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편지

개마두리 2015. 9. 27. 21:15


* 옮긴이의 글 :


이 글은『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이 서기전 93년 그의 벗 임안에게 보낸 편지다.


원 제목은「보임안서(報任安書)」이며 사마천이 사형 판결을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에게 자신의 뼈아픈 심정을 전하고, 자신이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사기』(원 제목은『태사공서太史公書』다. ‘태사공이 쓴 책’이라는 뜻이다. 사마천이 ‘태사공’으로 불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를 썼는지를 털어놓는 내용이다.


나는 이 글에 ‘치욕과 유혹을 이기고 살아남은 인간의 굳은 뜻’이 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 글이 조금 김에도 불구하고 - 이 글을 거의 그대로 실었다.


(인용 시작)


▶ 세상사처럼 뜻대로 안되는 것이 없다


일개 사관(史官)일 뿐인 이 사마천이 편지를 올립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글에 담긴, ‘진심으로 남과 사귀고 슬기로운 인재를 뽑으라’는 구절을 깊이 명심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비록 제가 보잘것없는 ‘것’이긴 합니다만 군자(君子)들의 가르침만은 귀에 거듭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얘기할 상대도 없고 늘 혼자서 우울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입니다.


… (중략) … 부끄럽게도 ‘반쪽’이 되고 만 저 같은 자가 설령 드높은 재주를 지니고 허유(許由 : 천하를 넘겨주겠다는 ‘요’ 임금의 제안을 뿌리치고 산에 들어가 숨은 선비 - 옮긴이)나 백이(고죽국孤竹國 군君의 아들. 아버지가 군 자리를 자신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막내가 가장 똑똑하고 자격 있다.’고 말하며 아우인 ‘숙제’와 함께 달아난 사람이다. 각지를 떠돌다가 주족周族의 문왕文王[이름은 희창]에게로 가던 중, 그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름은 희발]이 상[商 : 은나라]을 치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무왕의 말 고삐를 붙들고 상 공격을 하지 말라고 했다가 죽을 뻔했으나, 태공망이 ‘이들은 의로운 분들이다’고 하며 병사를 제지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상나라가 망하고 서주西周가 들어서자 절망하여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먹다가 죽었다 - 옮긴이)와 같은 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영예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웃음거리만 될 뿐인 것입니다.

 

제가 회답을 곧 드려야 했으나 동방순행(東方巡行 : ‘순행巡行’은 황제의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에 따라가랴(한 무제 유철이 한나라의 동쪽 땅을 몸소 돌아보았는데, 그 때 따라가서 모셔야 했다는 말 - 옮긴이), 보잘것없는 제 일도 돌보랴 찾아뵐 겨를도 없이 바쁘게 쫓겨 살다가 이렇게 늦어진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운을 만난 지 몇 달이 흘러 이제 12월도 눈앞에 다가왔습니다(전한시대에는 겨울철에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에 이제 임안이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 옮긴이).

 

그러니 언제 당신께 예기치 못할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금, 저의 울적한 생각을 말씀드리지도 못한다면 커다란 한이 될 것입니다.

 

(제)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했던 일을 사과드리며 저의 어리석은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지혜란 수양의 깊이를 통해 알 수 있고 어짊은 동정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올바름은 주고받음의 정당성에 의해 나타납니다. 또한 용기란 염치를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으며 행하는 일이란 이름을 어떻게 떨치느냐에 의해 평가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덕을 갖춰야만 군자로 처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비가 가장 불행한 경우는 이익을 얻을 욕심에 사로잡히는 일이며, 보다 큰 괴로움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추한 짓거리는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며 치욕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궁형(宮刑 : 남성의 성기인 고환을 자르는 형벌. 이렇게 하면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으며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목소리도 바뀐다. 또한 몸이 서서히 쪼그라들며 일찍 늙는다 - 옮긴이)을 받는 일입니다.

 

궁형을 받은 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관습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왔습니다.

공자는 위(魏)나라(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 - 옮긴이)의 영공이 환관 ‘옹거’를 자기 수레에 태웠기 때문에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조량(趙良)은 ‘상앙(중국의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위魏나라 사람. 진秦나라로 건너가 재상이 되었고, 법가法家의 방법을 적용하여 진을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 옮긴이)’이 환관인 ‘경감’의 손을 빌어 일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장래를 한심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원앙은 환관 ‘조동’이 문제(文帝 : 한나라의 문제文帝 - 옮긴이)의 수레에 함께 탔기 때문에 크게 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환관과 관계되는 일이 생기면 평민조차도 얼굴을 찌푸리는데,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고 해도 저 같은 자가 어찌 천하의 인재를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저도 하대부(下大夫 : 정 3품品인 당하관堂下官. 주로 국정國政의 실무를 맡았다 - 옮긴이)의 일원으로 어전 회의에 배석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사물을 바르게 볼 줄 몰랐었습니다.

