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케메트(Kemet)에서 글자가 만들어진 까닭

개마두리 2018. 9. 5. 21:45

* 케메트 :


흔히 ‘이집트’로 알려진 나라의 첫 이름이다. 이는 한국과 조선 공화국(수도 평양)의 첫 이름이 ‘아사달’, 그러니까 ‘고조선’인 것과 같다. 옛 말(고대어)로 ‘검은 땅’이라는 뜻이며, 의역하자면 ‘기름진 땅’이라는 뜻이다.


나일 강 중류와 하류는 홍수 때문에 기름진 흙과 영양분이 많이 떠밀려와 쌓였고, 그래서 주위의 사막과는 달리 여름지이(농사)를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실제로, 식물이 잘 자라는 흙은 거름이 많이 쌓여 썩었기 때문에, 검은 빛을 띈다)


‘이집트(Egypt)’는 훨씬 후대에 옛 헬라스 사람들이 케메트에 붙인, ‘아이깁토스’라는 이름이 앵글로색슨 식으로 바뀐 것이며, 오늘날의 케메트 사람들(대다수가 아랍인이거나 토착민과 아랍인의 혼혈이다)은 자신들의 나라를 ‘미스르’로 부른다(아랍 말로 ‘요새’라는 뜻이다). 이는 일본인이 ‘간고꾸’나 ‘조센’으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국호가 ‘한국’인 것과 같다.


(참고로 미스르 시민이자, 토착 케메트 사람들의 후손인 콥트 파[派] 신자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미Kemi’로 부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케메트’가 바뀐 것이다)


독일 방송국에서 펴낸, 다큐멘터리들을 문서화한 책『임페리움』에서는 케메트를 ‘나일 제국(帝國)’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나일 강의 제국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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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시작)


기원전 3200년경(지금으로부터 5218년 전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이집트(케메트 - 옮긴이)는 전설적인 부족장(部族長) ‘메네스’에 의해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하게 되었다(참고로 단군 왕검은 메네스 파라오보다 933년 뒤에, 우[禹]는 1200년 뒤에 나라를 세웠다 - 옮긴이).


(단, 나일 강 유역에서 통일국가를 처음 세운 사람이 메네스라는 이야기지, 그 이전에 문명이나 나라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이클 우드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 고고학”은 “서기전 6000년대[8000년 전]”에도 “나일 강 유역”에 “농사를 지었던 마을들”이 있었음을 밝혀냈고, “서기전 4000년[그러니까 6018년 전]”부터 “서너 개의 조그만 왕국”, 그러니까 도시국가 수준인 작은 나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한 학자들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돌, 청동, 구리, 석판을 다루는 공예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며, “서기전 3500년[5518년 전]”에는 “지역을 다스리던 왕족의 호화분묘도 등장”했고, “서기전 4000년대 중반경”에는 오늘날의 미스르 남부인 ‘상[上] 이집트’[나일 강의 상류 지역인 미스르 남부에 있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에 ‘네켄’, ‘나가다’, ‘디스’라는 세 왕국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의 미스르 북부인 ‘하[下] 이집트’[나일 강의 하류 지역인 미스르 북부에 있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에도 여러 왕국들이 있었다.


학자들의 말대로라면 나일 강 유역에는 메네스가 즉위하기 8세기 전부터 문명이 싹텄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만들어져 서로 싸우다가, 메네스가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나라를 뺀 여러 나라들 - 특히 하 이집트의 나라들 -을 무너뜨리자, 첫 통일국가가 나타난 셈이다.   


대한제국 원년인 서기 1897년에 활동했던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키벨’과 ‘F.W. 그린’이 네켄 왕국의 중심지였던 미스르 마을 ‘콤 엘 아마르’의 밭에서 찾아낸 케메트 초기 파라오들을 다룬 “석판”에 따르면, 네켄 왕국에는 메네스 이전에도 [물론 옛 케메트 말로] ‘메기’, ‘코브라’, ‘전갈’, ‘매’로 불린 파라오들이 있었는데,


[눈치 빠른 사람이나,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본 사람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전갈’ 파라오가 할리우드 영화인 <미이라 2>에 나오는 악역 ‘전갈 왕(영어로는 스콜피온 킹)’이다. 단, 영화와는 달리 전갈 왕은 세계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나쁜 놈’이 아니었고, 악한 신에게 자신을 팔아먹은 적도 없으므로, 영화의 내용은 믿지 마시기 바란다. 실제 ‘전갈’ 파라오를 다룬 글은, 언젠가 따로 써서 올리겠다]


[참고로 ‘메기 파라오’는 옛 케메트 말로는 ‘나르메르 파라오’로 불리었다. ‘나르메르’는 옛 케메트 말로 ‘메기’라는 뜻인데, 옛 케메트 사람들은 메기를 ‘사납고 거친 물고기’로 여겨, 전사들의 대장인 파라오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 


