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 김종목 기자(아래 직책 생략) : 예전 <정치의 부재, 공화주의 결여>라는 제목으로 쓰신 칼럼이 떠오릅니다. 지난해 3월 퇴임한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재임 중 극히 소박하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을 했다는 구절이요.
- 김종철 선생(아래 존칭 생략) :
“흔히 무히카 대통령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언론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은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 아니라 가장 욕심 없는 대통령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가 매우 검소하게 사는 것은 개인적인 체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나는 공화주의자다. 공화주의자는 건 자기 나라의 다수 가난한 국민들의 평균적 생활수준 정도로 생활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현실의 정치가 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무히카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아내와 함께 근무 시간 외에는 교외의 작은 농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관저는 자기 가족에게는 너무 크다고, 노숙자들에게 내주고요. 봉급의 대부분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출퇴근 시에는 오래된 폭스바겐 비틀을 직접 운전했어요. 이런 모습은 ‘정치적 쇼’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실은 공화주의적 신념에 완전히 부합하는 행동이었죠.
우리는 정치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에서 살면서 늘 저차원적인 담론을 주고받으면서 살잖아요. 관념적인 얘기일지 모르지만, 한번쯤은 무히카 대통령 같은 지도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충격을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목 : 한국에선 공화주의 전통, 공화주의 정신을 찾을 수 없나요? 보통 임시정부 헌법을 떠올리곤 하는데요.
- 김종철 :
“임정 헌법 중요하죠.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요. 지금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의 소위 엘리트들의 수준이라는 것은 옛날 조선왕조(더 정확히는 대한제국 - 옮긴이)가 망할 때의 엘리트들의 수준과 다르지 않아 보여요.
120년 전에 나라를 구하려고 궐기했다가 반동적인 지배층과 외국군대에 무참하게 학살을 당했던 동학농민군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죽어가며 염원했던 ‘좋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이나 ‘동학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 옮긴이) 때, 1894년 4월 전봉준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10월 2차 봉기할 때까지 집강소를 설치해 자치를 했잖아요.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동학 지도자들이 밝힌 개혁안 12조가 있어요. 노비 문서 불태우고, 탐관오리 불태우고 등등 여러 조항이 있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자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토지문제였어요.
당시 시대 상황을 봐야 이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어요. 고종이 나중에 대한제국 만들고, 근대화한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소위 말하면 힘깨나 쓰는 관리, 벼슬아치들이 백성들하고 나눈다는 의식이 없었어요. 나라가 망했으면 망했지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전봉준 선생은 원래 유생이었지만, 서울의 엘리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죠. 당시 동아시아는 아직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중국(청나라 - 옮긴이)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꽤 활발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등 젊은 지식인들이 시도했던 무술변법(1898년) 운동은 그런 움직임을 대표하고 있었죠.
나는 전봉준 선생의 진취적인 혁명사상은 동학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그런 새로운 사상적 기류에 암암리에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봉준 장군(전봉준은 ‘녹두장군’이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 옮긴이)이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는데, 그 재판기록이 지금 ‘전봉준 공초’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문서입니다.
그때 재판에는 조선의 사법관리 외에 일본 영사도 신문관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그 일본 영사가 신문 도중에 마음속으로 전봉준 장군을 굉장히 존경하게 됩니다. 조선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있다니! 그러면서 나중에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올려 이 사람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구명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동학 잔당을 살려놓을 수는 없고, 조선 정부 측에서는 국가에 맞서서 무기를 들었던 반란군의 수괴를 살려놓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결국 처형을 당하죠.
그런데 신문관들이 전봉준 선생에게 동학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전봉준 선생의 답변은 바로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이렇게 된 건 결국 1인 통치의 결과이다, 군주제에서는 늘 영민한 군주가 나오리란 보장이 없다, 어리석은 군주가 등장하면 나라가 망해 가도 방법이 없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현명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합의제 정치다, 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니까 조선의 역사에 최초로 공화주의 사상이 천명된 거죠.
나는 전봉준 선생이 구상한 이 정치모델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봐요. 중앙의 정치는 합의제로 하고, 각 지역에서는 집강소 시스템, 즉 풀뿌리민중에 의한 자치를 한다는 구상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헌데 12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전봉준 선생의 꿈의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원통하죠. 지금은 별로 희망도 안 보이고요.”
(후략)
-『경향신문』서기 2016년 12월 12일자 기사인「[공화국을 묻다-김종철]공화국은 사유물이 아니다」에 나온 김종철 선생과 김종목 기자의 대담에서
'갈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왜군과 싸우지 말라".. 이순신이 대노한 `금토패문` 전문 첫 확인 (0) | 2016.12.28 |
---|---|
▷◁브라질 원주민재단 "아마존 원주민의 땅 침범하지 말라" (0) | 2016.12.25 |
▷◁[모닝스브스] 월 620만 원 더 받게 됐는데..연봉인상 거절한 대통령 (0) | 2016.12.24 |
▷◁1000년 전 아마존에 지식 문명 존재했다 (0) | 2016.12.18 |
▷◁아프리카TV, 성매매 이어 위안부 망언 BJ '논란' (0) | 2016.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