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빨간 버스 한 대가 옆 차선에 멈춰 서더니 창밖으로 사탕을 뿌렸다. 아이들만 보면 늘 이렇게 창문을 열고 사탕을 뿌려 대서 ‘캔디 버스’로 통하는 차였다. 매번 다른 손님을 태울 텐데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보면, 가이드가 손님들에게 이 좀스러운 ‘산타클로스 놀이’를 시키는 것이 틀림없다.
사탕이 흙바닥에 뿌려지자, 아이들은 모이를 쪼는 병아리들처럼 몰려들었다. 뒤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달려오는 위험천만한 상황인데도 아이들은 사탕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탕을 주운 아이들 중 그 자리에서 비닐을 벗겨 먹어 버리는 아이는 드물었다. 흙이 묻은 저 사탕들은 고사리 같은 손에 들려 할아버지 할머니나 더 어린 동생들에게로 갈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 하나가 빠끔히 열리더니 내 자전거 바구니로도 사탕 몇 개가 던져졌다.
“이런 씨! 누굴 거지로 아나?”
사탕을 집어 되돌려 주려고 바구니에 손을 뻗은 순간, 소식불통이던 신호가 바뀌고 빨간 버스는 흙먼지만 남긴 채 떠나 버렸다.
자전거 핸들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별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는대도 내 힘으로 버스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다.
저들이 던져준 건 호의를 가장한 냉소일 뿐이다. 약간의 선의와 동정심에 무례함이 섞이면 결과적으로 악의로 변한다는 걸, 사탕을 던져 주는 입장에선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 9~10쪽
아무렇지 않게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는 사이, 점점 아픔에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 12쪽
나이가 들면 세월이 꾸역꾸역 먹여 주는 어른스러움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 엄마는 마치 쫓기는 타조처럼 모래를 파고 얼굴만 숨긴 채 몸뚱이는 모래 밖 현실에 덩그러니 남겨 두는 사람이다.
- 18쪽
울컥하는 마음에 뛰쳐나와 올려다본 하늘이 젠장, 너무 푸르다. 신(神)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던가. 그 말, 듣는 입장에선 정말이지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이다. 한계치의 고통을 참아 낸 인간에게 더 심한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잘 견뎌 냈으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다, 다시 한 번 견뎌 봐라, 넌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인간이니까.
신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해서 더 큰 고통을 준다는 믿음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불공평한 운명을 참아 낼 방도가 없어서 생겨난 것이겠지. 사실은 이겨 낼수록 더, 더, 더 큰 파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19쪽
나는 그만 여기가 내 한계라고 선언하고 싶어졌다. 이쯤에서 더는 못 버티겠다고 드러누워 버린다면 …….
- 19쪽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내가 서 있는 이 흙바닥의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 21쪽
어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가 갑자기 부쩍 자라나는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이를테면 ‘조그만 게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기어오를래?’와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네 앞가림은 네가 해야지, 언제까지 엄마가 입히고 먹여서 학교 보내주길 바라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기. 어른들은 자신이 그러는 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느 시점에선 확실히 깨닫게 된다. 부모가 하는 이런 말들이 몇 년치 쌓이면 순 모순투성이란 사실을.
어쩌면 엄마는 오히려 그 허물을 드러냄으로써 면죄부를 받은, 모계사(母系史)에 있어 가장 뛰어난 책략가인 것은 아닐까. “네가 대신 할래?”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아직 자기 앞가림도 못할 나이인데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인 걸 어쩌겠니. 이만큼 키워 놨으니 이제 네가 날 봉양할 때인 것 같다.’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내게 이런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 33쪽
아줌마는 지금 이렇게 돈벌이에 찌든 엄마를 측은해했다. 그러나 돈이란 원래 중요한 것이고, 소싯적에 ‘그깟 돈’이라 여겼을 적은 적은 금액에도 이제는 연연하게 되었을 뿐이다.
- 34쪽
엄마에게 나는 뭘까? 묻어 둔 장기 저축이나 연금 같은 걸까?