메네스 파라오 이전에 나타난 작은 나라들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 나라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케메트 제국, 그러니까 나일 제국은 나타날 수 없었으며, 나아가 크레타 섬과 에게 해에서 나일 제국과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은 크노소스 제국이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헬라스 본토에서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크노소스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


우드 기자의 설명을 가져오자면,

 
"왕조 이전의 시대, 즉 '싸우는 매'인 전갈 왕이 히에라콘폴리스[네켄의 헬라스 식 이름 - 옮긴이]에서 호루스의 추종자들을 지배하던 때인 메네스 이전의 시대는 이집트의 장래를 끌어갈 기간산업들이 발달한 시기였다.


효율적인 농업, 금속공예, 집약적으로 관리된 관개수로, 토기, 석공, 뛰어난 건축물, 정교한 장례문화, 그리고 원거리 무역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네켄, 아비도스, 콥토스에서 과거의 신들이 석판에 새겨지고 조각상으로 창조되었다. 매의 얼굴을 한 호루스, 아크밈과 콥토스의 수호신으로 늑대의 얼굴을 한 민, 독수리의 모습을 한 여신, 재칼의 얼굴로 명계를 다스린 아누비스, 달의 신이며 문자의 수호자인 토트[케메트 신화에 나오는 학문의 신이자, 언어를 발명했다는 지혜의 신 - 옮긴이], 그리고 장인[匠人]의 수호자라는 '프타'[왕권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신. 언제나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신들과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는 일을 맡았다 - 옮긴이]등이 이때 형상화되었다.


또한 신성한 왕권의 영기[靈氣],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장례의식, 그리고 이집트만의 독특한 예술 양식이 이때 시작되었고, 그 특징은 3천년 넘게 전수되었다."


한마디로 메네스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문화와 문명들을 한데 그러모아 새로운 통일국가라는 틀 안에 집어넣은 사람이지, 케메트의 모든 것을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 옮긴이)


메네스는 통일된 이집트 왕국(케메트 제국/나일 제국 - 옮긴이)의 최초 파라오(옛 케메트 말로 ‘임금’이라는 뜻. 원래는 ‘햇님[태양신]이 머무시는 집[몸]’이라는 뜻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임금’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케메트 사람들은 임금이 ‘햇님의 자손’이고, 그가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썼다 - 옮긴이)가 되어,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전체를 다스렸다(메네스 이전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서로 싸웠고, 크게 보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가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었다. 메네스는 상 이집트 출신인 왕이며, 그가 하 이집트의 여러 나라들을 무릎꿇림으로써 첫 통일왕조가 나타났다 - 옮긴이).


통일 국가의 왕이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어 낸 메네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일 강을 따라 (남북으로 - 옮긴이) 길게 뻗어 있는 나라 전체를 다스리다 보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많은 어려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왕(파라오. 그러나 제대로 옮기려면 ‘황제’로 옮겨야 한다 - 옮긴이)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우선 하류 지역(‘하 이집트’ - 옮긴이)과 중류 지역(‘상 이집트’ - 옮긴이)에 사는 부족들이 쓰는 말이 서로 달라 일일이(하나하나 - 옮긴이) 통역을 내세워야 했다.


그리고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왕의 뜻을 잘못 전달해 엉뚱한 결과를 빚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 옮긴이) 먼 곳까지 왕의 명령을 정확하고 쉽게 전할 수 있는 문자(글자 - 옮긴이)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그 무렵 문자라고는 그림 같은 모양인 상형문자가 전부였다. 상형문자는 수도 적었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내용을 표현할(나타낼/드러낼 - 옮긴이) 수도 없었다.


(나는 몇 해 전, ‘중국’의 절강성에서 5천 년 전에 쓰인 글자가 새겨진 석기가 나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열여덟 해 전에 읽은, 『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는 책[김경일 교수가 쓴 책이다]에 따르면, 산동성에서는 ‘띵꽁[정공] 문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물들이 나왔다. 또 요령성 가운데서도 오늘날의 요서 지방인 곳에서는, 4200년 전에 구워진 토기에서 문명인이 남긴 ‘글자’로 보이는 부호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들보다 828 ~ 1630년 늦게 나타난 상[商] 왕조의 갑골문자는 그 글자들을 참고하고, 그것들을 ‘모아, 모아서’ 상 왕조 지배층이 쓰기 편하게 짜깁기한[다시 만든? 뜯어고친?] 글자라고 봐야 한다.


메네스가 다스리던 시절의 케메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메네스 이전에도 나일 강 유역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간단한 그림글자[상형문자]를 만들어서 썼고, 그것들은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으며, 아주 단순했다.


