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항(土炕) -『 일지록(日知錄) 』
북방 사람들은 흙으로 침상을 만들고, 그 밑을 비워 불을 지피는데, (이것을 ‘한족[漢族]’들은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항(炕. “구들/온돌”이라는 뜻이 있다 – 옮긴이)’으로 부른다. (‘한족’들의 – 옮긴이) 옛 책에는 (이 낱말이 – 옮긴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 좌전(춘추좌씨전을 줄인 말 – 옮긴이) 』에 “송나라의 환관 ‘유’는 (원공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숯불을 지피고, 나가 버리면 숯불을 치웠다.”고 했고, 『 신서 』 에는 ‘완춘’이 위 영공에게 “임금은 여우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곰 가죽으로 만든 자리에 앉으며, 방 서남쪽 구석에 조왕신(조왕[竈王]. 부엌[竈]을 맡은 신이다. 민간신앙에 따르면, 늘 부엌에 있으면서 모든 길흉을 판단한다고 한다 – 옮긴이)을 모신다.”라고 했으며, 『 한서(漢書) 』 「 소무전 」 에는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 옮긴이) 숯불을 놓아둔다.”라고 했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그 기능이 항과 – 옮긴이) 비슷하긴 해도 항은 아니다.
『 구당서 』 「 동이 」 < 고려전 >( 『 구당서 』 < 고려전 > 의 ‘고려’는 장수왕의 나라인 전기 고리[ 高麗 ]지, 걸걸중상[ ‘대중상’ ]이 세운 중기 고리[ 高麗 ] - 흔히 ‘발해’로 불리나, 올바른 이름은 ‘중기 고리’다 – 나, 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 高麗 ]가 아니다. 금석문과 역사책에 따르면, 고구리[ 高句麗 ]는 장수왕 대부터 나라 이름을 ‘고리[ 高麗 ]’로 줄여서 불렀다 : 옮긴이)에는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들을 만들고 아래에 숯불을 지펴 난방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청나라 초기인 서기 1670년 – 옮긴이)의 토항인데 (보통은 – 옮긴이) ‘갱’자로만 쓴다.(그러니까, 고[顧] 선생의 설명대로라면, 북중국의 ‘한족’들이 쓰는 난방 시설인 토항/갱은 원래 고구리/전기 고리 사람들이 만들어서 쓰던 난방 시설인 쪽구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배달민족의 문화가 ‘한족’의 그것에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옮긴이)
『 수경주 』 에는 “토은현에 관계사가 있는데, 절 안에 있는 큰 법당은 아주 높고 넓어서 1000명의 승려들을 수용할 수 있다. 아래는 전부 돌로 연결해 놓고(이어 놓고 – 옮긴이), 위에는 흙을 덧칠해 놓아 바닥으로 온기가 소통할 수 있다. 그 뻗어 나간 통로가 골고루 퍼져 있고, 법당 밖부터 시작해서 사방으로 불길이 나오고 불꽃의 기세가 안으로 흘러들어 법당 전체가 전부 따뜻해진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난방하는 방식이니, 형식과 모양은 이미 ( 『 수경주 』 가 쓰인 때인 북위[ 北魏 ]시대, 그러니까 서기 5세기에 – 옮긴이 ) 완성되었던 것이다.
- 『 일지록( 日知錄 ) 』 에서
▶ 『 일지록 』 : 고염무( 顧炎武 ) 선생이 청나라 초기인 서기 1670년에 펴낸 책. 경전을 새롭게 풀이하고 사회/경제를 파헤치며 옛 갈마( ‘역사’ )와 천문/지리까지 다룬 책이다.
▶ 고염무(顧炎武) : 명나라의 유신이자 ‘한족’ 지식인이고 고증학자. 서기 1613년에 태어나 서기 1682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가 망했을 때는 열두 해 동안 무장투쟁과 비밀결사 활동으로 만주족에게 맞서 싸웠고,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청 왕조에 출사(出仕. 벼슬하러[仕] 나감[出])를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갈마와 경학의 고증과 음운 연구 및 책 쓰기에 주력했다.
- 단기 4357년 음력 2월 9일에, ‘이른바 “한족(漢族)”이 다른 나라나 겨레들에게 끼친 영향만 강조하는 기존의 갈마 교육은 잘못되었으며, 이제는 다른 나라나 겨레들이 “한족”에게 끼친 영향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