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인도인들이 변화에 적응하고 많은 자민다르가 약간의 재산을 모았을 무렵, 동인도회사는 세액 징수 체계를 재정비했다. 이번에는 징수원들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굴 통치의 특징이었던 엄격한 관리 감독을 되살리는 대신, 영국인들은 자민다르를 모두 없애고 해당 마을에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을 임명했다.
자민다르에게 이 조치는 재앙이었다. 갑작스럽게 소득이 사라지자, 자민다르는 신분과 토지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짜내야 했다. 그리고 이들이 재검토한 특성 중 하나는 가족 구성이었다.
가족의 토지는 아들이 물려받음으로써 계속 보존되었다. 딸은 결혼해서 출가할 뿐 아니라, 많은 지참금까지 필요했고, 세금이 인상되면서 딸을 낳는 것은 곧 가족의 토지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게 되었다. 사학자 버나드 콘이 쓴 글처럼, 부모들은 애초에 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딸을 살해함으로써 [가족은] 신분이 낮은 가족 및 집단과 혼사를 맺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유아 살해의 확산 문제는 경제 문제, 특히 토지 문제와 연결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것을 받아들이느니, 딸을 죽이겠다는 가족의 선택이 좋은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급속한 변화에 직면하여 이런 선택을 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승혼도 한몫을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인도인들이 많은 수의 딸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은 이 관행이 불공정한 경제 정책과 결합된 후였다.
영국인들이 새로운 토지 정책과 여아 살해 문제의 연관성을 공공연히 묵살하는 동안, 그 관련성을 의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몇 년 뒤(서기 1960년? - 인용자)에 유아 살해 기록을 샅샅이 뒤진 비슈와나트는 식민주의자들에게 그런 연관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인도인들의 사례를 많이 발견했다. 예를 들어, 1849년에 레와 - 파티다르 족의 한 구성원은 (영국인 - 인용자) 관리 J. 웨브에게 지역 주민들이 (동인도회사에 - 인용자) 점점 더 많은 세금을 내면 딸의 지참금에 쓸 돈이 남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딸을 결혼시키면서 능력에 따라 비용을 부담합니다. 하지만 우리 부족 내에서 그 비용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전 정부(무굴 제국의 정부 - 인용자)에서 우리는 우리 책임하에 마을을 관리할 권한을 얻었고, 따라서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여 우리 재산을 유지했습니다. 현재(서기 1849년 - 인용자) 우리에게는 그런 재산이 없습니다.
1847년에는 파티다르 족 사람이 아메다바드의 세금 징수원에 대해 비슷한 불만을 제기했다. 몇 년 뒤 동인도회사가 1855 ~ 1856년의 여아 살해를 상세히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W.R. 무어는 “모든 부족에서 범죄의 원인을 동일하게 말한다.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지위와 재산이 예전과 달라져서, 그렇게 당당한 결혼을 할 수도, 그렇게 큰 액수를 지불할 수도 없다.”라고 썼다.
비슈와나트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1789년 베나레스에서 조너선 덩컨이 발견한 것은 사실이었다. 라즈쿠마르 족과 그 외의 높은 지위의 라지푸트족이 여아를 살해했다. 그리고 아마도 수년간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인이 인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여아 살해는 다른 부족으로 퍼져 나갔다. 먼저 라지푸트족 내에서 악화하여 가장 높은 하급 부족으로 확산되었다가, 권력이 약한 부족에까지 퍼졌다. 그러다 (동인도회사가 실시한 - 인용자) 1차 토지개혁이 실시된 1795년에 라지푸트족은 토지의 40 퍼센트를 잃었다. 이들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하위 부족들에게 점점 더 높은 지참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여아 살해가 지위가 높은 부족에서 낮은 부족으로 옮아가 유행하게 되었다.
1873년에 영국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장한 관행을 폐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아살해법’을 내놓았다. 승혼이 여아 살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이 법은 지참금 및 다른 결혼 비용의 한도를 정하고자 시도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조항이 일부 지역에서 실제로 여아 살해라는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새로운 법이 문제 해결을 보장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후 많은 (영국인 - 인용자) 관리가 자기 구역에서 여아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관리 H. R. 쿡은 “내가 물어본 모든 사람이 지금은 딸에게 재앙이 내리길 바라거나, 딸의 출생을 ‘불운’이라 여기지 않으며, 딸을 소중히 여기고 정성과 사랑으로 기른다고 답했다.”라고 썼다. (다른 글에서 쿡은 딸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은 영국의 정책 실패를 암시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 추악한 범죄가 우리 식민지 내에서, 그리고 우리의 현 경찰행정 하에서 발견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어느 정도는 만연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굴욕적인 처지를 피할 수 있어야 한다.”)
비슈와나트가 영국의 문서들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영국인이 인도 내 여아 살해를 폭로하고 그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하지만 비슈와나트의 연구 결과는 정확히 그 반대를 암시했다. “여아 살해가 대규모가 아니었거나, 무시하기에 너무 노골적이지 않았다면, 영국인들은 그 일을 못 본 체했을 것이다.” 도처에서 야만스러운 여아 살해를 밝히던 쪽에서 그 존재를 감추려는 쪽으로의 이 갑작스러운 전환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시기를 놓쳤다. 한 동향이 일단 활성화하면 없애기 쉽지 않은 법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인도인이 딸을 살해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했을 무렵, 여아 살해는 마침내 관습이 되었다.
- 마라 비슨달(Mara Hvistendahl),「5장 제국주의의 이면」,『남성 과잉 사회』, 96 ~ 111쪽
* 마라 비슨달 : 미국의 백인 여성 언론인.
* 출처 :『남성 과잉 사회』(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현암사 펴냄, 서기 2013년)
'갈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침략과 착취가 부추긴 무굴 제국의 여아 살해 - 3 (0) | 2015.12.20 |
---|---|
▷◁영국의 침략과 착취가 부추긴 무굴 제국의 여아 살해 - 4 (0) | 2015.12.20 |
[스크랩] 울진 성류굴서 신라 진흥왕 때 금석문 발견..7행 38자 음각 (0) | 2015.12.17 |
[스크랩] 태국 `현대판 노예` 하루 16시간 동안 새우 껍질 벗겨 (0) | 2015.12.15 |
▷◁『삼국사기』「고구려본기」봉상왕 조 (0) | 2015.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