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와 상소를 올려 말하는 자를 함부로 죽이지 마라”
* 인용자(잉걸)의 말 :
나는 오늘날의 한국 시민들에게 ‘나라를 좀먹고 약하게 만드는 잘못된 이념’이라는 평가를 받는 문치주의가 좋은 영향도 미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이 글을 인용한다. 북송과 남송의 문치주의를 살피는 것은 그 두 왕조와 마찬가지로 주자학과 문치주의를 받아들인 조선왕조의 역사를 살필 때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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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북송 - 인용자 잉걸. 아래 ‘인용자’)의 운명은 완전히 조광윤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조광윤은 본래 후주의 장군이었는데, 그가 등극하기 전에 얻었던 경험들이 훗날 송나라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건국 초기에 그는 5대(‘오대십국 시대’를 줄인 말 - 인용자)라는 난세의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천하가 어지러워진 이유가 군인이 황제를 협박하여 군대를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그는 술자리에서 금군(禁軍.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지키던 군대 - 인용자)과 번진(藩鎭. 나라의 가장자리 지역에 두어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 인용자)의 장수들이 가진 병권을 모두 내놓게 했다. 그는 지난 역사를 거울삼고 현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이제 막 창건한 송나라의 정치 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새로 가법을 세워 후계자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송나라를 공고히 하는지 감시했다. 그가 남긴 모든 것이 송나라의 가법이 되었다.
조광윤은 황제게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서기 963년 - 인용자)에 비밀리에 내려오는 ‘서비誓碑(맹세하고 훈계하는[誓] 비석[碑]. - 인용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사대부와 상소를 올려 말하는 자를 함부로 죽이지 마라. 자손 가운데 이 맹세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하늘이 벌할 것이다.”라는 경구(警句. 놀라게 하는[겁을 주는] 글귀 - 인용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새로 황제에 오르면 태묘(太廟. 종묘宗廟와 같은 말. 역대 임금과 그 배우자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황실의 사당 - 인용자)를 참배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이 비문을 읽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조씨 황족의 가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이후의 모든 황제들은 이 가훈을 엄격히 준수했다.
한편 “사대부와 상소를 올려 말하는 자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경구는 조광윤이 역사를 통해 결론 내린 교훈을 적은 글이다. 봉건시대에 황제 앞에서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역린(逆鱗. 미르의 턱 밑에 난 비늘.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미르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믿었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말은 - 임금이 미르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으므로 -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려서] 임금의 분노를 산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 인용자)과 같아서,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기 몸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황제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하는 충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조광윤은 대신들에게 직언(直言. 순우리말로는 ‘바른 말’. 자기가 믿는 바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일 - 인용자)을 해도 목이 달아날 걱정을 없게 함으로써 언론에 대한 속박을 없애주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환경은 백관의 우두머리인 재상(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황제를 모시는 벼슬이 ‘승상’이고 왕을 모시는 벼슬은 ‘재상’이다.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잘못된 말을 쓴 것인지, 아니면 글쓴이가 잘못된 말을 쓴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 인용자)과 황제 사이에 직접적인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철종(哲宗)때 수렴청정을 하던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직간을 한 가역(賈易)의 책임을 추궁하자 재상인 여공저(呂公著)가 이에 맞섰다. 태후의 태도가 완강했으나, 여공저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이렇게 호소했다.
“먼저 저를 쫓아내지 않는다면 절대 가역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수 없습니다.”
결국 태후는 마지못해 가역에 대한 처벌을 거두어들였다.
또 남송(南宋) 때 광종(光宗)이 어떤 이를 중용하려고 했는데, 재상인 유정(留正)이 반대하고 나섰다. 광종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관철시키려고 하자, 유정은 뜻밖에도 5개월 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고 파업을 벌였다. 이에 광종은 하는 수 없이 이를 철회했다.
송나라에서는 재상이 황제에게 감히 맞서는 것은 물론, 간언(諫言. 아랫사람이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하는 충고 - 인용자) 열풍이 뜨겁게 불어 점점 감찰과 간의(諫議. [임금에게]간언하여 [정치를] 의논하는 일 - 인용자) 제도가 완비되어갔다.
(중국인에게 간언이나 간의와 관련해서 - 인용자)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인종(仁宗)이 황후의 삼촌인 장요좌(張堯佐)에게 벼슬을 내리려던 것을 포증(包拯. ‘포청천[包靑天]’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북송의 벼슬아치. ‘포’가 성이고 ‘청천’은 중국에서 ‘[푸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고, 올바르며, 백성을 사랑하는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이 막은 일이다.
당시 인종이 장요좌를 선휘사(宣徽使)에 임명하려고 하자,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어 잠시 이를 보류했다. 그런데 황후가 자꾸 졸라대는 바람에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이를 공표(公表. 세상에 널리 알림 - 인용자)하기로 했다. 그날 인종이 조정에 나가려는데, 황후가 문 앞까지 배웅하며 그의 등을 어루만지더니, 선휘사 일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인종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종은 조정에서 재차 장요좌를 선휘사에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감정이 격앙(激昻. [감정이나 기운이] 격렬히[激]일어나 높아지는[昻] 것 - 인용자)된 포증이 인종과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더니, 침까지 튀겨가며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인종은 하는 수 없이 발표를 취소했다. 황후에게 돌아온 인종은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포증이 내 앞에서 말하는데, 침이 얼굴로 막 튀었소. 당신이 계속 선휘사, 선휘사 하는데, 설마 포증이 어사(御史 - 중국의 벼슬 이름. 탄핵을 맡았다 : 인용자)란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지요?”
