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침략과 착취가 부추긴 무굴 제국의 여아 살해 - 4
식민지의 인구통계학에서 더욱 상상력이 풍부한(따라서 객관적인 사실과는 동떨어진 - 인용자) 부분 중 하나는 인도에 배치된 윌리엄 엘리엇 마셜 대령이라는 관리가 제시한 의견이었다.
마셜이 닐기리 고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는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막 발표되어 인간의 기원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이 혁신적으로 바뀌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원(닐기리 고원 - 인용자)에 거주하는 유목민인 ‘토다’족을 상대로, 뼈의 크기로 성격을 판단하는 의사(疑似)과학(사이비/엉터리 과학 - 인용자)인 골상학 실험을 시작했을 때, 마셜의 마음 한구석에 이 이론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실험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셜은 토다족이 여성 100명당 남성이 133명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토다족의 구성원이 천 명이 되지 않고, 고원 너머로 나가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들어, 이 부족의 높은 성비가 아마도 자연선택설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토다족의 조상이 딸을 살해했다면, 아들을 낳은 부모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기회가 더 많아져서, 몇백 년 뒤인 19세기의 부족민들이 아들을 낳기가 쉬워졌으리라는 생각이다. 즉, 인도인들이 매우 오랫동안 딸을 살해함으로써 아들을 낳는 경향이 유전자 속에 새겨졌다는 것이다.
1870년대에 마셜 대령의 이론은『인간의 유래』를 수정하고 있던 다윈의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의 2판에는 일부 문화들이 조상의 죄 때문에 아들을 낳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지의 문제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다윈은 마셜 대령의 연구를 경이로운 눈으로 살펴보다가, 한 지점에서 마셜의 분석이 “독창적”이라고 언명했다. 하지만 결국 과학이 승리했다. 다윈은 특정한 성별의 아이를 낳는 경향이 유전 가능한 형질인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어떤 경우든 “(서기 19세기 말의 유럽 백인이 보기에 - 인용자) 야만스러운 생활과 뚜렷하게 남성이 많은 인구 구성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 관계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토다족의 성비 불균형은 나쁜 유전자가 아니라 인간 행동의 결과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부족의 성비가 편향된 것은 수백 년 전에 여아를 죽였기 때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대신 이들은 현대에, 영국의 통치(지배 - 인용자) 아래에서 여아 살해를 시작했다.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하자(이 때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 바라트에서 갈라져 나왔다. 동파키스탄은 나중에 이름을 ‘방글라데시’로 바꾸고 서파키스탄, 그러니까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독립한다 - 인용자),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꼼꼼한 기록들을 델리와 뭄바이의 기록 보관소에 버리고 영국으로 달아났다.
몇 년 뒤(서기 1950년대? - 인용자), 인도 사회학자 두 명이 그런 기록 보관소들 중 한 곳을 방문했다가 여아 살해를 상세하게 기록한 다량의 문서를 발견했다. 이들은 기록을 복사했지만, 두 학자 모두 살펴볼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결국 논문 주제를 찾던 학생인 L. S. 비슈와나트에게 그 문서를 넘겨주었다.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 비슈와나트는 인도의 여아 살해에 대한 틀에 박힌 이해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여아 살해 못지않게 놀라웠다. 조너선 덩컨이 여아 살해를 발견한 계기가 되었던 영국의 세금 징수가 실제로 범죄(무굴 제국 백성들과 인도 사람들이 여아를 죽인 일 - 인용자)가 일어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17세기에 동인도회사 상인들이 처음으로 인도(이 무렵에는 ‘무굴 제국’이라는 이름을 썼다. 무굴 제국은 오늘날의 바라트 남쪽 끝인 케랄라와 타밀나두를 뺀 나머지 지역을 점령/정복해서 다스렸다 - 인용자)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번영하고 있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제뿐 아니라 활기찬 건축 전통, 세련된 의료 체계, 1억 명을 훨씬 웃도는 인구를 자랑했다.
