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영국의 침략과 착취가 부추긴 무굴 제국의 여아 살해 - 3

개마두리 2015. 12. 20. 16:08


하지만 종교가 이런 관행의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원인일까? 덩컨이나 케이 같은 사람이 식민주의자들이 언급한 영아 살해가 고질적인 문화적 관습인지, 혹은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최근 들어 갑자기 심해진 현상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로 어떤 조사관들은 여아 살해가 부의 분배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아를 살해한 부족들은 으레 지주 집단이었고, 그 부족 내부에서도 여아를 살해한 가족들은 대부분 더 부유한 층인 경향이 있었다. 다른 조사관들은 여아를 살해한 하급 부족들은 단지 라지푸트족을 모방한 듯 보이며, 이 특정한 집단들의 역사에는 여아 살해 관행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체계적으로 여아를 살해한 집단이 천년 동안 생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 점을 논하지 않고, 대신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일반화한 관행이던 승혼(昇婚. [신분이나 지위가]오르는[昇] 결혼[婚]. 상향혼[上向婚]과 같은 말이다 - 인용자), 즉 여성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부족의 사람과 결혼하는 풍습을 여아 살해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승혼은 딸을 좀 더 명망 있는 가문으로 시집보내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수단이므로, 하급 부족 구성원들에게는 매력적인 관습이었다. 식민주의자들이 언급한 문제는 승혼으로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높은 카스트가 없는 이 여성들은 승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카스트 규칙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같은 집단의 남성과도 결혼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류계급 부모들은 독신으로 살 딸을 기르느니 죽이는 편을 택했고, 영국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늘 그렇게 해왔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 관습은 바뀐다. (무굴제국과 제국이 무너진 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에서도 - 인용자) 신붓값과 지참금은 경제 주기에 따라 오랫동안 변동이 심했다. 하지만 식민지 조사관들은 자신들이 조사한 인도의 결혼 관습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다루었다.


이들은 결혼 관습을 이해하면 여아 살해 근절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착각 아래, 결혼 비용을 “신랑과 함께 온 사람들에 대한 식대(食代 : 음식[食]을 먹은 값으로[대가로] 치르는 돈[代] -> 밥값 - 인용자)와 동물의 먹잇값”, “사위가 처가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줄 현금” 같은 매우 구체적인 항목으로 분류한 상세한 표를 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카스트와 부족이 항상 여아를 살해했다는 생각은 학설로 ‘발전’했다. 여아 살해의 계속적인 증거를 발견한 1901년(이 때 한반도에는 대한제국이라는 왕조가 있었다 - 인용자)의 인구조사에 첨부된 보고서를 보면, 일부 카스트에 “먼 옛날”부터 여아 살해 전통이 있었다고 나온다.


1921년(대한제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망한 지 11년이 흐른 해이자, 3.1 항쟁이 일어난 지 2년이 흐른 뒤고, 3.1 항쟁의 여파로 상해上海 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2년이 흐른 뒤다 - 인용자)의 인구조사는 한발 더 나아가 인도의 카스트들을 딸을 살해한 카스트와 살해하지 않은 카스트로 분류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수백 년간 이어져온 역사를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 관찰한 일시적인 상황들로 이해하려 한 것은 다른 제국주의 세계의 동향과도 일치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신대륙(서구 백인들은 이 말을 아메리카 주에 갖다 붙이지만, 아메리카에는 콜럼버스가 오기 훨씬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 말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냥 ‘아메리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인용자)에서 서구의 관료, 철학자, 작가들이 ‘세계 남쪽의 몽매한 주민들(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나, 남아시아나,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 이들은 유럽의 “남쪽”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 인용자)’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증거’를 찾는 일에 동원되었다.


(유럽과 캐나다와 미국의 백인이 보기에 - 인용자) ‘신비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인류학과 고고학이 발전했고, 이는 도표와 현장 스케치로 가득한 상세한 민족지학으로 발달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서구와 러시아와 일본의 인류학은 결코 순수한 동기로 발전한 학문이 아니다.