- 34쪽
나더러 ‘장미처럼 향기로운 대화법’을 익히란다. “~해!”보다 “해 주겠니?”라고 하라거나 “싫어.”가 아니라 “난 생각이 다른데.”라고 표현하라는 별 시덥잖은 방법들. 하지만 내 진짜 문제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가 아니라 그 어떤 방법으로도 대화할 친구 하나 없이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 43쪽
“열일곱 살짜리 가이드(안내자[案內者] - 옮긴이) 이름이 촌스럽게 ‘김지옥’이라면 퍽이나 잘 믿어 주겠어요.”
“그건 뭐 팔자소관이고, 넌 암튼 김지옥이야. 딴말하지 마.”
“네, 저는 진짜 …… 지옥이예요.”
“계속 연습해. 입에 착 감길 때까지.”
나는 지옥입니다, 나는 지옥입니다, 나는 정말로 지옥입니다.
자꾸 이런 말을 되뇌다 요단 강 너머 유황 냄새를 맡게 될까 두려워졌다.
- 44~45쪽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방인임을 실감하고 있다. 낯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여행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뿌리가 몽땅 뽑혀 발붙일 곳이 없다고 느끼는 존재가 이방인이다. 그러니 지금 저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적어도 내 눈에만큼은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에겐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여행, 순례, 혹은 짧은 외유를 나선 뿌리가 단단한 사람들 …….
- 46쪽
“나도 지친다고, 옛날 생각에만 기대 사는 거 …….”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유리창에 비친 우울한 내 얼굴이 보였다. 우격다짐으로 씩씩한 척, 그런데 울고 있는 듯한 내 표정이.
- 60~61쪽
- 수아야, 왜 발버둥치지 않니?
- 어차피 꿈이잖아.
- 꿈도 네가 사는 세상의 바깥문이야.
- 깨고 나면 달라질 것도 없는데 뭐.
- 그래도 지금 이겨 내지 못하면 가라앉은 무게만큼 네 마음도 힘들 거다.
- 그럼 …… 왜 우릴 먼저 구해 주지 않은 거야?
- …….
- 70쪽
“수아, 모르는 거 하나 있다.”
“뭐?”
“사람은 한국 사람이어도 여긴 캄보디아, 여기 잘 아는 건 수아 아니고 나다. 캄보디아 사람들도 문화 있어. 싫어하는 거 있고, 안 해야 되는 거 많아. 그런데 한국 사람, 자기 집처럼 하고 다닌다.”
“그게 뭐가 어떻다고?”
“한국 사람들 밥 먹을 때 밥알 흘리고 주워 먹지 않아. 우리(캄보디아 사람, 그러니까 크메르인 - 옮긴이) 주워 먹으면 이상하게 바라본다.”
“당연하지, 흘린 건데 더럽게 …….”
“캄보디아에서 쌀은 인간을 도와주는 신(神)이야. 함부로 다루면 다음번에 가난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 사원에서 모자를, 머리 쓰지 않아. 다음 생에 대머리(로) 태어난다고 믿어.”
“그런 건 너희 나라 미신이지, 우리까지 목숨 걸고 지킬 필요는 없잖아.”
“여기 캄보디아다. 한국 아니야.”
- 77쪽
“근데 쟤 튀기(혼혈인을 깎아내리는 말 - 옮긴이) 같지 않아?”
속삭이는 두 언니의 말이 내 귀에 꽂혔다. 혀에도 칼과 도끼가 있다는 미경 아줌마의 말이 맞다. 사람들은 자기가 쓰는 말이 얼마나 큰 폭력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튀기’라는 한마디 말이 쩜빠가 아닌 내 가슴에도 생채기를 냈다. 흘끗 바라본 쩜빠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다.
- 81쪽
엄마는 사람의 관계란 언제나 갑(甲. ‘으뜸’이라는 뜻이 있음. 여기서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과 을(乙. ‘둘째’라는 뜻이 있음. 여기서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로 나뉘고, 칼집을 쥔 사람과 칼날을 쥔 사람은 엄연히 위치가 다른 법이라고 얘기했었다.
