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홋카이도에 살았던 아이누인들…

개마두리 2016. 2. 7. 00:27


* 홋카이도 :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 드넓은 벌판의 꽃밭은 애초에 아이누들이 누비던 삶의 공간이었다. 홋카이도는 아이누의 독립된 땅이었고 이들은 바다를 통해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아이누와 함께 북방문명권을 형성했다.


-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의 글

 
- 날짜 : 2015.08.26.


- <시사 IN live>에 실린 글


실크로드의 동단은 과연 경주에서 끝나는 것일까. 중앙아시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 경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북방 루트는 끝이 나는 것일까. 그러한 주장은 사실 한국인들의 소망일 뿐,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북방 루트의 동쪽 끝은 한반도가 아니라 연해주와 사할린, 홋카이도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해를 관통해 일본 열도와 대륙을 연결해주던 일본로는 발해를 경유해 당과 거란 등 각지로 향하는 도로와 연결되었다. 발해와 일본 사신이 동해를 관통하는 사신로가 있는 반면, 일본 사신이 발해를 경유해 당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으로 들어가는 ‘견당사(遣唐使)로’도 있었다. 일본과 발해의 동해를 관통하는 연결 루트는 서아시아에서 일본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북회경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실크로드의 북회경로에서 연해주와 아무르 강변 하구를 통해 홋카이도로 연결되던 동쪽 노선이 하나 더 존재했다.


모든 문명이 한반도를 거쳐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와 일본 규슈 등으로 들어간다는 사고는 해양교통을 무시하는 고정적 · 고착적 사고일 뿐이다. 또한 연해주에서 곧바로 홋카이도로 들어가는 북방 노선에 대해서도 종종 무시하는 사고가 팽배하다. 홋카이도의 원주민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혼슈 중심의 일본사를 서술하기 위해 북방민족 간에 오래도록 존재했던 독자적인 문명 교섭에 관해 눈감고 있는 것이다.


10세기 이후, 홋카이도 남서부에서 여진(흑수말갈? - 옮긴이)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연해주와 홋카이도의 교류가 확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북회경로는 동북아시아의 십자로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사신이 오기 전에 일본은 이미 사신을 말갈국(흑수말갈이나 철리말갈? - 옮긴이)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와의 공식 교류 이전에 일본 조정이 이미 대륙 정세에 관심을 갖고 말갈국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평면지도에서 본다면 말갈은 머나먼 땅이지만 둥근 지구 위에서 본다면, 말갈의 땅에서 환동해 북부를 관통하여 곧바로 홋카이도나 도호쿠(東北) 지방에 당도할 수 있다. 말갈의 땅과 일본 사이에 사전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727년 발해와 일본 양국은 교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오늘의 일본 역사는 홋카이도를 침략해 아이누인(야운쿠르인 - 옮긴이)들을 몰살시키다시피 하고 그들의 독자적 문화 또한 말살하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아이누인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나서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할린에도 아이누족이 다수 살았음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홋카이도 문화의 원형은 사할린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할린 문화가 좁디좁은 해협 건너편 연해주와 연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북방 연해주나 아무르 강 하구로부터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에 이르는 북회경로는 실크로드의 마지막 동쪽 궤적이 남아 있는 중요한 문명사적 증거이다.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와 북방과의 무역은 산단 교역이라 불렸으며, 이는 비교적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만주 쪽에서 올라온 정보에 따라 중국 중원의 지배세력은 일찍부터 홋카이도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송대의 <불조통기>에 수록된 ‘동진단지리도(東震旦地理圖)’를 보면 에조(아이누)가 등장한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에도 홋카이도가 그려져 있다. 1602년의 <곤여만국전도>에 에조를 ‘야작(野作)’이라 명기했으며, 야작 서측으로 여진(女眞)을 명기했다. 오늘의 연해주 방면에 여진족, 동쪽 방면에 에조가 병존했던 것이다.


▶ 일본인 탐험가가 목격한 산단 교역의 현장


드넓게 영토를 확장하던 청나라는 아무르 강 하구에서 원주민들과 조공 교역을 실시했다. 선주민이 중국의 조공체계에 확실히 들어감으로써 산단 무역이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교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중원에서 내려지는 조공품들이 아이누족에게 전달되고, 아이누족은 반대로 모피 같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중국(더 정확하게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황제 - 옮긴이)에 바쳤다.


