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굴 제국 : 서기 16세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내려온 튀르크계 민족이 바라트 땅에 세운 왕조. 바라트 최후의 군주제 국가다. 이 나라가 무너진 뒤 바라트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무굴’은 ‘몽골’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1789년(이 해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정식 국호 ‘바라트’ - 인용자)의 조세 징수 현황을 살피기 위해 조너선 덩컨을 파견했을 때, 그는 새로운 유형의 식민지 관료의 표본이었다.
이 합자회사는 영국 정부로부터 아시아에 대한 무역 독점권을 얻은 1600년부터 인도에서 자원을 빼돌려왔다.
하지만 초기에 동인도회사는 직원들에게 거의 봉급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직원 중에는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뇌물로 주머니를 채우는 데 골몰하는 부당 이득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관리가 부실하다는 소식이 고국(영국 - 인용자)의 주주들 귀에 들어갔고, 회사의 이익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자, 주주들은 좀 더 좋은 자질을 갖춘 직원들을 요구했다.
경영진은 부패한 관리인들을 해고하고 인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춘 입사 지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봉급과 수당을 인상했다.
이와 동시에 경영진은 기업의 이미지를 바꿀 기회를 잡았다. 원주민(바라트 사람들 - 인용자)들에게 ‘(영국식 - 인용자) 교육’과 ‘서구의 품위’를 전하는 것이 동인도회사의 하나의 정체성이며, 새 직원들은 이 정체성의 일부라고 선언한 것이다.
교육은 인도에서 동인도회사의 안정된 권력을 보장해주므로, 그 자체로 훌륭한 투자였다. 1784년 동인도회사의 총독은 투자자들에게 “지식이 축적될 때마다 원주민들을 지배하던 족쇄의 무게가 줄어듭니다.”라고 설명했다.
신입 사원들은 ‘오리엔탈리스트’(한자말로 옮기자면 ‘동양東洋주의자’ - 인용자)라고 불렸는데(2세기 뒤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용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페르시아어(‘파르시Farsi'라고도 한다. 무굴 제국을 세운 사람들이 공용어로 썼고, 오늘날에는 이란의 표준어다 - 인용자)와 벵골어(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바라트 동부에 있는 ’벵골‘ 주州에서 쓰는 말.『기탄잘리』를 쓴 시인 타고르가 쓰던 말이기도 하다 - 인용자)를 할 줄 알았던 덩컨은 그중에서도 매우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꼼꼼한 성격의 덩컨은 흰색 실크(비단 - 인용자) 스타킹과 무릎 아래에서 묶는 빳빳한 반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밝은 흰색 파우더를 발랐다. 그리고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덩컨은 오늘날 ‘바라나시’라고 불리는 신성한 도시 베나레스(바라트 내륙 동북부에 있는 도시 - 인용자)에 배치되었다. 19세기의 한 역사학자는 이 유명한 도시에 도착한 덩컨이 “계급이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주위 사람들을 아버지 같은 깊은 관심을 갖고 대했다.”라고 썼다. 이 또한 새로운 관리들에게 매우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인용했고, 현지의 관습을 완벽하게 알고 싶어 하는 동시에, 다루기 힘든 아이의 단점을 찾으려는 압제적인 아버지처럼 가부장적으로 행동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도착은 인도에서 동인도회사가 식민주의 논리로, 즉 불공정한 경제적 지배를 윤리적/종교적 논리로 은폐하는 쪽으로 전환했음을 뜻했다. 1789년에 덩컨은 세금 징수를 위해 ‘라즈쿠마르’ 족을 방문한 뒤, 이 부족(‘민족’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인용자)이 여아들을 살해했노라고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보고를 했다.