 

지금 ‘사람도 아닌 놈’으로 굴러 떨어진 제가 우스꽝스럽게도 휘젓고 다니면서 시비를 가리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한) 조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며 유능한 선비들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 저 같은 자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세상일처럼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 사람들의 찬사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아버지 덕분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궁중(宮中. 궁궐 안)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머리에 얹으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예상할 수 없는 잘못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릉(李陵)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저와 이릉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동료였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이나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술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나눌 만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신념을 지닌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 (중략) … 그런데 이제 그가 했던 일 중의 하나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자 자신의 몸을 사리고 처자식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던 신하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그의 잘못을 비방했고 조작했기 때문에 저는 참으로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릉은 한漢나라의 장군이다. 그는 서기전 98년 흉노와 싸우다가 졌고 부하들의 목숨을 염려해 일부러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는 한 무제 유철의 분노를 샀고 한나라의 대신들은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하여 이릉을 비난하기에 바빴다 - 옮긴이)


실로 이릉 장군은 비록 끝내 지기는 했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고 할 만합니다.

 

그는 자기 휘하에 있던 5 천명도 안 되는 병사를 이끌고 흉노의 본거지 깊숙이 쳐들어가 목숨을 걸고 적군 수만 명과 대결하면서 열흘 동안 위대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자 흉노는 죽거나 다친 이를 처리할 여유도 없이 총동원령을 내려 포위공격을 했습니다. 이릉의 군대는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 천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마침내 화살이 끊겼으며, 구원군은 오지 않은 채 죽거나 다친 이는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릉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모두 용감히 일어서서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키며 맨주먹을 휘두르면서 칼날에 맞서 싸워 죽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릉이 아직 패배하지 않았을 때 전령이 그가 분투한다는 것을 (조정에 - 옮긴이) 알리자,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축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패전 소식이 들어오매 폐하(유철 - 옮긴이)는 입맛을 잃어 음식을 끊고 정사(政事 : 행정 업무 - 옮긴이)도 돌보지 않게 되자 대신들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저는 폐하의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고 천한 제 지위도 잊은 채 폐하를 위로해 드리려고 “이릉은 늘 부하들과 고락을 같이 누렸고 그리하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신뢰를 맺었습니다. 옛 명장이라도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가 (흉노의 - 옮긴이) 포로가 된 까닭은 나중에 한나라에 다시 봉사하겠다는 충정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흉노의 대군을 격파한 공적은 천하에 알려 표창할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이러한 저의 충정은 납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이릉장군을 두둔하여 총사령관이었던 이광리 장군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오해해 저를 감옥에 가두셨던 것입니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형벌을 면제받는 대신 내는 벌금도 구할 수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한마디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릉은 목숨을 건져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가문을 더럽혔고, 저는 잠실(蠶室 : 궁형에 처한 사람을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가둬두었던 밀실)에 내던져진 채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정말 서럽고 서러운 일입니다. 어찌 필설(筆舌 : 붓과 혀. 여기서는 ‘글과 말’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로 (설명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 치욕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유

 

저는 봉후(封侯 : 제후로 봉해지는 일 - 옮긴이)되는 영예나 특별한 포상을 받은 일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사(太史: 사관史官 - 옮긴이)라는 직업은 무당이나 점쟁이에 가깝고 이른바 폐하의 우롱을 받는 악공(樂工 : 음악가 - 옮긴이)이나 배우 따위와 같은 부류에 속할 뿐이며 모든 세상 사람들이 깔보는 대상입니다.

 

이러한 제가 법에 따라 사형당해도 그것은 한낱 소 아홉 마리 가운데 터럭 하나(구우일모九牛一毛)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충성을 바치고 뛰어난 계책을 바쳐 나라에 보탬이 된 적이 없었고 또한 어질고 현명한 선비들을 추천하거나 등용시켜보지도 못했으며 아울러 전쟁에 나가 성(城)을 뺏거나 적장의 목을 벤 공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공을 세워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푼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죽음이 태산보다 큰가, 아니면 터럭(:털 - 옮긴이)만도 못한가는 그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옛 책에 ‘형벌은 사대부에까지 이르지 않는다(사대부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뜻 - 옮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뫼(:山)에서는 모든 짐승들의 임금인 줄범(:호랑이)도 우리 속에 갇히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 협박당하고 고통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져 채찍을 맞고 감옥에 처박히면, 옥리(獄吏 : 감옥을 지키던 관리 - 옮긴이)만 보더라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에 질리는 법이죠.

 

그런 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를 세울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무릇 영웅호걸들도 사직 당국에 잡혀 감옥에 갇히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명예를 다 버린 점은 저와 다르지 않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용기 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품행일 뿐입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 사람이 품을 수 있는 마음 - 옮긴이)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어릴 적에 어버이를 잃고 형제조차 없이 외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가 새삼스럽게 부모와 처자 때문에 살고자 했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저는 목숨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일 뿐이지만 거취만은 분명히 해두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릇[: 환관. 환관은 궁형을 받은 죄수나 전쟁 포로에게 주는 자리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옮긴이]만 하고 있겠습니까?

