 촉의 군사들과 전진기지를 잃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인용자)

 

게다가 제갈량도 절대 남의 비위나 맞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선의 지혜가 뛰어나다고 말했으니, 이는 자신을 기만하고 남을 속이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실이 그러했다. 유선은 223년에 등극해 263년에 위나라에 투항할 때까지 41년간 제위에 있었다. 재위 기간만 따지면 삼국시대 군왕(群王. 여러 임금 - 인용자)들 가운데 가장 길었다. 불안 요소가 가득했던 당시에 이토록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재능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혹자(或者. ‘어떤 사람’. 줄여서 이라고도 한다 - 인용자)는 그것이 제갈량의 보좌(補佐. 윗사람을 도와 일을 처리함 - 인용자)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234년에 사망했다. 유선은 그가 죽은 후에도 29년이나 황제 자리에 더 있었으므로 이를 모두 제갈량의 공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집권 기간 외에 다음의 몇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유선이 어리석은 황제가 아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위나라 대장 하후패(夏侯覇)는 조상(曹爽)이 사마의에게 죽임을 당한 후(사마씨 집안은 조비曹丕가 죽은 뒤 서서히 위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었고, 이를 막는 사람들은 조씨라도 죽이거나 내쫓았다. 결국 위나라는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에게 넘어가고, 사마염이 서진을 세움으로써 위나라는 멸망한다 - 인용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촉나라로 도망쳤다. 그의 아버지 하후연(夏侯淵)은 바로 촉나라 장수 황충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촉나라로 도망친 것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음을 의미했다. 이때 유선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장군의 부친은 반간계(反間計. 이간책)에 의해 살해된 것이지, 절대 선주(유비 - 인용자)께서 직접 모해(謀害. 모략을 써서 남을 해침 - 인용자)한 것이 아니요.”

 

난처한 문제를 슬그머니 넘기는 이 몇 마디 말에 하후패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제갈량이 죽자, 안한장군(安漢將軍. ‘[]나라를 안정시키는[] 장군이라는 뜻을 지닌 벼슬로 보인다 - 인용자) 이막(李邈)이 상소를 올려 제갈량이 암암리에 반역을 꾀할 마음을 품었다.’고 헐뜯었다. 그는 이렇게 하면 권세 있는 신하를 꺼리는 임금의 마음에 영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선은 발끈하여 이막을 사형에 처했다.

 

또 유선은 제갈량이 죽자, 바로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장완(蔣琬)을 대사마에 임명해서 행정 업무를 주관하고 군사 업무를 겸하게 하는 한편, 비위(費褘)를 대장군에 임명해 군사 업무를 주관하고 행정 업무를 감독하게 했다. 이는 바로 제갈량에게 집중되었던 직무와 권력을 둘로 나누어 상호 견제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지금은 알 길이 전혀 없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은 유선에게 있었으니, 유선의 조치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정치적 균형을 고려할 줄 아는 사람이 설마 어리석은 군주였겠는가?

 

(이하 생략)

- 허무펑,황제의 유언, 105 ~ 108

 

* 출처 :황제의 유언(허무펑 지음, 류방승 옮김, 비아북 펴냄, 서기 2010)

 

* 허무펑 : “주목받는 차세대 중국 역사학자(책에 실린 소개문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