호황을 누리는 이 제국에서 동인도회사가 중개한 무역 규모는 처음에는 보잘것없었다. 외국 상인들은 주로 영국에서 수요가 높은 옥양목(玉洋木. 발이 고운 무명. 빛이 희고 얇다 - 인용자), 모슬린(날실과 씨실을 한 가닥씩 엇바꾸는 방법으로 짠 무명. 가볍고 열을 잘 보존하고 탄력이 있어 잘 구겨지지 않으므로 한 때 여성의 옷이나 이불감으로 많이 쓰였다 - 인용자) 같은 옷감 구입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가로 제시할 것이 별로 없었다. 열대 아대륙에서는 영국의 주요 상품 중 하나인 양모(羊毛 : 양[羊]의 털[毛] - 인용자) 제품(짐승의 털[毛]로 짠[織] 옷감[物]이라고 해서 ‘모직물[毛織物]’이라고 불렀다 - 인용자) 제품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족을 달자면, 영국 상인들은 청나라에서도 모직물을 팔려고 했으나, 무굴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사람들이 모직물을 싫어하고 ‘오랑캐들이나 입는 것’이라고 여겨 배척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 인용자).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직물에 대금(代金. 물건의 값으로 치르는 돈 - 인용자) 을 지불하기 위해 다량의 영국 금을 수출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1773년에 동인도회사가 긴급 구제를 요청하자, (영국 왕이었던 - 인용자) 조지 3세는 귀금속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데 신물을 냈고, 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주들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이들은 원주민에게 세금을 물려 세제 수익을 인도 제품의 대금을 치르는 데 이용했다. 본질적으로 인도인의 돈을 이용해(사실, ‘빼앗아’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인용자) 인도 제품을 구입한 것이다.
영국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무굴제국이 통치하던 시절의 인도에서는 토지에 대한 권리가 분산되어, (땅은 - 인용자) 농민, 정부, 그리고 ‘자민다르’라고 불린 세금 징수 관리 계층의 공동소유였다.
뛰어난 관료였던 무굴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보다 중요시되는 복잡한 행정 체계를 만들어냈다. (중앙정부인 무굴 제국 정부에 바치려고 - 인용자) 자신이 (백성들로부터 - 인용자) 거둬들인 세제 수입의 일정 몫을 받는 자민다르는 이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민다르는 세금을 징수할 뿐 아니라 경찰, 사법, 군 업무까지 수행했다.
무굴인은 자민다르들을 꼼꼼하게 감독했는데, 자민다르에게 할당된 세입 목표를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그들이 - 인용자)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운 관료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너무 많은 권력을 축적하지 못하게 막아 일반 시민들을 보호했다.
1793년에 인도 내에서 권력을 강화한 동인도회사는 좀 더 엄격하고 상세하게 설명된 재산권을 도입해 인도의 토지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 새로운 체계는 인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인 중세(중세 서유럽 - 인용자)의 봉건제도가 옮겨진 것이었다. (무굴 제국의 - 인용자) 여성은 한때 재산권을 보유했지만, 이제 (동인도회사가 점령한 곳에서는 - 인용자) 토지 소유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신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은 농민들에게도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무굴제국이 통치할 때보다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세금 징수 관리들은 그 지역 수확량의 3분의 1을 회사(동인도회사 - 인용자)에 넘겨주어야 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금 징수원은 자민다르였다. 동인도회사는 자금이 쪼들렸기 때문에, 전체 경제 체계를 뒤집어놓을 때도 낡은 관료주의는 유지했다. 동시에 영국인들은 세금을 높이고, 실적이 나쁠 경우 벌금을 올려 자민다르에게 압력을 가했다. 세금 징수원이 할당된 세입(稅入. 조세의 수입 - 인용자)을 채우지 못하면 자신의 토지를 뺏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이런 위협을 여러 번 실천에 옮겼다.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바라트 동쪽에 있는 벵골 주를 합친 지역 - 인용자)에서는 토지개혁 이후 20년간 전체 토지의 3분의 1이 매물(賣物. 팔 물건/팔 것 - 인용자)로 나왔다. 자민다르에게는 가혹한 체제였지만, 무굴제국 통치 때보다 관리 감독이 약화되어 많은 세금 징수인이 자신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전가했다. 덩컨이 감독하던 베나레스에서 일부 징수원들은 세금에 11퍼센트의 수수료를 청구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농민을 때리는 이들도 있었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