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미천왕 조
미천왕(美川王) - 또는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 의 이름은 을불(乙弗) - 혹은 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 - 이며,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처음에 봉상왕이 아우 돌고가 배반할 마음을 가진 줄로 의심하고 죽였으므로, 아들 을불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몹시 괴롭혔다.
(음모는 - 옮긴이) 그 집 곁에 있는 못에 개구리가 울면, 을불에게 밤에 기와 조각과 돌을 던져 (개구리가 - 옮긴이) 그 소리를 못 내게 했고, 낮에는 그에게 나무하기를 독촉하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을불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만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여 배를 타고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는 소금을 가지고 내려 압록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 집에서 기숙(寄宿. 남의 집에서 먹고 잚 - 옮긴이)했는데,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청하므로 그녀에게 한 말쯤 주었다. 그러자 다시 청하므로 (이번에는 - 옮긴이) 주지 않았다. 그 노파는 (을불을 - 옮긴이) 원망하고 화를 내며 몰래 제 신을 소금 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나는데, 노파가 따라와 신을 찾으며 모함하고 (을불이 자신의 - 옮긴이) 신을 훔쳤다고 하여 압록태수에게 알렸다. 태수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을 태형(笞刑.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 - 옮긴이)에 처하고는 놓아주었다. 이에 그의 얼굴은 여위고 옷은 남루하여 사람들은 그를 보아도 그가 왕손(王孫)인 줄을 알지 못했다.
이때 국상 창조리는 왕을 폐하려고 하여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어 물색하여 을불을 산야(山野. 뫼[山]와 들[野] - 옮긴이)에서 찾았다. (조불과 소우는 - 옮긴이) 비류하(沸流河)가에서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용모는 비록 초췌(憔悴. 얼굴빛이 좋지 않고 몸이 야윈 상태 - 옮긴이)하나 동작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임을 짐작하고 나아가서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께서 여러 신하들과 몰래 의논해 왕을 폐하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또한 국상께서는 - 옮긴이)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하시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을불은 (두 사람을 - 옮긴이) 의심해서 말했다.
“저는 시골 사람이지, 왕손은 아닙니다. 부디 다시 (왕손을 - 옮긴이) 찾아보십시오.”
소우 등은 말했다.
“이제 임금께서는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진실로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은 왕손을 바람이 매우 간절하오니, 제발 의심하지 마옵소서.”
드디어 그를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창조리는 기뻐하며 (을불을 - 옮긴이)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 옮긴이) 알지 못하게 했다. 가을 9월에 왕(봉상왕 - 옮긴이)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을 나가자, 국상 창조리는 왕을 따라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을 같이할 사람은 내 하는 대로 하오.”
(그는 - 옮긴이) 곧 갈대잎을 관(冠)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도 모두 따라 꽂았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음을 알고, 드디어 함께 왕을 폐하여, 그를 딴 방에 가두고 군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는 마침내 왕손 을불을 맞이하여 옥새와 인끈을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와서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리는데, 엿새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2월에 살별(‘혜성彗星’을 일컫는 순우리말. 긴 꼬리를 끌며 밤하늘을 지나가기 때문에 ‘꼬리별’이라고도 불린다 - 옮긴이)이 동쪽에 나타났다.
3년(서기 302년) : 왕은 가을 9월에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서진西晉 왕조의 - 옮긴이)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여 명을 사로잡아 이를 평양으로 옮겼다.
12년(서기 311년) : (왕은 - 옮긴이)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서기 313년) : (왕의 군사가 - 옮긴이)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왔다.
15년(서기 314년) : (왕은 - 옮긴이)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의 군사가 - 옮긴이)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했다.
16년(서기 315년) : (왕의 군사가 - 옮긴이) 봄 2월에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살별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20년(서기 319년) : 겨울 12월에 진(晉 : 서진西晉 - 옮긴이)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고구려로 - 옮긴이) 달아났다.
처음에 최비는 몰래 우리나라(고구려 - 옮긴이)와 단(段)씨/우문(宇文)씨(그 선대는 선비鮮卑족의 임금이 되었으나, 우문태[宇文泰] 때에 이르러 후위[後魏 :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위北魏]에 벼슬하여 관서대도독이 되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선비족에 속하는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다. 5호 16국 시대에 북중국으로 들어와서 나중에는 북조 왕조들과 수나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양광[수양제]의 명령을 받고 고구려를 침략한 장수인 우문술[宇文述]도 우문씨의 후손이다. 이 기록에서 ‘씨氏’는 씨족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를 달래어 같이 모용외를 치기로 했다.
세 나라 군사(단 족/서진/우문 족의 군사 - 옮긴이)가 극성(棘城)으로 쳐들어가니,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유독 술과 고기를 우문씨(군사들의 지휘관? - 옮긴이)에게만 보내어 대접했다. 나머지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와의 사이에 음모가 있는 줄로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 여기서는 벼슬 이름 - 옮긴이) 실독관(悉獨官)은 말했다.
"두 나라 군사는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마땅히 혼자 (극성을 - 옮긴이) 쳐서 빼앗아야겠다.”
모용외는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벼슬 이름. 높은 벼슬아치의 일을 돕는 벼슬이었다 - 옮긴이) 배의(裴와 위의 山 + 아래의 疑 - 옮긴이)를 시켜 매우 용맹스러운 군사를 거느려 선봉을 삼고, 자신도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뒤따르니, 실독관은 크게 패전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갔다.
최비는 이 소식을 듣고 그 형의 아들(그러니까 조카 - 옮긴이) 최도(崔燾)를 시켜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니, 모용외는 군사의 위엄으로 대하므로(최도를 만날 때, 군사들을 동원해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한 다음 겁을 주었다는 뜻인가? - 옮긴이) 최도는 두려워서 자백하고 복죄(服罪. 죄를 순순히 인정함 - 옮긴이)했다. 모용외는 최도를 돌려보내며 최비에게 일러 말했다.
“항복하는 것은 가장 좋은 계책이요, 달아나는 것은 졸렬한 계책이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가니, 최비는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므로, 그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했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인 인(仁)에게 요동을 지키게 하니, 관청과 마을들은 전과 같이 평온했다. 우리(고구려 - 옮긴이)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에 웅거하니, 모용외가 장군 장통(長統)을 보내어 습격하여 이를 사로잡고는, 그 무리 1천여 호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어 요동을 경략(經略. 침략[略]하여 손에 넣은 땅이나 나라를 다스림[經] - 옮긴이)하니,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 仁)을 보내어 우리를 치므로, 왕이 맹약(盟約. 동맹국 사이의 조약 - 옮긴이)을 청하니 한과 인은 이에 돌아갔다.
21년(서기 320년) : 왕은 겨울 12월에 군사를 보내어 요동을 노략하니,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이를 격파했다.
31년(서기 330년) : 왕은 사신을 후조(後趙) 왕(王) 석륵(石勒)에게 보내어 호시(楛矢.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 - 옮긴이)를 전했다.
32년(서기 331년) : 왕이 봄 2월에 세상을 떠나니, 미천(美川)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미천왕(美川王)’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