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중국화하는 일본』- 근대 일본과 견줄 나라를 잘못 고른 책

개마두리 2015. 9. 20. 20:15


일본 학자 요나하 준(한자로는 여나패 윤 與那覇 潤 - 옮긴이)이 2011년에 쓴『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이라는 책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로 저자가 “일본의 근현대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문화학과 준 교수”라고 소개된 바, 학자로서 전문가라는 것, 둘째로 서론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펼쳐 보이는 역사상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학계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설이 되고 있는 연구시각과 학문적 성과를 메들리(접속곡. 여러 노래의 일부를 조금씩 접속하여 한 노래로 만든 노래 - 옮긴이) 형식으로 뒤섞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것, 곧 일본 당대 학계의 정설을 설파한다고 자부하는 점, 셋째로 옮긴이가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일본에서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져 일본 내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 때문이다.


나(김상태 선생 - 옮긴이)로서는 그 시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얘기들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니 당대의 ‘영향력 있는 학계의 정설을 주장하는 전문가’의 학문적 태도를 검토하는 데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 이 책을 검토해보자.


300쪽이나 되는 책을 요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행히 옮긴이의 친절한 해제(解題. 책이나 작품, 그리고 그것들을 만든 사람에 대한 간단한 설명 - 옮긴이)가 있어 이 책을 소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책의 요지는 이렇다.


“이처럼 요나하는 정치/경제의 운영원리인 신자유주의를 일천년 전의 송나라에 그 기원을 두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 핵심인 ‘작고 강한 정부’는 황제권의 강화에, ‘시장우선 정책’은 신분제를 철폐하고 상업의 자유를 장려한 송나라의 경제제도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송나라를 지금의 미국으로 치환하면 저자의 문제의식이 더 명료하게 보인다. 일본은 이미 천년도 전에 글로벌 스탠더드(‘중국화’)의 기회를 놓쳤으며, 이제라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야 한다! (303쪽)”


일본이 신자유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 책의 요지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맞는 얘기인지는 이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뒤에서 일본 경제에 대해서 상술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 주장이 - 옮긴이)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결론이 아니라, 여기에 이르는 동안 저자가 본문에서 제시한 대목 한 부분이며, 그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는 논의 중간에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한자로는 ‘명치유신明治維新’ - 옮긴이) 체제가 송나라의 체제와 유사하다는 논지를 펼쳤다. 역사 지식이 없는 독자라 해도 이것만은 뭔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저자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 제목만 나열해 보겠다.


(인용 시작)


▶ 천황이 중화의 황제가 되다 :


- 송나라화하는 일본 1


1. 유교도덕에 의존한 전제왕권의 출현


2. 과거제도와 경쟁사회의 도입


▶ 군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군현에게 :


- 송나라화하는 일본 2


3. 세습귀족의 대량감원과 관료제의 군현화


4. 규제완화를 통한 시장의 자유화 추진


(124 ~ 128쪽)


(인용 끝) 


제목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송나라화하는 일본, 즉 메이지 유신이 송나라와 유사한 이유를 거론하고 있다.


첫째, 메이지 유신 이전 바쿠후(한자로는 ‘막부幕府’ - 옮긴이) 시대에는 천황이 허수아비여서 송나라 황제 같은 전제왕권이 부재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중심체제가 되어 송나라 같은 전제왕권이 탄생했다.


둘째,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고등문관임용시험이 생겨 과거제도와 유사한 경쟁체제가 도입되었다.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나 여기엔 즉 송나라와 메이지 유신 체제 사이엔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고 너무도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송나라는 군부나 장군 혹은 무인세력을 철저히 숙청해버린, 중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문인관료사회였다는 것이 그 하나이며(북송과 남송 조정의 기본 이념은 문치주의였다 - 옮긴이),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을 침략하기는커녕 거란족과 여진족에게 일방적으로 침략당하고 그 침략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밀려 남송이 되었다가 그나마 몽골족의 원나라에 의해 멸망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럼 메이지 시대(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서기 1868년부터, ‘메이지’라는 시호를 받은 일본 왕 무쓰히토가 죽은 서기 1912년까지를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의 일본은 어땠나? 두루 알다시피 메이지 유신은 중하급 사무라이의 쿠데타로, 모든 권력을 이 사무라이들이 장악했다. 문관이란 기껏해야 사무라이들의 엄격한 통제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보조역에 불과했으며, 외국과의 관계로 보면 송나라와는 정반대로 줄기차게 다른 나라(예컨대 조선/대한제국이나 류큐 왕국이나 러시아나 청나라 - 옮긴이)를 공격하고 침략하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독자들이 판단하라. 메이지 시대가 송나라와 유사한가?


