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官) : 벼슬/벼슬자리/벼슬아치/관청이라는 뜻.
* 보충설명 :
『예기(禮記)』에 “제후 이하 3공(三公. 세 정승 - 인용자 잉걸. 아래 ‘인용자’)과 사(士. 북송/남송 시대나 명나라 때와는 달리, 서주[西周] 시대와 춘추 시대에는 ‘글을 쓰는 선비’가 아니라 ‘직업군인’이나 ‘무사’를 뜻하는 말 이었다 - 인용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통틀어 관(官)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또 관(官)이라는 말은 관(管)과 같아 ‘관할하다.’, ‘관리하다.’의(는 - 인용자) 뜻으로도 사용한다고(쓴다고 - 인용자) 했다. 원래 관(官)은 (나라의 - 인용자) 일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 사식(史式),『청렴과 탐욕의 중국사』, 244쪽
(본문 인용 시작)
지난 2,000년 이래 역대 (동아시아/유교/한자 문화권 - 인용자 잉걸. 아래 ‘인용자’) 왕조의 제도를 놓고 보면, 관리(벼슬아치 - 인용자)가 되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진한(秦漢. 진[秦] ‘제국’과 한[漢]나라 - 인용자)시대 이후 수/당 이전까지는(그러니까 서한[전한]시대부터 남북조시대 말기까지는 - 인용자) 유능한 인재에 대한 추천(‘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것’ - 인용자), 즉 지방관이 조정에 추천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참고로 춘추전국시대에는 똑똑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운 뒤,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벼슬아치나 귀족이나 왕족이나 임금한테 가서 “저를 뽑아 주세요. 만약 그렇게 해 주시면, 제 재능을 바치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고 부탁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찾아가서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선 귀족/왕족/임금과 가까운 사람을 찾아가 “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 사람들은 귀족/왕족/임금에게 “아무개는 이런저런 점이 뛰어납니다. 뽑아서 쓰십시오.”하고 아뢰었고, 귀족/왕족/임금들은 그 말을 듣고 추천받은 사람을 불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실력을 시험한 뒤 벼슬을 주었다. - 인용자)
그러나 수/당 이후부터 신해혁명 이전까지는 시험, 즉 과거 선발을 통해서 관리가 되는 길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이 공식적인 방법 외에(말고 - 인용자) 다른 비공식적인 방법으로는 관리가 될 수 없었을까? 물론 비공식적인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모종의 경로를 통해 비공개로 관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감(太監. 환관을 일컫는 다른 말. 명/청 왕조에서는 환관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 인용자)은 황제와의 관계를 통해 관직(벼슬 - 인용자)을 얻을 수 있고, 외척은 황후나 태후(太后. 황태후[皇太后]를 줄인 말. 황제의 살아있는 어머니나, 선제[先帝]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황후를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와의 관계를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당나라 때의 ‘사봉관(斜封官)’은 후비(后妃 : ‘후[后]’와 ‘비[妃]’를 합친 말. 둘 다 임금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다. 단, ‘비’는 ‘황태자의 아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 인용자)나 공주의 추천을 통해 자리를 얻은 관리들이었다.
두 번째는 ‘매매’(사고 팖 - 인용자)를 통해 공개적으로 조정의 관직을 사는 방법이다(한자말로는 ‘벼슬을 돈이나 재물을 받고 사고파는 일’이라는 뜻을 지닌 ‘매관매직[賣官賣職]’이라고 부른다 - 인용자). 상당수의 왕조들이 이런 공개 매매를 통해 관직(벼슬자리 - 인용자)을 팔았는데, 이 경우에도 이름뿐인 ‘허함(虛銜)’과 실제 자리가 있는 ‘실직(實職)’의 구별이 있었다.