- 88쪽
“여기는 다른 사원이랑 많이 다르죠? 앙코르(앙코르 와트 - 옮긴이) 대부분의 유적이 국가가 신전으로 만들었던 신의 무덤인데, 이 반테이 스레이 사원만 라젠드라 바르만 2세의 신하이자 자야아바르만 5세의 스승인 사람과 그 사람의 동생이 이 사원을 지었대요. 이 사원은 1914년까지 밀림 속에 있다가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말로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대요. 알고 보면 도둑놈이지만요.”
- 91쪽
“앙드레 말로는『인간의 조건』이란 소설을 쓴 걸로 유명한데요, 이 사원에 왔다가 부조로 새겨진 여인상을 보고 홀딱 반한 거죠. 그래서 그걸 떼어 내서 프랑스로 출국하려다가 프놈펜(캄보디아의 수도 - 옮긴이)에서 딱 걸린 거예요. 그러면서 이 사원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요. ‘인간의 조건’에 문화재를 훔쳐 가면 안 된다는 건 들어 있지 않았나 봐요.”
“그 여인상의 미소가 신비로워서 동양의 모나리자로도 불린대요. ‘반테이 스레이’가 ‘여인의 성채’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 92쪽
“지옥 학생 …… 사업이 왜 부도나는지 알아?”
오봉 아저씨의 뜬금없는 질문이 내게 날아들었다. 아빠의 지게차 사업이 망한 건 아는데 어떻게 부도가 났는지 모르는 나로선 대답할 길이 없었다.
“사업 잘하는 어른들은 말이지, 받을 돈은 먼저 받고 줄 돈은 악착같이 미루거든. 쥐고 있을 수 있을 만큼 쥐고 있다가 나중에 주는 거야. 정작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화장실도 못 가고, 잠도 못 자고, 앉으나 서나 그 생각뿐인데 가져간 사람은 함흥차사라 이거지. 그거 물고 물리면 양심적으로 줄 돈 먼저 주는 사람부터 넘어지기 마련이야. 그게 어음이란 거야.”
그래서 우리 아빠 사업이 망했나?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 지게차들을 순순히 넘겨줘서? …… 아니다. 아저씨 말처럼 사업의 성패가 양심적이냐 아니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덜 양심적으로 굴던 엄마도 결국 부도를 냈고 우리는 빚에 쫓겨 이곳까지 도망쳐 온 거니까.
- 94~95쪽
외국 문화재 (약탈과 반환 - 옮긴이) 문제든 사업이든,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보면 마찬가지란 걸까. 그럼 아빠는 악착같지 못해서, 거기서 거기인 ‘눈 가리고 아웅 하기’를 못해서 망한 것일까. 어디선가 텁텁한 먼지바람이 불어왔다.
- 95쪽
내가 두려운 건, 그게 누구든 사람의 바닥을 보게 되는 일이다. 이미 엄마 한 사람으로 족하니까. 더 이상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당장은 그저 귀를 막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 97쪽
삼 년 전 아빠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단 한 번 보고 모든 것을 다 봤다고 믿진 말라고,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 105쪽
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앙코르 와트의 동쪽 벽면을 따라 회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가 그 유명한 ‘우유 바다 휘젓기’라는 장대한 부조가 조각된 곳이다. 학창 시절에 지우개에 이름깨나 새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제아무리 무른 고무라도 무언가를 조각하는 데 얼마나 손길이 많이 가는지를. 그러니 돌에다 이 엄청난 규모의 조각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 110쪽
사람들의 시선이 긴 뱀을 잡고 늘어선 아수라와 신들의 부조에 꽂혀 있었다. 이야기를 알고 나서 보는 것은 그 이전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신들과 아수라들의 모습에는, 지금은 손을 맞잡고 있지만 머지않아 서로에게 등을 돌릴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녹아 있었다. 사람들이 시큰둥하게만 바라보던 부조에 순식간에 생명력이 부여되는 놀라운 힘, 그게 이야기가 가진 마력인가 보다.
- 112~113쪽
그러고 보니 내가 먹을 망고가 보이지 않았다. 쩜빠를 째려보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 몰라라 하는 얼굴이다.
