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로마는 결국 황제를 선택했다. 한국은?

개마두리 2015. 10. 12. 15:02


- [로마의 일인자 ③] 로마의 선택, 한국의 선택


-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상임 연구위원)의 글


- 날짜 : 2015.10.05.


* 편집자의 말 :


“로마(고대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공화정 체제와 기독교 제국의 시작을 알렸고, 유럽과 아프리카 문명, 동양과 서양 문명의 교류를 이끌었습니다. 로마의 라틴어와 법률 체계는 지금도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중세 로마)을 포함하면 무려 2000년이나 유지된, 인류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로마 읽기는 그래서 비단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오래도록 이어져왔습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영웅을 낳았습니다. 많은 분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를 기억할 겁니다. 


고대 로마를 다룬 역작이 새로 나왔습니다. <가시나무새>로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호주(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콜린 매컬로(1938~2015년)가 무려 20년에 걸쳐 총 7부작으로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중 <로마의 일인자>(강선재·신봉아·이은주·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펴냄)가 주인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에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 책은 새로운 번역서입니다.


총 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7부작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입니다. 로마가 비틀거리는 공화정을 지나 전제 군주 체제로 입성하기까지 약 100년의 시간을 추적한 전체 시리즈 중, 마리우스가 로마 공화정의 중심에 오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독재자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전, 피 튀기는 정쟁의 소용돌이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박진감이 책 전반에 넘칩니다.


이 거대한 시리즈를 쓰기 위해 콜린 매컬로는 엄청난 양의 사료를 뒤져야 했습니다. 건강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출간되자마자 영미권의 베스트셀러에 올라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이 시리즈를 독자 여러분께 친절히 안내해드리기 위해 <프레시안>이 교유서가와 공동으로 기획해 이 책을 먼저 읽은 세 분의 독후감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마지막 서평자로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상임 연구위원을 모셨습니다. 황 연구위원은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한국을 당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공화정이 흔들리는 시기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 어디로 향할 것이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한국의 뿌리도 로마에 있었다는 점을 정리하는 한편, 과거 로마의 선택에서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것인가를 독자에게 묻는 흥미로운 서평을 통해 <로마의 일인자>를 다채로운 시각으로 읽어보실 기회를 만나 보시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 로마, 공화정과 제국 사이에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말을 모르는 현대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순신만큼이나 유명하고, 네로는 연산군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로마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으며 지식보다는 상식의 대상처럼 보인다. 로마에 관한 책이 새로 출판되는 것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새삼 로마를 다시 생각해봐야할 것은 무엇일까?


한국의 로마 사랑은 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상 현대 한국의 뿌리는 반만년 전 한반도보다 근대 시기 서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중이라는 한류가 단군 할아버지보다 일본이나 구미 대중음악과 더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


근대 유럽의 모든 길은 그리스와 로마로 통한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동로마 제국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0년 넘게 지속된 로마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빼놓을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근대 유럽을 연 르네상스만 보더라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근대 정치의 핵심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그리스와 로마의 트레이드 마크다. 로마군단의 상징이던 독수리는 나폴레옹, 러시아를 거쳐 나치와 미국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나치는 아예 자신들이 신성로마제국을 승계한 제3제국임을 천명했고, 미국의 상원(senate)은 로마 원로원(senatus)의 연장이다. 근대 서구의 법과 예술은 로마법과 건축을 빼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근대 서구의 모태가 곧 현대 한국의 태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길 또한 로마로 이어진다. 개항 이래 한국의 역사는 근대 서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세계사의 구심력에 빨려들어갔다. 요컨대 고대 로마가 근대 서구를 통해 한국인의 머리와 심장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로마는 하나가 아니다. 10층 높이의 인술라(아파트)가 즐비하고 거대한 콜로세움과 촘촘한 상하수도 시설로 대표되는 고대 건축의 전시장인가 하면, 탄압과 수용을 통해 기독교 세계화의 결정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로마법으로 '법에 의한 지배'라는 놀라운 통치 기술을 선보였는가 하면, 스파르타쿠스 반란으로 근대 마르크스주의에까지 깊은 영감을 주었다. 로마 군단으로 대표되는 군사 전략과 전투 기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는 도시 국가이자 도시 동맹체인가 하면, 수많은 속주와 식민지를 거느린 거대한 제국이기도 하다. 귀족과 황제의 나라이자 호민관과 평민의 위상이 그 어느 고대 국가보다 높았다. 로마는 전설과 신화이자 냉엄한 역사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가시나무새>로 유명한 콜린 매컬로가 로마에 푹 빠진 것도 이해가 간다. 심지어 별다른 관련이 없는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조차 매혹시켜버린 로마이기에 서구 지식인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그들은 로마를 통해 무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이야기들은 로마가 역사적 대상으로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두 사람 모두 로마의 영웅들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시오노가 카이사르를 신격화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콜린 매컬로도 이번에 출간된 1부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다음 인물이 카이사르임은 이미 본문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소설가로서 로마의 문학 텍스트화가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매컬로가 보여주는 로마는 단지 몇몇 인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책의 백미는 장군이나 황제,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의 활약상도 아니고 귀족이나 평민 같은 신분계급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매컬로는 인정 욕망을 동기로 삼고 개인적 자질을 수단으로 한 정치 행위를 통해 마리우스나 술라를 설명하려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로마는 공화정 그 자체라고 하겠다.


