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대화]고대국가 건국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개마두리 2018. 2. 9. 21:43

- ○○○ 씨의 말 :


“고대 국가는 청동기 이후에 설립되어야만(세워져야만 - 옮긴이) 하고, 우리(배달민족 - 옮긴이)의 청동기는 B.C 10세기(지금으로부터 약 2900년 전 - 옮긴이) 정도이니,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B.C(서기전 - 옮긴이) 2300년(지금으로부터 4318년 전 - 옮긴이)은 불가능하다는 논조를 편다. 어느 세계에 공인된 학설 가운데 고대 국가는 반드시 청동기 이후에 나타난다고 하는지, 이쯤 되면 말문이 막힌다.”


- 김 상 님의 대답 :


신대륙(아메리카 주 - 옮긴이)의 잉카(타완틴수유 - 옮긴이)와 아즈텍 등은 비록 금속을 사용하지 못하고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모두 고대국가로 인정됩니다. 스페인(에스파냐 - 옮긴이) 정복자들이 놀랄 정도의(정도로 - 옮긴이) 잘 정비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동기를 쓰면 틀림없이 고대국가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의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석기를 써도 신대륙처럼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야는 1년(한 해 - 옮긴이)의 길이를 33초 이내의 오차로 계산하였고,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였습니다.


청동기가 나타나야만 고대국가가 성립된다는 학설은 적어도 국제적으로는(‘다른 나라들의 학계에서는’ - 옮긴이)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만일 국제 학술대회에서 어떤 사람이, ‘청동기가 나타나야 고대국가가 어쩌고’ 하는 말을 하면 중남미(라틴아메리카 - 옮긴이) 학자들부터 (들고 - 옮긴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서기 2001년? - 옮긴이) 우리의 젊은 사학자들 중에서도(가운데도 - 옮긴이) “청동기가 나타나야 ….” 하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으로 압니다.


→ 김 상,『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30쪽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김 상 편저, 도서출판 주류성 펴냄, 서기 2001년)에서


※옮긴이(잉걸)의 말 :


나는『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서기전 2333년)를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의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의심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 잘못된 연구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려고 이 글을 인용했다.


설령 요서지방에서 나오는 청동기가 서기전 2000년의 것이라는 고고학자의 연구결과가 맞더라도, 그것은 고조선이 나라를 세운 지 333년 만에 청동기를 만들어냈다는 뜻이지, 서기전 2000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나타났던 홍산 문화나, 황제(黃帝) 이전에 화북 평원에 나타난 문화는 큰 제단이나 “피라미드”처럼 생긴 무덤이나, 정교한 옥기(玉器)나 신상(神像)의 얼굴 같은 유적이나 유물을 남김으로써, 자신들이 나라나 복잡한 사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한마디로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가 되어야만 나라가 세워진다는 이론은 낡은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갈마(역사)를 돌아보아도 알 수 있다.


케메트(Kemet. '검은 땅‘이라는 뜻. 흔히 ’이집트‘로 알려진 나라의 참 이름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과 ’조선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쓰는 두 나라가 맨 처음에는 “배달”이나 “아사달[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것과 같은 이치다. ‘이집트’는 헬라스 사람들이 케메트에 붙인, ‘아이깁토스’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로마인이 이를 그대로 받아서 썼으며,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이 로마인에게서 이 이름을 물려받아 ‘아이깁토스’를 ‘이집트’로 바꾸었다. 서기 7세기에 케메트에 들어온 아랍인들은 케메트를 ‘아이깁토스’ 대신 ‘요새’를 뜻하는 ‘미스르’로 불렀으며, 오늘날 ‘이집트’에 살고 있는 무슬림은 자신들의 나라를 ‘미스르’로 부른다)의 갈마를 살펴보자.