“야, 내 건?”
“여섯 개 살 돈만 줬다.”
“너 오른쪽 주머니 불룩한 거 다 봤거든. 내놔.”
“이건 아줌마랑 나랑 이야기하다가 선물로 받은 거다. 돈 낸 거 아니다.”
“이거 사는 바람에 덤으로 얻었으면 다 같은 거지, 너 진짜 치사하게 먹을 거 가지고 장난할래?”
말문이 막힌 쩜빠는 인상을 팍 쓰며 망고를 내 손에 휙 던졌다.
“진작 뱉을 것이지.”
그런데 말만 그렇게 했지 나 혼자서는 이걸 어떻게 깎아야 할지 난감했다. 쩜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접는 칼을 척 꺼내 들고 무언(無言)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깎으면 반으로 나누자, 뭐 이런 뉘앙스로.
“알았어, 깎아! 대신에 반 나눠서 씨 있는 큰 조각은 내 거야!”
쩜빠는 구시렁거리며 열심히 망고를 깎더니 정말 ‘치사하고 더럽고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큰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망고를 한 손에 쥐고 과육만 발라 먹으려니 생각과 달리 손이 미끄러지고 물이 튀고 난리였다.
“망고 먹는 것 못하냐?”
“이 씨, 무슨 놈의 과일이 이따위야!”
지금껏 엄마가 먹기 좋게 잘라 준 것만 포크로 먹어 온 나로선 이렇게 망고를 통째로 먹는 게 쉽지 않았다.
“줘 봐.”
라며 쩜빠는 내 손에 든 걸 빼앗더니 씨 부분을 쓱쓱 도려내고 과육만 먹기 좋게 잘라 내밀었다. 그러고는 남은 씨 언저리를 이로 뜯어먹고 있다.
“야, 너 ……. 아주 갈비를 뜯어요, 갈비를. 너 어디 가서 굶지는 않겠다.”
“갈비? 갈비 고기?”
“됐다, 됐어.”
이러니 뇌물이 비리로 이어지나 보다. 받아먹은 게 있으면 할 말을 못하게 되는 사람 심리는 캄보디아나 한국이나 한가지다. 그깟 망고 한 조각에 말문이 막히다니 …….
- 117~118쪽
모든 내리막에는 시작점이 있기 마련이다. 일이 꼬이고 있다면 맨 처음 흐트러진 순간이 있고, 인생이 갑자기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해도 그 역시 시작이 있다. 인생이라는 롤러코스터에서 지금 신나게 내려가고 있는 나 역시 덜컹거리며 올라갔던 때를, 그리고 고꾸라지기 전 잠깐의 멈칫거림을 기억한다. 누구나 자기 머릿속에서 형광색으로 기억되는 강렬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 120쪽
내리막의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쭉 미끄러지는 가운데 한순간 눈을 뜨고 바라본 주변 풍경이 기억날 뿐이다.
- 120쪽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순간이 아직도 그 내리막의 연속인지, 아니면 끝까지 내려와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인지는 알 수 없다.
- 121쪽
아침부터 온종일 놀면서 구경하는 일도 체력이 소진(消盡. 사라지고 다함 - 옮긴이)되기로는 공부나 매한가지다.
- 122쪽
‘만약’이란 말은, 삶은 시금치처럼 아무런 힘이 없다.
- 125쪽
내 꿈은 500 달러짜리 비행기표 한 장인데, 이걸 꿈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 될 지 안될지를 떠나서, 사실 두렵다. 이 꿈을 사고 나면 이젠 정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을까 봐.
- 130쪽
일정표를 보는 내내 마음속이 편치 않았다. 어젯밤에 주인집에서 월세 독촉 전화를 받은 탓이다. 우리가 사는 건물의 주인은 유명한 화교(華僑)인데, 시엠레아프에 이런 빌딩만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빌딩 부자라고 했다. 엄마는 누구는 집이 몇 채인데 누구는 여기까지 나와서 월세 내느라 허덕이는 인생이라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했었다. 글쎄 …… 그런데 쿤라도 엄마가 흘리고 다니는 가이드비 내역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도 나는 왜 지옥보다 적은 급료를 받는 걸까 하고 …….