원래 인류학은 ‘미개한 사회’나 ‘야만적인 사회’를 연구함으로써 힘센 나라들이 보기에 ‘미개인’이나 ‘야만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못 났는지’를 ‘입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른바 ‘문명인’들이 ‘얼마나 잘 났는지’ - 그리고 ‘미개인’과 ‘야만인’들이 ‘문명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 를 ‘입증’하며, 나아가 인간사회에 ‘서열’을 만들어 인간의 ‘등급’을 매기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오늘날의 인류학계는 이런 태도를 버리고 적어도 겉으로는 정치적인 올바름과 문화적 상대주의, 인간 평등이라는 관념을 따르려고 애쓰지만, 잘못된 과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서구나 러시아의 백인 인류학자들, 그리고 일본의 인류학자들이 쓴 글은 그 의도를 의심하고, 비판하고, 꼼꼼히 따지면서 읽어야 한다. - 인용자)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 인용자)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관습도 없었고, 경악할 만한 원주민 범죄도 없었다. 인구조사는 또한 자기 충족적 예언(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버리면, 결국 그 결과에 있어서 그 상황이 실제가 되는 현상. 사람은 객관적인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풀이한 상황에 반응하기 마련이며, 그러한 반응들이 모이면 풀이한 그대로 상황이 전개된다는 이야기다. 한 예로 불면증 환자는 ‘오늘 밤에 또 못 자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는데, 정말로 밤이 다가오면 그는 잠을 못 자게 될까 봐 걱정하고, 걱정을 하면 자율신경계가 자극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잠이 안 온다. 잠을 못 잔 채 밤이 깊어 새벽이 되면, 그가 겪는 괴로움과 불안은 더 심해져서 뜬눈으로 밤을 새게 된다. - 인용자) 역할을 하는 흔한 분류 도구였다.


부정확하고 잘못된 범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해졌고, 예측력이 생겼다. 그리하여 한때 민족과 부족이 유동적이던 지역에서 (서구 학자들에 의해 - 인용자) 새로이 분류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 인용자) 르완다(중부 아프리카에 있는 내륙국가이자 공화국 - 인용자)는 (서기 1895년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는 - 인용자) 수백 년 동안 하나의 응집력 있는 나라로 존재했지만(서기 1300년 경 르완다 북쪽에서 르완다로 내려온 ‘투치’족이 선주민인 ‘후투’족과 함께 왕국을 세웠고, 서기 16세기부터는 투치족이 지배층인 체제가 굳어졌다. 그러니까 두 민족은 무려 595년 동안[보수적으로 따져도 390년 이상] 한 나라 안에서 살았던 셈이다. 덧붙이자면 투치족은 서기 1894년에야 유럽에 알려졌으니, 그들은 유럽인과 접촉하기 594년 전에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 인용자),


벨기에의 통치자(식민지배자 - 인용자)들이 (르완다의 - 인용자) 인구를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분류하면서(원래 르완다는 독일의 식민지였으나, 서기 1916년 오늘날의 콩고를 점령하고 있던 벨기에 군대가 르완다를 점령했고, 서기 1919년부터는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이 되어 벨기에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르완다는 서기 1962년에 벨기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 인용자)이후의 국가 내 갈등이 야기되었다(그 갈등이 극단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 서기 1990년에 일어난 르완다 내전과, 4년 뒤인 서기 1994년에 일어난 후투족의 투치족 대학살이다 - 인용자).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나라’라는 말을 써야 한다. 비슨달 기자의 분석과 비판에 경의를 표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비슨달 기자가 ‘아프리카에 세워진 나라들은 “나라”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라는 편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 인용자)들인 카메룬, 나이지리아, 콩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정식 국호 ‘미스르’ - 인용자) 같은 다양한 나라의 인구조사에서는 여성 쪽으로 기운 성비가 기록되었고, 여성의 수가 더 많은 것은 ‘야만성의 표시’로 여겨졌다. 식민지 과학자들은 유럽보다 여성의 비율이 아주 약간 더 높은 아프리카의 성비의 원인을 종족들이 과도하게 섞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에 대한 처방은 어김없는 개입이었다. 동인도회사의 사학자 케이는 정치적 격변과 다름없는 상황, 분명 식민주의와 비슷해 보이는 격변이 인도의 여아 살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아 살해는 남성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감정으로 지탱되고 유지되는 혐오스러운 현상으로, (인도의 - 인용자) 사회와 가정의 전체 체계가 분열되고 격변하지 않으면 근절될 수 없다.”


19세기 말(이 때는 서양과 러시아의 제국주의가 전성기를 맞았을 때고, 일본이 제국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 인용자)에 백인들은 미개발국을 개도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아대륙[亞大陸. 원래는 아류[亞流]인 대륙[大陸]. 그러니까 “대륙보다는 작지만, 섬보다는 큰 땅덩이”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바라트를 포함한 남아시아를 일컫는 말로도 쓴다 - 인용자]의 역사에 대한 안일한 분석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사학자 바버라 메트캐프와 토머스 메트캐프에 따르면 “인도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의 인도 혹은 심지어 오늘날의 인도의 마을과 카스트 조직이 과거에 대한 지침이 된다.”라는 생각이 인도 역사에 대한 중요한 오해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