그것이 메네스의 통일 왕조가 나타난 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하고 많은 뜻을 담고 있으며, 소리글자처럼 소리를 바탕으로 글자를 쓰기도 하는 ‘이집트 신성문자’로 바뀐 것이다 - 옮긴이)     


고민하던 메네스는 서기관(書記官. 글을 쓰는 벼슬아치 - 옮긴이)을 불렀다.


“이집트 전 지역에 짐의 명령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도록, 그에 딱 들어맞는 글자를 만들도록 하라. 우선 급한 대로 그림 글자를 쓰고 있을 테니,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도록 하라.”


메네스가 통일 국가의 왕이 되고 난 얼마 뒤부터, 이집트 사람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문자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한자로는 ‘신성[神聖]문자’ 그러나 이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이 케메트를 점령한 뒤, 그의 뒤를 따라 케메트로 내려온 헬라스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케메트 사람들은 이 글자를 ‘능력 있는 말’[‘능력’ = ‘힘’이므로, ‘힘 있는 말’ → ‘힘 있는 글자’? : 옮긴이]이라는 뜻을 지닌 ‘메두 네테르[Medu Neter]’로 불렀다. ‘글자’를 ‘말’로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정음[正音]의 첫 이름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正音]’라는 뜻 이었다. 다시 말해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글자와 말[소리]을 엄격하게 나누지 않았다 - 옮긴이)를 썼다. 


히에로글리프는 사자, 매, 뱀, 식물, 인간(사람 - 옮긴이), 네모(한자로는 ‘사각형[四角形]’ - 옮긴이)와 동그라미(한자로는 ‘원형[圓形]’ - 옮긴이) 등 기묘한 부호로 이루어진 문자였다(그러나 100% 뜻글자는 아니었고, 때로는 뜻글자로, 때로는 소리글자로 쓰인, 이두나 베트남의 쯔놈[한자로는 자남字喃]과도 엇비슷한 글자였다 - 옮긴이).


히에로글리프는 초기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들이 전국(全國. 온 나라 - 옮긴이)을 다스리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이[勿] - 옮긴이) 이때 메네스의 서기관이 히에로글리프를 개발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기 전의 유물들에서는 전혀(조금도 - 옮긴이) 이 문자가 발견되지 않다가, 메네스 이후의 유물들에서 이 문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히에로글리프가 개발된 것이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집트 문자는 이집트 문명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까지 약 3000년 동안이나 쓰였다.


(참고로 신성문자, 아니 ‘메두 네테르[힘 있는 글자]’는 서기 394년까지 쓰였다. 그러니까 아케메네스 제국이나 마케도니아나 로마가 케메트를 침략/정복/점령/지배한 뒤에도 꾸준히 쓰이다가, 로마가 동서로 나뉜 시대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그럼으로 메두 네테르는 “약 3000년 동안”이 아니라, 3594년 동안 쓰이다가 사라진 글자로 이해해야 한다.


[단, 알렉산드로스 왕이 죽은 뒤, 헬라스와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케메트 문화를 받아들이고 케메트의 파라오가 되고 케메트 사람으로서 살아갔으므로, 이들의 다스림은 케메트의 왕조를 없애버리고 케메트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의 지배방식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괜찮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우드 기자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케메트[아이깁토스]가 로마에 정복당한 지 1세기가 지난 “서기 2세기 이후에는 옛 케메트 문자가 몇몇 특권층만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되어버”렸고, ”서기 6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이집트 사제들이 옛 상형문자를 읽지 못했다.”


‘메두 네테르[힘 있는 글자]’는 이런 식으로 사라져 갔고, 서기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다시 조명 받기 시작했다 - 옮긴이)


- 『이집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하워드 카터 지음, 이혜경 엮음, ‘청솔’ 펴냄)에서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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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인류 최초의 문명들』(마이클 우드 지음, 강주헌 옮김, 중앙 M&B 펴냄, 서기 2002년)


- <네이버 지식백과>『미술대사전(용어편)』


▣옮긴이(잉걸)의 말 :


결국 글자는 사상이나 이념을 가르치려고 만들어 내거나(훈민정음), 장사할 때 편하라고 만들거나(페니키아 식 알파벳. 이 글자는 거의 모든 소리글자의 뿌리다), 종교를 퍼뜨리려고 만들거나(키릴 글자), 아니면 나라를 다스리려고 만든 것(메두 네테르)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글자의 태어남은 문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한데(키엔기르의 쐐기 글자[설형문자]나, 인더스[하라파] 문명의 글자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 메두 네테르가 나타난 사연을 적은 이 글이다.


문명이 우리한테 준 가장 큰 선물(올바른 말은 ‘물선[物膳]’)은 여름지이나 증기기관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글자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