신하들이 (전근대사회의 윤리에 비추어 볼 때 - 인용자) 감히 대역부도(大逆不道. 도리에 크게 어긋나고 정도와 맞지 않다. 또는 ‘대역무도[임금이나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에 크게 어긋나다]’와 같은 말 - 인용자)한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광윤의 기법 때문이었다.
사대부에 대한 조씨 왕조의 인내는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태종 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 노다손(盧多遜)이 모반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고도 애주(崖州)로 유배되는 형벌밖에 받지 않았다. 인종 때는 사도(벼슬 이름 - 인용자) 정위(丁謂)가 황제의 능묘에 손을 대는 대죄(大罪. 크나큰[大] 죄[罪] - 인용자)를 범했지만, 애주의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을 뿐이다.
조광윤이 세운 가법은 지식인들에게 마치 부적과도 같았다. 지식인들이 쾌재를 불렀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군대를 포함한 송나라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장을 의심하고 경시했던 조광윤은 결국 허약하고 무기력한 송나라를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경시한’ 정책으로 송나라가 320년 동안 지속되는 아이러니(Irony. 역설[逆說] - 인용자)도 발생했다.
송나라는 황제들의 자질도 평범한데다, 안팎으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안으로는 농민들이 끊임없이 반란(봉기 - 인용자)을 일으켜 그 횟수만도 400차례가 넘었다. 이는 시종 송나라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밖으로는 서하(西夏. 정식 국호 대하大夏. ‘탕구트’라고도 부른다. 타브가치족이 뵈[티베트]계통인 탕구트인의 땅에 세운 나라다 - 인용자), 요, 금 같은 유목 민족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송나라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금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남송이 건립됐지만, 위정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어 여전히 나라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금나라는 자신이 (몽골 군사에게 - 인용자) 멸망할 때까지 송나라를 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송나라는 무엇에 의지해 나라를 지탱했던 것일까?
정답은 역시 조광윤의 가법이었다.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것은 그들을 중시하라는 의미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대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일단 통치자가 그들을 중시하면 그들은 목숨을 바쳐서 일했다. 이처럼 지식인을 중시하는 것은 완벽한 문화 건설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조광윤은 5대 시기에 대해 이렇게 반성했다.
5대가 극도로 혼란에 빠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가 사상의 핵심인 충의, 절개, 윤리 정신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를 신하로 여기지 않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어수선한 국면을 수습하려면 정치적으로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하는’ 국책을 세우는 것 외에, 사상 측면에서 다시 유가 사상의 지위를 확립하고 유가가 표방하는 충의, 절개, 효도, 인륜 같은 덕목을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만 했다. 조광윤은 이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각지에 서원을 세우게 했다.
이런 모든 문화 건설 사업은 송나라의 문신이나 무장은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충군애국 사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가를 위해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다. 서하, 요, 금 등이 쳐들어올 때마다 송나라 전체가 충군애국 사상으로 무장하고 그들을 밖으로 몰아냈다(독자 여러분은 이 대목을 읽고 “하지만 남송 군대는 몽골군의 남송 점령을 막지 못했잖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몽골군에게 당한 군대가 한 둘이 아니고, 중세의 몽골군은 세계 최강의 육군이었으며, 당시 몽골군을 이긴 군대보다 몽골군에게 진 군대가 더 많았으니, 그것이 남송의 잘못은 아니며 남송이 비웃음을 살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 인용자).
물론 이 모든 것은 조광윤과 그의 계승자들이 노력해서 일군 것이다. 송나라 황제들은 누구랄 것 없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유가 사상을 치국(治國. 나라[國]를 다스림[治] - 인용자)의 도(道. 여기서는 ‘근원’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인용자)로 여겼다. 자신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를 가법으로 계승하고, 천하의 백성들이 충군애국 사상을 따르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한 것이다.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어떤 황제도 이 가법을 어기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문인이었고, 그들을 둘러싼 이들 역시 모두 문인이었다. 송나라의 국운은 바로 이런 문인들과 그들이 굳게 지킨 애국 사상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조광윤은 자신의 그림자를 송나라 역사에 영원히 남긴 위대한 황제였다. 그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왕조를 건설했고, 지식인들에게 천국과 같은 세상을 열어주었으며, 문화 건설 사업을 통해 중국 역사상 애국자가 가장 많은 왕조를 만들어냈다. 바로 이런 무형의 철옹성이 송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세력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조광윤이 남긴 후계자에 대한 유언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씨 왕조의 가법이다. 그것이 비록 송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송나라 왕조와 왕조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 허무펑,『황제의 유언』, 223 ~ 227쪽
* 출처 :『황제의 유언』(허무펑 지음, 류방승 옮김, 비아북 펴냄, 서기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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