자기 지역에서 지배적인 집단인 라즈쿠마르 족은 43개 마을을 통치했다. 이들은 더 큰 부족인 ‘라지푸트’족 내의 하위 집단이었는데, 라지푸트 족은 영국의 베나레스 통치(‘점령과 지배’라는 말을 써야 한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점령/지배를 ‘통치’라고 부르면 안 되듯이, 영국이 바라트를 ‘통치’했다는 말을 써도 안 된다. - 인용자)에 비판적이어서 늘 골칫거리인 강력한 지주 집단이었다(“늘 골칫거리인”이라는 말 앞에 “영국 정부와 군대에게는”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침략당하는 사람이 침입자나 침략자나 점령군에게 “비판적”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 인용자).
덩컨이 10월에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동인도회사의 총독 찰스 콘월리스 경에게 자신이 발견한 내용에 대해 편지를 쓴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덩컨은 조금도 과시하는 기색 없이
“저는 다음 사실을 확신하며 실제로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관례상 용납되는 일이라 해도 그러한 범죄 행위를 정부에 알리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라즈쿠마르 족 사이에서는 딸의 양육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딸을 살해하는 일이 관행처럼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고 편지에 썼다.
여아 살해 문제에 대한 덩컨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그는 몇 장에 걸쳐 영아 살해의 결과뿐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원인인 사회적 환경을 상세히 기술했다(덩컨이 나열한 결과 중 하나는 라지푸트 족의 남성이 자기 부족에서 결혼할 여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영국의 한 사학자는 나중에 여아 영아 살해 방지 활동을 덩컨의 “개인적 전쟁”이라고 칭했다.
덩컨은 콘월리스 경에게 라즈쿠마르 족이 딸을 살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조사관들이 기록한 것처럼 아마도 여자아이가 없는 마을을 우연히 발견했을 것이다.
아무튼 덩컨은 여아 살해가 라즈쿠마르 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과 관련 있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콘월리스에게 이들의 여아 살해는 “이 부족이 누려온 독립성에 대한 엄청난 열망”이 기반을 이룬다고 썼다.
덩컨이 보기에 라즈쿠마르 족은 딸을 살해하여 여성이 더 낮은 카스트(‘카스트’는 포르투갈 말로 ‘계급’이라는 뜻이고, 바라트에서는 같은 제도를 ‘빛깔’을 뜻하는 ‘바르나’와, ‘직책/신분’을 뜻하는 ‘자띠’라고 부른다 - 인용자)인 가족과 결혼하는 것을 피하고, 동인도회사의 골칫거리인 지역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콘월리스 경에게 편지를 쓴 지 두 달 뒤, 덩컨은 라즈쿠마르 족의 지도자들에게 수백 년 동안 악행(여자인 아기를 죽인 일 - 인용자)을 저질러왔음을 인정하고, ‘여아 살해를 저지른 사람을 추방하여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겠다.’고 약속하는 서약서에 억지로 서명하게 했다. 문서에는 “우리(라즈쿠마르 족 - 인용자)는 사람을 죽이려는 행위가 …… 우리 사이의 관례였음을 인정한다.”라고 적혀 있다. 만족한 덩컨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혹은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며 서명된 서약서를 콘월리스 경에게 보냈다.
그 뒤 1795년에 콘월리스 경은 덩컨을 남쪽으로 1,40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봄베이(오늘날에는 ‘뭄바이’라고 불린다 - 인용자)로 전출시키고, 그 도시의 총독으로 승진시켰다.
이제 덩컨은 인도 서부의 많은 부분이 포함된 지역(뭄바이 시는 바라트 서부에 있는 도시다 - 인용자)을 관리하게 되었고, 더 광범위하게 여행을 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여아 살해가 벌어진다는 소식이 곧 전해졌다.
지금의 구자라트(바라트 서부에 있는 주. 파키스탄 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 인용자)에 사는 한 부족은 딸이 태어나면 땅에 구덩이를 파고 우유를 채워 아기를 (구덩이 안에 - 인용자) 빠뜨린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듣고 나자, 덩컨은 부하에게 이 문제에 대해 보고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20만 명이 거주하는 한 정착지에서 매년 약 2만 명의 여아가 죽는 것으로 나타났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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