- 132쪽
“자, 여러분! 오늘은 톤레사프라는 호수에 가는데요, 이 호수는 크기가 제주도의 세 배나 되고 동남아(동남아시아 - 옮긴이)에서 제일 크대요. 건기(乾期. 마른[乾] 때[期]. 그러니까 비가 거의 안 와서 땅이 마르는 때 - 옮긴이)에는 수심(물 깊이 - 옮긴이)이 1미터 정도지만, 우기(雨期. 비[雨]오는 때[期]. 비가 많이 오는 때 - 옮긴이)가 되면 12미터나 되거든요. 여기 물줄기는 티베트(공식 국호 ‘뵈’. ‘사우스 코리아’의 정식 국호가 ’한국‘인 것처럼, 티베트의 정식 국호는 ‘뵈’다. 중앙아시아와 몽골의 유목민들은 뵈 족을 ‘투바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아랍 세계로 건너갔고, 그 말이 다시 서양으로 건너가서 ‘티베트’가 되었다 - 옮긴이)에서 내려와서 무려 일곱 나라를 거친대요. 어마어마하죠? 그리고 여기엔 잉어, 청어, 메기, 민물농어 등등 물고기가 하도 많아서 낚싯대도 필요 없이 뜰채만 있으면 건질 수 있을 정도래요. 예전에는 더 많아서 진짜로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했는데 요샌 그나마 잡히는 양이 준 거라네요.”
- 134~135쪽
‘수아야, 세상 이치가 그런 거야.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돈은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흐르거든.’ 엄마의 환청이 들린다. 생각 안 하려고 무지 애썼는데 또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런데 낮은 데 있던 내 돈을 홀랑 털어 놓은 데로 튀어 버린 건 우리 엄마다!
- 138~139쪽
“세상은 한 형제니까 도와주는 거긴 하지만, 뭐랄까, 원래 따뜻한 데 사는 사람들은 천성이 좀 게으르다고 할까? 느슨하잖아요. 그래서 우리처럼 공부나 일 열심히 하는 걸 기대하는 게 …… 좀 무리 아닌가요?”
클랑 언니의 말이었다. 그 말에 토를 달지 않는 택이 엄마, 띡띡 언니도 같은 생각인가 보다.
“그럼 우리보다 추운 쪽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선 우리가 게으른 거겠네요.”
아그리파 선생님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긴, 이곳 사람들 눈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빨리빨리’만 외치고, 성급하고, 자기주장 강하고 ……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겠죠, 뭐.”
줄리앙 선생님도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에요! 캄보디아 사람들 게으르지 않아요!”
아차, 잊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캄보디아 사람으로서 듣고 있는 쩜빠가 있다는 걸. 쩜빠는 억울한 목소리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캄보디아 사람들, 게을러서 학교 안 보내는 거 아니고, 그냥 아이들, 학교 보내기 힘들어요.”
정말 억울한 모양인지 귀까지 벌게졌다.
“하루 먹고사는 일 힘든 사람들, 많아요. 공부시키고 싶지만 선생님, 많이 없어요. 공책도, 연필도, 학교도 많이 없어요. 게으른 거 아니고 시계 없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매일 늦는 건 나, 쏙천 아니고 망고예요.”
아니, 갑자기 나를 왜 끌고 들어가는 거야?
“늦긴 내가 언제 늦었어? 시간 맞춰서 딱딱 나왔구만. 내가 5분을 늦었어, 10분을 늦었어?”
씩씩거리며 쩜빠를 노려보는데, 쩜빠 역시 지지 않고 날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손목시계 없어서 늘 집에서 벽시계 보고 나와서 먼저 기다린다. 우리 10분 전에 도착한 줄 알면서 망고 시간 딱 맞춰서 나온다. 망고 준비 다 했으면서도 시간 맞춰 나오는 거, 늦는 거다.”
헉! 쩜빠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못 했다.