예컨대 마리우스 같은 시골뜨기가 7번이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마침내 '로마의 일인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 그의 성공은 개인적 능력이라기보다 당시 정세와 조응한 로마 공화정의 역동적인 정치 과정의 결과로 읽힌다. 세습 군주 대신 집정관 선출을 못 박은 공화정체야말로 역동적 정치를 가능케 한 기본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융성이 몇몇 개인의 능력이었다면, 로마의 몰락도 무능한 개인들의 책임일까?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의 의미는 로마를 개인적 행위의 결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요컨대 로마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의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자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오늘의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진 셈이다. 도대체 정치, 특히 공화정 하의 정치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현재 한국 헌법 제1조 제1항이다. 무려 2000년의 시차와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 차이를 넘어 로마와 한국은 공화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이어지는 굴곡을 보여주었는데, 공화정을 중심으로 앞뒤로 왕정과 제정이 연결된다. 전근대 시기 공화정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인데, 공화정의 영향력은 제정 시기 황제가 세습이 아니라 선출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제정조차 공화정의 연장이었다.


로마 공화정은 현대 정치 체제와 상당히 유사한 체제와 운영 원리를 갖고 있었다. 입법부에 해당하는 원로원과 민회가 있었고, 행정과 사법은 집정관과 법무관 그리고 재무관 등이 담당했다. 비상사태에서는 일시적으로나마 비상대권을 장악한 독재관을 두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운 관직은 당연히 호민관이다. 호민관은 정책 집행을 담당할 수는 없었지만, 결정적인 힘, 즉 모든 정책의 거부권과 함께 필요하다면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리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을 왕정(집정관), 귀족정(원로원), 민주정(호민관과 평민회) 등 3개의 정체가 중첩된 것으로 파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모두 선출직이었다는 점이다. 백인조회, 트리부스회, 평민회 등 공화정 당시는 세 개의 민회가 운영되었는데, 출마자들은 인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오늘날의 대중정치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선거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 활동은 정교하게 짜인 법률에 의해 규율되었다. 원로원을 대표하는 귀족 스카우루스는 "진정한 로마인은 그 무엇보다 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법 앞에서는 사회계급도 무의미합니다. 법은 그 누구도 스스로 동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못하게끔 고안된 견제와 균형의 장치입니다"라고 강조했다(2권 283쪽).


현대 공화정과 차이도 컸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신분제에 기반했다는 점이다. 파트리키라는 전통 귀족, 노블리스로 불린 신흥 귀족과 함께 평민과 노예가 로마의 주요 신분이었다. 또한 신분제는 경제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운영되었다. 경제 규모에 따라 귀족과 평민은 5계급으로 구분되어 등록되었는데, 로마에서는 돈과 경제적 실력이 신분과 정치 활동을 규정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사실상 현대의 경제 계급과 로마의 신분은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신분제와 계급이 엄존했으면서도 사회적 유동성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았다. 지방 귀족들도 전공을 세워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고 파트리키 귀족 출신이라 해도 경제적으로 몰락하면 하층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책의 주요 인물인 마리우스는 '그리스어도 모르는 촌놈' 출신이었고 술라는 몰락한 파트리키였다. 이 다양한 신분과 경제 계급 사이의 경쟁과 암투가 곧 로마 공화정 정치의 요체였다.


신분이 정치의 출발선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경제적 실력, 곧 돈은 정치 과정을 규정했다. 그래서 "돈, 돈이 세상을 지배했다. 돈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1권 55쪽)라는 말이 통용되는 세계였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요소가 추가되는데 바로 개인의 탁월함이었다. 로마의 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걸출한 자임을 입증"함으로써 가능했다(1권 34쪽).


매컬로는 신분과 돈 그리고 개인의 능력이 어우러진 공화정 정치를 실감나게 그려내는데, 그 모습은 마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 한 현대 정치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시오노가 제국주의와 영웅주의로 채색한 로마를 그려낸다면 매컬로는 인민주의적 또는 개혁적 자유주의(마리우스)와 보수 기득권층 자유주의(스카우르스와 원로원) 간의 공방을 주축으로 삼는 듯하다. 귀족과 평민 간의 대립과 갈등은 그라쿠스 형제 이래로 로마 공화정의 기본적 정치구도였고 마리우스와 원로원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매컬로는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공화정은 불가피하게 인민/평민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정과 연루될 수밖에 없다. 매컬로는 이를 공화정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조부의 입을 통해 설명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실현 불가능한 그리스의 철학 이념일 뿐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스스로 초래한 저 혼란을 보십시오. 우리 분별 있는 로마인들이 그런 혼란을 빚을 리 있겠습니까. 로마는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체제지요." (1권 105쪽)