‘허함’은 조정이 돈을 벌기 위해 지방의 토호라 할 수 있는 사신(士紳)이나 부유한 상인들(장사꾼들 - 인용자)에게 직함만 팔아 그들의 체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직’은 그 자리를 산 자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부임해 일을 하게 되므로, 백성들에게는 (벼슬을 돈 주고 산 사람이 실제로 벼슬아치가 되어 일하는 일이 - 인용자)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자리를 사기 위해(사려고 - 인용자) 막대한(많은 - 인용자) 돈을 들인 자가 ‘본전’을 뽑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 자는 부임하기가 무섭게 탐관오리로 돌변해 백성들을 쥐어짤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관직을 산 자들에게 청백리가 되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가 청백리(참고로, 이 말은 조선시대부터 쓰인 말이고, 고리[高麗] 때에는 청백리를 ‘청렴한 벼슬아치’라는 뜻인 ‘염리[廉吏]‘로 불렀다고 한다[염 = 렴 = 청렴] - 인용자)가 된다면, 관직을 얻기 위해 쓴 본전조차 날리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어떤 관리가 청백리냐 탐관오리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관직을 얻게 된 경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해 일정한 대응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사 교수[글쓴이]가 소개한 표에 따르면, 지방관이 추천한 사람으로서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덕[德]을 더 중시하므로 탐관오리가 될 가능성이 적고, 과거에 급제해서 뽑힌 벼슬아치는 재능을 더 중시하므로, 그도 탐관오리가 될 가능성은 적다고 한다. 그러나 비공식 경로로 - 예를 들면 외척이라서 - 벼슬아치가 된 사람은 덕과 재능이 없을 가능성이 커서 탐관오리가 될 가능성이 꽤 크고, 돈 주고 벼슬을 산 사람은 덕도 재능도 없으므로, 탐관오리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 인용자)
역대로 (‘중국’의 - 인용자) 민간에서는 “천 리를 멀다 않고 달려가 관리가 되려는 것은 돈 때문”이라거나, “3년 깨끗하게 관리 생활을 했더니, 피 같은 돈 10만 냥이 날아갔다.”거나, “관아 문 팔(八)자는 남쪽으로 열려 있어, 돈 없으면 못 들어온다.”등과 같은(여기서 “등과”는 빼야 글이 깔끔해진다 - 인용자) 말들이 떠돌았지만, 전체적으로 탐관오리가 많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자리가 없으면, 탐관오리도 못 한다.”는 말은 분풀이나 질투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들이 탐관오리가 될 기회를 가졌던(얻었던 - 인용자) 시대가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이라는 제방(둑 - 인용자)이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는(‘무너지기 전에는’ - 인용자), 설사 타락한 탐관오리가 될 기회가 있어도 모두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한 왕조에 한 명 혹은 몇 명의 거물급 탐관오리가 조정을 통제하기만 해도, 국가 재정과 경제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생계가 위협받기에 충분하다. 그 결과 곳곳에서 민변(民變 : 민란[民亂]과 같은 말. 백성[民]이 일으킨 변란[變亂]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말로는 ‘민중봉기’다 - 인용자)이 터지고, 왕조 전체가 쓰러진다. 많은 청백리들이 전전긍긍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보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자리가 없으면 탐관오리도 없”는 상황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 왕조는 이미 끝장난 상태다.
수/당 시대 이후 청나라 때까지, 모든 왕조는 대체로 300년 정도 존속했는데(사[史] 교수는 ‘중국’ 땅에서 일어난 한족 왕조와, 유목민족/수렵민족이 세운 ‘중국’ 땅을 정복하고 세운 정복왕조를 통틀어 일컫고 있다 - 인용자), 각 왕조는 다시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개국 군주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며 훌륭한 인재를 중용했다. 이 시기에 기용된 재상들은 대부분 과거라는 정식 통로를 거친 청백리들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힘이 비교적 강성했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청백리가 조정일 주도한 시대로, 기간은 대체로 60 ~ 70년 정도다.