“야, 그건 약속이었잖아. 7시 반에 만나기로 했으면 7시 반에 보는 거지. 왜 시간을 니들 사정에 맞춰야 되는데? 그리고 니들 손목시계 없는 것도 내 탓이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르렁거렸다.
- 144쪽
두렵다. 새로운 길을 내는 건. 펄럭거리며 날아갈 커다란 귀도 없는 나는, 대열에서 벗어나 앞 코끼리를 따르지 않기도, 뒤에 있는 코끼리를 외면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젠 안녕을 고할 때가 되었나 보다. 코끼리들아 …… 잘 가!
- 159쪽
“망고는 ……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그건 아냐. 돌아가도 (더 잘 할 - 옮긴이) 자신 없는데 뭘. 애초에 내가 뭘 잘못해서 어그러진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으니까 ……. 그걸 되돌릴 힘으로 지금이나 열심히 살려고.”
너무 많은 우연과 희망에 기대 살면 사람이 지치는 법이다. 어쩌다 주운 동전 하나 때문에 (또 동전을 주우려고 - 옮긴이) 매일 땅만 보고 걸어 다닌다면 애초부터 동전은 행운이 아닌 셈이다.
- 169쪽
“나중에 할아버지가 캄보디아 요리 초대한다고 한다.”
“여기 요리 맛없다고 소문났잖아. 뭐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쩜빠가 내 말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할배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쩜빠는 또 부리나케 그 말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전쟁 동안 요리 전통 끊겨서 그런 거다. 캄보디아엔 냉장고 없어서 신선한 재료를 사서 바로 먹는 게 특징이다. 향신료를 안 써서 강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고 더 왕실 같은 맛이다. 태국이나 베트남만큼, 캄보디아 요리도 우수하다.”
- 201~202쪽
예정에 없던 사원 방문을 제일 좋아한 사람은 오봉 아저씨 내외(內外. 여기서는 ‘부부’라는 뜻 - 옮긴이)였다. 아저씨는 내게, 나이 든 사람에게 덤이란 건 단순한 ‘공짜’가 아니라 ‘행운’이라고, 그러니 이 주책없음을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 223쪽
난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다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바이욘의 미소를 보자 문득 3년 전 그날 아빠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아빠, 근데 석상 표정이 왜 모두 다른 거야?
-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표정으로 살진 않잖아.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으니까, 그 순간순간을 다 새겨 넣은 거겠지.
- 근데 아빠, 이쪽은 죄다 우울해 보여. 전부 우거지상이야.
- 글쎄, 그런 표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때론 나쁜 게 좋을 때도 있고, 좋은 게 나쁠 때도 있지.
- 뭔 소리야, 그게?
- 수아야, 포도나무는 말이야, 땅이 비옥하면(기름지면 - 옮긴이) 오히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해. 그냥 잎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야. 적당히 비바람도 불고 토양(흙 - 옮긴이)도 어느 정도 척박할(거칠 - 옮긴이) 때 좋은 포도알을 맺는 거야.
- 난 나쁜 거 다 통과하고 그냥 쑥쑥 자라서 어른이나 됐으면 좋겠는데.
- 무슨 그런 서운한 얘기를. 수아 나이가 얼마나 멋진데. 수아 나이 때는 앞에 정말 많은 문이 열려 있잖아.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 문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거든.
- 아빠 나이가 되면 괴로운 거야? 더 열고 나갈 문이 없어서? 저렇게 많은 표정이 없어서?
- 그래 …….
- 225~226쪽
그날이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누구의 생일이나 기념일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하루였을 뿐이다. 하지만 불현듯 어느 한순간, 마음이 텅 빌 때마다 그날이 자꾸만 생각났다. 200개의 표정이 석양에 물들어 하나가 되고, 그 따뜻한 미소가 붉게 번지는 걸 말없이 바라보던 그날이 …….
이 모든 기억을 담아 두었을 돌계단은 지난 3년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이곳을 찾는 사람의 얼굴만이 변할 뿐이다. 단 하나의 감정에도 충실하지 못한 나를 보고, 천년을 하나의 얼굴로 견뎌 온 이 석상들은 무어라 얘기할까. ‘오늘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왔니?’ 그렇게 묻지 않을까?
