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의 딸인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성은 한씨다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가 (서기 – 옮긴이) 1474년(성종 5년) 죽자, 후궁들 가운데 가장 서열이 앞섰던 ‘윤숙의’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뒷날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이다. 후궁 시절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폐비 윤씨는 왕비의 자리에 앉자, 강한 성정(性情. 성질과 심정 – 옮긴이)과 노골적인 질투를 밖으로 드러냈다고 전한다. (이는 – 옮긴이) 유난히 여색을 밝혔던 성종 탓도 있다. 성종은 왕후 세 명과 후궁 아홉, 곧 공식적으로만 열두 명의 여인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을 뿐 아니라, 야사(野史)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시로 대궐 밖을 나가 여염집(閭閻집. ‘마을 문[閭 : 그러니까, 마을]과 번화한 거리[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