송나라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부분인 극단적인 문치국가와 극단적인 무사국가와의 차이를 덮어두고 이런 비유를 할 수 있는가? 가령 흰색과 검은색은 둘 다 무채색이기 때문에 같은 색깔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가? 이처럼 검은 것을 희게 만든 것이 일본 전문가와 학자들이 하는 일인가?


내가 보기에 요나하 준의 논리는 범죄자의 전신 몽타주를 그린다면서 옷차림은 사진처럼 상세히 그려놓고, 정작 그려야 할 얼굴만 안 그린 것과 같다. 얼굴이 없는 몽타주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사정권의 속성을 제쳐놓은 위 네 가지 요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가령 사무라이들에게 꽁꽁 둘러싸여 그들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은 메이지 천황(이름은 ‘무쓰히토’ - 옮긴이)을 스스로 송을 건국한 태조 조광윤 같은 전제군주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나아가 전쟁을 통한 약탈과 배상금 그리고 군수산업의 발전을 전제하지 않는 한 메이지 시대의 일본 경제체제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이와 결부된 정치/사회/문화 부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어느 것이나 문치 평화국가인 송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요하나 준이 제시한 모든 근거는 뿌리부터 흔들리는 가짜들이다.


결론은 이렇다. 이 책의 진짜 의도는 어떻게든 일본 무사통치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뭔가를 해보려는 것이다. 가령 메이지 시대를 송나라까지 끌어와 은근히 칭찬하면서, 일본 무사통치와 천황제를 옹호하는 일본 우익의 작태일 수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무사통치체제의 개혁을 에둘러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제 와서 얘기지만, 신자유주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옳든 그르든 일본이 정말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싶다면 현재 일본의 은폐된 무사통치체제(메이지 유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무사 집안 출신인 사람들이 만든 일본 정부 - 옮긴이), 더 쉽게 말하면 거의 마피아 조직처럼 뒤엉킨 정계, 관료, 기업체 간의 썩을 대로 썩은 부패고리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어쩌면 저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하자는 말 속에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뜻이 숨어 있을 수 있으며, 이런 민주주의를 의도하는 한 그것은 현재 일본의 무사통치체제에 가장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라 해도, 저자는 직설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종내(終乃. 끝내 - 옮긴이)는 송나라가 메이지 시대와 유사하다는 식의 기괴한 이야기를 꺼내어 돌리고, 우회하고 꼬아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만든다. 이것이 무사통치 체제하에 있는 일본 학자들의 천년 묵은 신경증이다.


이 신경증은 요나하 준의 책 한 권에 그치지 않는다. 요나하 준 자신이 일본 학자들의 정설을 나열한 것이라고 했으므로, 중국의 송나라와 일본의 메이지 시대가 유사하다는 이 논리도 일본 학계에 널리 유행하는 것일 수 있다.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요나하 준의 논리와 비슷한 이런 식의 일본 책을 너무 많이 보았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도달할 수 있는 단순한 핵심은 묻어둔 채 주변에서 괴상한 이야기들을 끌고 와 끝없이 유사한 논설을 전개하는 책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 국민이 이런 책들을 그만큼 필요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고 인정해야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그렇다고 아예 외면해 버리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한없이 얼쩡거리는 것, 이 가망 없는 쳇바퀴를 영원히 맴도는 것, 이게 일본이다. 이것이 무사통치하에 있는 일본 학문의 정체이며 그 자체로 사무라이 체제의 속성이다. 김석형이 적발한 일본 학계의 작태는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 김상태,『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 113 ~ 117쪽


* 출처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김상태 지음, 책보세 펴냄, 서기 2014년)


# 옮긴이(잉걸)의 말 :


내가 이 글을 소개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고, 다른 하나는 (한국 안의 친일파나 제 3국출신인 친일파나 친일국가의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 학계가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정확하게 풀지 못하고 그것을 파헤치거나 널리 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다.


이 두 가지를 명심하지 않으면 나와 여러분은 권위의 함정에 빠지고, 일본 학계의 정직하지 않은(그리고 정확하지도 않은) 이론으로 일본 사회와 문화를 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나와 여러분에게는 늘 깨어 있으면서 의심하고, 따지고, 의문을 품고, 물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