- 227 ~ 228쪽
마음은 매일 벼랑 끝으로 올랐다. 뛰어내릴까, 여기가 끝이겠지, 그런 마음들이 자꾸만 나를 날 선 곳으로 내몰았고 갈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뛰어내리라고 내 등을 떠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조함과 절박함으로 내몬 것은 나 자신이었다. 누가 나를 이곳에서 번쩍 들어 올려 주었으면 …….
- 237쪽
다시 눈을 감는다. 이번에는 매일 벼랑으로 오르는 또 다른 여자애가 보인다. 물론 칼바람이 부는 그곳이 편할 리 없겠지만, 아이가 눈길을 둔 곳은 천 길 벼랑 끝이 아닌, 더 멀리 펼쳐진 푸른 바다다. 눈을 돌리면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곳. 감았던 눈을 뜨자 뚝뚝이가 멈춰 섰다.
- 238쪽
조심스레 안고 온 코코넛(야자열매 - 옮긴이) 주스를 나눠 주면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왜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했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타조가 되니까.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고 눈앞에서 이 현실이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거겠지.
- 239쪽
그때 다른 어떤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옆 차선을 가로지르는 다른 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밝아졌다. 그 순간 내가 본 것은 삼콜 할배의 가슴팍에 달린 찡쩌(크메르어로 ‘도마뱀’이라는 뜻 - 옮긴이) 할배의 조끼 앞주머니에 매달린 그 녀석은 분명 우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도마뱀이 틀림없었다.
“그 찡쩌 …… 할배가 키우는 거야?”
쩜빠가 말을 전해 주자 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이 프렌드.”
왜 친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나를 번쩍 떼어 내서 수풀 속으로 던져준 것은, 어쩌면 저 도마뱀이 아니었을까.
- 252쪽
어쨌거나 현실은 우기와 건기의 반복, 구차한 변명의 연속이다.
- 252쪽
유적지를 떠날 때마다 적선하듯 사탕을 집어 던지는 무개념 빨간 버스는 결국 내 손에 붙잡혔다. 하루 날을 잡아 오후 내내 그 버스를 기다렸다가 죽을 힘을 다해 뒤쫓아가 가이드를 끌어냈다. 아이들에게 주워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이 개념 없는 가이드에게 던지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빠를 것 같아서였다. 주려면 곱게, 매너(Manner - 예절 : 옮긴이)있게, 흙이 아닌 사랑을 묻혀서 주라고, 뉘 집 강아지 밥 주듯 먹을 걸 던져서 되겠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애들도 가이드에게 사탕을 집어 던졌다. 졸지에 사탕 세례를 받은 가이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욕을 퍼붓고 돌아섰다. 쩜빠가 나를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또 흙바닥을 굴렀겠지만 그쯤에서 손을 털고 ‘싸움 망고’라는 새 별명 하나만 추가로 얻었다.
- 255쪽
아빠는 내게, 추억은 묻혀 버리기 쉬운 거라고 말했었다. 꼭꼭 숨겨 놓고 보다가 언젠가부턴 묻힌 자리가 어디인지 몰라서 찾지도 못하게 되는 게 추억이라고 했다. 그러니 매 순간 묻어 둔 자리를 잘 기억해야 한다고, 그래야 원하는 순간에 꺼내 볼 수 있다고.
- 255~256쪽
- 이상 모두 『내 이름은 망고』(추정경 지음, 창비 펴냄, 서기 2011년)에서 인용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권력에서 온 부귀와 명예는 쉽게 시든다 (0) | 2013.11.29 |
|---|---|
| ▩죽순의 쓰임새에 대한 짧은 설명 (0) | 2013.11.24 |
| ▩웃음뿔, 혹은 어릿광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0) | 2013.09.12 |
| ▩댓잎차의 효능 (0) | 2013.09.02 |
| ▩[프레시안]낡은 옷도 한 때는 새 옷이었다 (0) | 2013.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