그리스가 선거 대신 추첨을 통해 공직자를 선출한 것은 로마에서 통할 수 없었다. 정치는 그러한 우연에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선거를 통해 능력 있는 자를 가려내는 일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로마의 합리성이었고 그 결과가 공화정, 다시 말해 일종의 과두제였다. 이 과두제는 또 다른 긴장과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는데, 과소 대표되는 다수가 과잉 대표되는 소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내부 갈등은 종종 외부 위협과 맞물리면서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로마에 위협은 게르만족이었다. 로마 군단은 애초 자유 시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일정한 재산과 경제적 실력을 갖추고 스스로 군장과 무기를 장만해 군복무 했다. 로마군단은 일종의 자유시민의 연합체였기에 특정 개인의 절대적 권위가 관철되기 어려웠다. 공화정의 이상에 걸맞은 군대인 셈이었다. 그러나 게르만족에게 연이어 패전하면서 병사로 복무할 로마 시민이 격감하자, 마리우스는 최하층민의 군복무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로마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는 "가장 하찮고 미천한" 최하층민을 동원해 "군장을 갖추고 훈련받고 국가의 녹을 받으며 군인의 몸과 마음으로 국가를 섬기는 시민 집단으로 변모"시켰다(2권 18쪽). 마리우스의 최하층민 군대는 아프리카를 정벌했는가 하면 게르만족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로마의 가장 중요한 무장력이 되었고, 마리우스는 그 여세로 무려 7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는 로마의 위기 극복이자 공화정 위기의 시작이었다. 자립적인 자유시민의 연합체 대신 국가의 경제적 지원으로 복무하게 된 최하층민 군대는 마리우스라는 걸출한 지도자에 절대 충성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을 국가와 지배자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확실히 최하층민의 삶을 개선시키기는 했다. 마리우스는 군복무를 마친 최하층민에게 로마 속주의 토지를 분배하여 자립적 경제 생활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로마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전파시키고자 했다. 마리우스는 "최하층민 남자들이 쓸 돈을 갖게 되면 로마는 더욱 번영할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로마가 로마로, 심지어 현재의 로마 그대로라도 남으려면 모든 인민에게 투자해야만 합니다. 국가가 공유지 일부를 내주어 최하층민 퇴역병이 경작하거나 팔 수 있는 작은 땅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종의 연금이지요. 이렇게 되면 격감된 소규모 자작농 계층에 꼭 필요한 새로운 피가 주입되는 것입니다." (1권 23쪽)


그러나 로마 원로원의 귀족을 대변하는 스카우루스는 이것이 "로마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력 반발하면서 "최하층민은 무기력하고 무책임하며, 재산이나 군장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빈민 퇴역병들을 위해 연금"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대립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저자는 "최하층민은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가 부를 때의 이야기다. 배고픈 최하층민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한다(3권 80쪽). 특히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 사태를 설명하면서 기근이 단순히 최하층민 몇천 명이 굶어죽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상업과 사업체가 연이어 타격을 입게" 되는 "로마 경제의 대재앙"임을 강조한다(3권 462쪽).


결국 로마 공화정은 인민/평민을 통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깊은 균열을 보여주었고 마리우스와 술라 이후 카이사르를 거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정으로 접어들게 된다. 원로원과 귀족 집단은 자신들의 전통인 공화정을 유지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인민/평민의 자기 통치로서의 민주정이 등장하지도 못했다. 마리우스를 현대의 정치언어로 설명하자면 인민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독재 등의 개념 계열 어딘가에 포함될 것이며 카이사르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카이사르가 태어날 지역이 빈민들의 집단 거주지인 수부라로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실현 불가능한 그리스의 철학 이념"은 2000여 년이 지난 뒤 실현 가능해졌다. 그러나 로마에서 실현 가능했던 독재와 제정 또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실현 가능하다. 하층민이 빈곤해지고 과소대표된다고 느끼는 한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귀족이 과잉대표된다고 생각한다면 공화정의 안녕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마리우스는 최하층민을 군대로 조직하고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시민/국민'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공화정의 말미를 장식했다. 노예는 공화정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고 그들은 내부의 게르만족이 되었다. 이 배제의 정치가 바로 로마 공화정의 임계점이었다. 2000년이 지나 로마 공화정의 후예인 민주공화국 또한 국민군을 만든 것은 물론 국민학교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외적으로 공화국의 위기를 외치는 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동북아 정세는 요동치고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 기미가 안보이며 세계 최고수준의 자살률은 요지부동이다. 민주공화국의 임계점은 과연 어디인가.


위기에 따른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할진대, 그 변화의 방향이 어느 쪽일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근대 역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장소에서 거의 동일한 인민/평민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선택되고 중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민주정과 함께 파시즘으로의 길도 실현 가능한 조건일 것이다. 로마는 스파르타쿠스와 호민관을 통해 수많은 혁명가들의 심장을 격동시켰는가 하면, 스파르타쿠스와 그라쿠스를 진압하고 살해한 장군과 귀족들의 영화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2000년을 격한 로마 공화정과 한국의 민주공화국, 2000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인가.


*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0117


(<프레시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