 

천한 노비와 하녀조차도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려 했으면 언제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까닭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오랜 바람(:소망)이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후세에 문장(文章)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부귀하게 살았지만 그 이름이 흔적조차 없어진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직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탁월한 사람만이 후세에 그 명성을 드날리는 것입니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갇혔을 때『주역(周易)』을 발전시켰고 공자(이름은 ‘공구’ - 옮긴이)는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굴원(초楚나라의 시인이자 재상 - 옮긴이)은 쫓겨난 뒤에『이소(離騷. ‘시름을 만난다’는 뜻. 굴원이 지은 책의 이름이다. 역사상의 인물/신화/전설/초목/새와 짐승 등을 비유삼아 왕에게 ‘진秦나라와 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가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자신의 결백함을 노래하며, “세속은 틀리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 옮긴이)』를 지었습니다.

 

또한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의 악공 - 옮긴이)은 눈이 먼 뒤『국어(國語)』(중국 춘추시대 여덟 나라의 역사를 나라별로 적은 책 - 옮긴이)를 썼고 손빈(중국 전국시대의 병법가.『손빈병법』이라는 책을 지은 사람이다 - 옮긴이)은 다리를 잘리우고 병법을 편찬했으며(손빈은 옛 사형師兄인 방원에게 붙잡혀 다리를 잘리고 돼지우리에 던져졌으나, 일부러 미친 척 해 빠져나왔고 진晉나라로 가서 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방원과 싸울 때 일부러 화덕 수를 줄여[그러니까 자신을 따르는 군사의 수가 적은 것처럼 속여서] 방연이 마음 푹 놓게 한 뒤 그를 ‘방연, 여기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진 팻말이 있는 골짜기로 끌어들인 다음 화살로 쏘아 죽였다. 원수를 갚은 뒤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했으며 이때『손빈병법』을 지었다 - 옮긴이),

여불위는 촉(蜀 : 지금의 사천 분지)에 유폐되었을 때『여씨춘추(呂氏春秋)』(진의 승상 여불위가 학자들을 불러모아서 만든 백과사전 - 옮긴이)를 세상에 남겼고 한비자(법가사상을 만든 사람 - 옮긴이)는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세난(說難)』과『고분(孤憤)』(둘 다 법가사상을 설명한 책임 - 옮긴이)을 썼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로 미루어볼 때 - 옮긴이) 인간이란 가슴에 맺힌 한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경우에 옛날 일들을 엮고 미래에 희망을 걸려고 명저(名著)를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좌구명이나 손빈은 시력을 잃거나 다리가 잘려서 이미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붓에 모든 힘을 기울여 자신들의 맺힌 한을 문장으로 남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제 분수를 모르고 서투른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고자 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기록들을 모아 그 사실 여부를 가려내고 체계를 세워 흥하고, 망하고, 융성하고, 쇠퇴하는 이치를 정리하여 황제(黃帝. 중국의 첫 제왕으로 알려진 임금. 공손公孫족 출신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치우와 싸운 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제왕이 아닌 부족장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의 상고 시대로부터 오늘(전한 초기 - 옮긴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표(表 : 연표 - 옮긴이)」10편,「본기(本紀 : 황제의 행적을 적은 글 - 옮긴이)」12편,「서(書 :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다룬 부분 - 옮긴이)」8편, 「세가(世家 : 제후의 행적을 적은 글 - 옮긴이)」30편,「열전(列傳 : ‘(한 줄로)늘어놓은 전기傳記’라는 뜻. 신하나 백성, 이민족을 다룬 글이다 - 옮긴이)」70편, 총 1백 30편으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천도(天道)와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고 역사의 변천 과정을 통달하여 마침내 하나의 일가견(一家見)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의 재앙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형(궁형 - 옮긴이)을 받았으면서도 태연스럽게 살아남으려고 했던 까닭은 이 저술이 완성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저술이 완성되어 명산(名山)에 보관되고 각지의 선비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된다면, 저의 치욕도 충분히 씻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당신 같은 분에게는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지만, 속된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의 몸에 덧없는 세상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고 또 너무도 말이 많습니다.

 

저는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런 화를 당해 고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의 산소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는 더욱 쌓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장(腸)이 아홉 번 뒤집히며 집안에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후궁(后宮 : 황후가 사는 궁전 - 옮긴이)에서 봉사하는 환관으로 뫼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세속과 영합하면서 그날그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게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가르쳐주신 점, 진실로 고맙게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제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스스로를 꾸미고 애써본들 세상에 보탬이 될 리 없으며, 오히려 불신만 받은 채 이미 받은 치욕만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옳고 그름은 이제 후세에 맡기고자 합니다.

 

충분한 답변을 못해드린 점을 다시금 사죄합니다.

 

삼가 다시 절을 올립니다.

 

(인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