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왜 ‘늘근 사라미’처럼 적지 않고 ‘늙은 사람이’로 적는 걸까

개마두리 2016. 1. 10. 21:57

- 국어 맞춤법


(가) 늙은 사람이 집으로 걸어간다.


(나) 늘근 사라미 지브로 거러간다.


왜 우리는 (가)를 (나)와 같이 쓰지 않는 걸까? (나)와 같이 쓴다면 구태여 까다로운 맞춤법에 맞게 쓰느라고 애써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영어는 꽤 잘 했었지만, 우리말(한국어 - 옮긴이) 맞춤법은 어렵게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처럼 쓰면 될 것을 굳이 (가)처럼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한글(정음 - 옮긴이) 맞춤법을 뜯어 고치려 했었지만, 학자들과 여론의 반대가 워낙 커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었다. 어쨌든 독재 권력의 힘으로 나라의 맞춤법까지 뜯어 고치려 했던 행적은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남아 있다.


하긴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나)처럼 표기하는(적는 - 옮긴이) 것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옛날 책에는 현대어의 ‘집으로’에 해당하는 ‘집ᄋᆞ로’를 ‘지ᄇᆞ로’로, ‘사람이’에 해당하는 ‘사ᄅᆞᆷ이’를 ‘사ᄅᆞ미’와 같이 적은 것이 오히려 압도적으로 더 많다.


즉 옛날에는 ‘집으로’, ‘사람이’ 따위를 ‘지브로’, ‘사라미’따위로 쓴 셈이 된다. ‘사ᄅᆞᆷ이’, ‘집ᄋᆞ로’처럼 표기한 것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금방 펴냈던『월인천강지곡』 따위의 책에 국한되어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로부터 개화기 무렵까지 사백 년이 넘는 기간동안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사ᄅᆞ미’, ‘지ᄇᆞ로’와 같이 표기하고 있다. (ㆍ는 ‘아래아’고, ‘ㅏ’와 ‘ㅗ’의 중간에 있는 소리를 내는 모음이다 - 옮긴이)


우리말 ‘잎’이란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발음된다.


잎도 [입도] → [입또]


잎이 [이피]


잎만 [임만]


‘잎도, 잎이, 잎만’을 발음 위주로 적으면 ‘입도, 이피, 입만’과 같이 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나란히 써놓고 비교해보자.


(가) 잎도, 잎이, 잎만


(나) 입도, 이피, 임만


(나)와 같이 표기하면 (이렇게 표시하는 방법을 ‘연철’, 언어학적으로는 ‘표음주의 표기법’ 또는 ‘음소적 표기법’이라고 한다) 적기에는 다소 편할지 모르지만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가)와 같이 적으면 (이렇게 표기하는 방법을 ‘분철’, 언어학적으로는 ‘표의주의 표기법’ 또는 ‘형태적 표기법’이라 한다) ‘잎’이라는 단어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어떤 경우에나 ‘잎’이 곧 눈에 들어오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잎’이라는 단어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각을 좀 해봐야 비로소 ‘잎’을 떠올릴 수 있다.  


(가)와 같이 적으면, 즉 형태적 표기법을 취하면 맞춤법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읽을 때 금방 눈에 들어오고 의미 전달이 쉽게 된다. 그러나 (나)와 같이 적으면, 즉 음소적 표기법을 취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런 까닭으로 한글 맞춤법은 “소리 나는 대로 적되, (낱말의 - 옮긴이) 원형을 밝혀 적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는 것이다. “원형을 밝혀 적는다.”는 말의 뜻은 바로 (가)의 경우처럼 단어의 형태소를 고정하여 변화시키지 않는 형태적 표기법을 취한다는 뜻이다. 때때로 한글 맞춤법이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형태소를 고정시켜 적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맞춤법이란 실생활에 쓰이는 문자 표기법의 효율성을 더 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언중(言衆. 언어[言]를 사용하는 사람들[衆] - 옮긴이)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심술꾸러기가 아니다.


- 강혜원/박영신/서계현,『교실 밖 국어여행』, 270 ~ 272쪽


* 출처 :『교실 밖 국어여행』(강혜원/박영신/서계현 지음, (주)사계절출판사 펴냄, 서기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