황제 자리가 2, 3대 전해진 중기에 오면, 정치 경험이 부족하고(모자라고 - 인용자) 능력이 떨어지는 군주가 뒤를 잇고, 그 결과 간신이나 외척, 환관에게 둘러싸여 대권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조정에 들어온 인물이 재상(정확히는 승상 - 인용자)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재상을 맡을 가능성이 높은데’로 바꿔야 한다 - 옮긴이), 이들은 대부분 탐관오리들이었다.
중기는 대략 100년 정도인데, 청백리와 탐관오리가 서로 조정의 통제권을 놓고 싸우는 시기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무측천(본명 무미랑[武媚娘]. 당나라 궁궐로 들어간 뒤 이름을 무조[武照]로 고쳤다. 성이 무[武]씨고 이름이 조[照]다. 이철[시호 당 중종]이 죽은 뒤,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워 다스렸다. 시호는 ‘측천무후’고, ‘무측천’은 이 시호를 줄인 말이다. 무조가 세운 주나라는 ‘무씨 성을 지닌 사람이 세운 주나라’여서, ‘무주[武周]’로 불리며, 주나라는 무조가 죽기 직전에 망했고, 그 뒤 당나라가 되살아났다 - 인용자) 시대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채우려고 - 인용자) 소인배(탐관)들을 비호하는 한편, 전체적인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자(청관[淸官. 맑은(淸) 벼슬아치(官)라는 뜻으로, 명망 있는 청백리를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들도 지지하여 양자 간 평형과 정국의 안정을 유지했다.
후기는 일반적으로 수십 년에 불과한데(지나지 않는데 - 인용자), 정국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국가의 정세가 갈수록 하향세를 타는 시기다. 올바른 기운이 점차 쇠하고 나쁜 기운이 상승하면서 조정은 비정상적인 경로로 관계(官界)에 진출한 권신들에 의해 장악된다. 즉 탐관이 청관을 압도해 왕조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멸망으로 치닫는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하나의 역사 법칙을 형성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청백리들을 기용하면 국력이 강해지고, 탐관과 청백리가 싸우는 시기에는 국력이 약해지며, 비정상적으로 조정에 들어온 탐관들이 조정을 장악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면 탐관이 정국을 주도하는 국면이 나타나고, 이는 곧 왕조의 ‘숨이 끊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용 끝)
- 사식,『청렴과 탐욕의 중국사』, 247 ~ 250쪽
-『청렴과 탐욕의 중국사』(사식[史式] 지음, 김영수 옮김, 돌베개 펴냄, 서기 2007년)에서
▶ 옮긴이(잉걸)의 말 :
비록 이 글이 한족(漢族)이자, ‘중국’의 역사학자인 사람이 ‘중국’의 갈마를 설명하는 글이기는 하지만, 배달민족은 서기 7세기 중반부터 서기 19세기 중반까지 한족의 제도와 문화를 꾸준히 받아들였으므로(이는 서기 19세기 후반과 서기 20세기 중반에 배달민족이 서유럽/미국/러시아/소련의 제도와 문화를 꾸준히 받아들여 자신의 나라들을 바꾼 것과 같다), 이 글은 후기신라/고리(高麗)/조선의 성격(그리고 흥망성쇠)을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나아가 이 글은 같은 한자/유교 문화권인 중세 ~ 근대의 베트남 왕조들(예를 들면 ‘다이 비엣[대월大越]’의 리[이李] 왕조)을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견(私見)을 덧붙인다.
'갈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하! 생태] 플라스틱 분해하고.. 먹이사슬 조절.. 나방이 환경지킴이였네 (0) | 2018.04.14 |
---|---|
[스크랩] 고구마는 최고 정복자? "스스로 세계 곳곳 뿌리내려" (0) | 2018.04.13 |
과거제, 관리를 선발하는 좋은 제도 (0) | 2018.04.12 |
[스크랩]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5살 신라 백제 가야인은 나라를 구했다 (0) | 2018.04.12 |
[스크랩] 日, 전쟁 후 `강제불임수술`..미성년 장애인도 수술대에 (0) | 2018.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