케메트(더 정확히는 나일 강 중류와 하류)에는 서기전 3150년(또는 서기전 2686년)에 첫 통일국가가 나타났다(제 1 왕조). 기록에 따르면,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은 ‘나르메르’(또는 ‘메네스’)다. 그리고 케메트 사람들은 서기전 2000년(제 12 왕조)부터 청동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케메트의 청동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4018년 전, 그러니까 나라가 세워진 지 즈믄 온 쉰 해(1150년)가 흐르고 나서야 꽃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집트(케메트)’에 처음 세워진 나라는 제 12왕조지, - 마네토를 비롯한 옛 케메트 사람들이 남긴 역사기록에 나오는 - 나르메르(메네스)의 나라인 제 1 왕조가 아니다. 제 12 왕조 이전, 그러니까 청동기가 나타나기 전에는 ‘이집트’에 나라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제 1왕조는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유적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그 뒤를 이은 제 4왕조는 케메트에 청동기가 나타나기 613년 전에 메르(이른바 ‘피라미드’)를 남겼기 때문이다(‘기자의 대 大 피라미드’도 청동기가 나타나기 570년 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 보충설명 : 고대 케메트 사람들은 파라오의 무덤으로 쓰인 건축물을 ‘피라미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건축물을 ‘메르’로 불렀다. ‘피라미드’는 고대 헬라스 사람들이 메르를 보고 그 모양이 자기네가 늘 먹는 과자와 비슷하다고 여겨 붙인 이름이다. 과자의 이름은 ‘피라미스(Pyramis)'였으며 그 뜻은 ’세모꼴(삼각형)‘이니, 헬라스 사람들은 메르의 겉모습만 보고 무덤에 과자 이름을 갖다 붙이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그러니까 케메트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석기로 나라를 세웠고, 다스렸으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청동기와 철기를 만들어 쓴 것이다. 이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가 되어야만 나라가 세워진다.”는 학설은 정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배달민족의 상고사/고대사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함이 마땅하다.


한국 역사학계(더 정확히는 ‘강단 사학계’나 ‘식민사학자들’)는 “한국 땅 안에서 나오는 청동기가 기껏해야 서기전 1000년 ~ 서기전 1500년에 만들어진 것이니, 고조선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이나 3000년 전에야 세워졌고,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이 세워졌다는『삼국유사』의 기록은 엉터리야!”하고 주장하는데, 이는 배달민족의 역사가 한국 땅(한반도/조선반도 가운데서도 휴전선의 이남 지역)에서만 펼쳐졌다고 여기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청동기 시대 이전에는 나라도, 문명도 없었어. 청동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나라나 문명은 나타나지 않아.’하는 이론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고대/중세문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 나아가 상고/고대 케메트의 제 1왕조나 제 4 왕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 석기를 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일으킬 수 있고, 그것도 청동기를 비롯한 쇠붙이가 나타나기 훨씬 전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라와 문명을 세운 증거는 쇠붙이(예 : 청동 제기나 청동 검)가 아니라, 제단이나 성벽이나 요새나 “파라오의 무덤”이나 메르나 비문(碑文) 같은 유적이나 유물이다.  


마찬가지로『삼국유사』/『제왕운기』가 증언하는 신불(환웅천왕의 나라를 ‘신시[神市]’가 아닌 ‘신불’로 부르는 까닭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겠다)과 곰 족의 나라와 고조선(아사달)은 ‘5000년 전이나 4300년 전에 만든 청동기가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실존 여부를 따지지 말고, 지난 서른다섯 해 동안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요서(遼西)와 남(南) 몽골의 유적과 유물(곰 모양인 여신을 나타낸 신상의 일부분/정교하고 아름다운 옥기[玉器]들/돌로 쌓은 성벽/신전 유적/제단/무덤), “중국이 발굴하다 중단해 버린” "중국 북부“의 ”그 많은 피라밋“(손성태 배재대학교 스페인중남미 학과 교수의 증언)을 바탕으로 실존 여부를 따져야 한다.


(내가 “중국 북부”의 “그 많은 피라밋”을 다시 “발굴”하고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그 유적들이『삼국유사』와『제왕운기』에 나오는 단군 이전의 갈마 - 그러니까 환웅족의 갈마 -를 되살리는 단서를 제공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따로 밝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