1809년 일본인 탐험가 마미에는 아무르 강 하구에서 청조와 선주민 간의 조공의식과 교역을 목격했다. 그의 <동달지방 기행>은 산단 교역의 귀중한 기록이다. 조공 교역에서 청조는 선주민들에게 중국제 견직물을 주었으며, 이 견직물이 홋카이도로 들어와서 에조 비단이라 불리게 된다. 중국 강남의 쑤저우(蘇州)에서 만들어진 견직물이 베이징을 거쳐 동북부 아무르 강 하구로 이동하며, 거기서 마미에 해협을 건너 사할린과 홋카이도로 건너가 혼슈로 넘어가는 방식의 교역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의 만주 동쪽 바다와 연해주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다. 일본에서는 연해주 지방을 중국이라 부르지 않고 ‘동단’이라는 독립 지역으로 인식했다. ‘단’은 타타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에도 시대인 1644년, 청조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한 바로 그해에 선주 다케우치 도우에몬과 일행 43명이 사도가시마를 출항한 후 조난당했고,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갈레와라 만 근처에 표류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생존자 15명은 성경(훗날 봉천, 지금의 선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반년가량 베이징에 체재한 후,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환자들이 에도 막부에 불려가 취조를 당한 진술서가 <동단 표류기>다. 귀환자들은 청국이 아니라 ‘달단국’이라 불렀다. 달단이라는 말은 중국 당대부터 있었고, 명대에는 몽골을 달단이라 불렀다.

  
한편 유럽에서는 중국 북쪽, 북방 유라시아 지방을 타르타리아, 즉 타타르인 혹은 타타르족의 땅이라고 명명했다. 중국 본토와 만주, 연해주에 대한 분리 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본토와 다른 만주/연해주에 대한 이해방식은 먼 훗날 만주/연해주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성한 아이누의 땅에 일본인들이 들어선다. 침략의 선봉장은 마쓰마에 번이었다. 마쓰마에 번은 북방 대륙에서 타타르 해협을 거쳐 홋카이도로 들어오는 중국 제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산단 무역의 중간 고리에 마쓰마에 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에도 막부가 성립되고 난 후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 민족과의 교역을 전담했고, 아이누는 일본인과 산단인 사이의 교역을 중개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감행했음에도 북방교역만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지속했다. 그 결과 중국 강남으로부터 오늘의 연해주를 거쳐 일본 북방에 이르는 ‘북의 실크로드’가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일본 본토에서 홋카이도로 일본 열도의 문명이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홋카이도가 아이누의 독립된 땅이었고, 그네들은 바다를 통해 사할린의 아이누들, 심지어 쿠릴 열도의 아이누와 하나로 연결된 동일한 북방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 연해주와 아무르 강 하구, 쿠릴 열도의 북방문명권은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일본 본토의 문화다. 그런데 오늘의 일본 역사는 오로지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의 연계점만을 강조하곤 한다. 왜냐하면 홋카이도의 아이누는 ‘부인된 문화’, 사할린은 ‘버려진 문화’이며, 쿠릴 열도는 오로지 ‘북방 4도’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일본 문화와의 연장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단 무역의 바닷길은 일본 본토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오랫동안 존재하던 북방인들의 문명사적 교섭이었다. 마쓰마에 번을 앞장세운 일본 본토인의 개입이 시작되었을 때, 산단 무역은 이상하게 왜곡되었다. 중국 본토의 비단이 아이누를 거쳐 일본 본토인에게 전달되는 무역 루트 정도로 왜소화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북쪽의 실크로드 증거물이 다수 남아 있다. 현재 홋카이도 박물관이나 사찰, 오래된 가문에는 견직물이 전승된다. 현존하는 에조치 면의 과반수가 아오모리 현 내에 소장되어 있다. 오래된 것은 쑤저우의 관립직물공장에서 1770~1778년에 제작되었다는 직인이 찍혀 있다. 소장자들은 대체로 환동해를 정기적으로 운행하던 기타마에부네 선박을 운용하거나 어업을 했던 경영자 등 홋카이도와 연관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산단 교역에 마쓰마에 번 같은 일본 북방의 번들이 적극 개입했다고 하여 그 영향이 일본 본토까지 두루 퍼졌던 것은 아니며, 오늘의 일본 동북 지방에만 영향을 남겼음을 뜻한다.


▶ 아이누족이 증명하는 일본의 ‘작위성’


결론 삼아, 산단 무역의 바닷길은 일본 열도 내에 이른바 혼슈 중심의 역사 이외에 전혀 다른 북방문명권과의 교섭을 일관되게 추구하던 아이누 같은 이민족이 강력하게 존재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산단 무역길이 완전히 끊겼음은 아이누와 북방의 문명사적 젖줄이 단절되었음을 뜻하고, 이는 홋카이도가 일본령으로 완전히 복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많은 이들이 홋카이도를 찾는다. 드넓은 벌판에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밭을 바라보면서 청정한 홋카이도의 여름을 만끽한다. 그런데 그 꽃밭이 애초에 아이누인들이 누비던 삶의 공간이었고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애써 서양식을 강조하는 하코다테와 오타루의 양풍 건물과 왜식 건물의 조화 속에 아이누의 건물은 오로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그 아이누들이 사할린 및 쿠릴 열도의 아이누들과 하나의 언어권으로 소통했고 타타르 해협을 통해 말갈족·여진족 등으로 불리던 북방민족과 소통했음을 생각해볼 일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강조하는 국민국가적 혼연일체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만들어진 개념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남방 해양 루트로서의 오키나와 및 류큐국, 북방 해양 루르로서의 홋카이도 및 아이누족은 그 존재만으로도 일본 열도의 ‘만들어진 작위성’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52&dable=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