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돈 대신 말린 해삼 받습니다

개마두리 2016. 2. 7. 00:38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서 말린 해삼은 통화정책과 물가정책의 주요 수단이었다.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해삼을 수집했다.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 역시 해삼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 해삼이 으뜸이었다.


-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의 글


- 날짜 : 2015.06.03.


- <시사 IN live>에 실린 글

 
‘인삼과 산삼 위에 해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삼은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피동물인 해삼은 그 종류가 많아서 무려 1100여 종이 확인되고 있다. 해삼은 세계 모든 바다에서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얕은 바다에 산다.


한국인들은 해삼을 날로 먹는 방식을 선호한다. 해삼이 싸고 흔했던 1970년대까지는 길거리에서 해삼과 멍게를 잔술과 함께 팔았다. 멍게 · 해삼은 이래저래 술안주의 대명사다. 중국인들은 말린 해삼을 선호한다. 유통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린 해삼을 오래 조리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중국 요리에서 해삼이 빠지면 요리가 성립될까 싶다. 중국인의 엄청난 식탐이 해삼에 걸려 있으니 중국 곳곳에 해삼 판매소가 즐비하고, 전 세계에서 해삼을 수집한다. 중국의 해삼 수입 역사는 그야말로 ‘태곳적’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해삼 하면 동해 해삼이 으뜸이었다. 북방에서 환동해는 중요한 해삼 서식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분석한 아키미치 도모야(秋道智彌)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 동해안은 모두 중요한 해삼 서식지이며, 일본 환동해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해삼위(海蔘威)가 된 것도 전적으로 해삼 수집소에서 유래한다.

 
이래저래 환동해는 해삼의 길이기도 했다. 청나라 조정은 벼슬아치를 변방에 보내어 해삼 구입을 독려했고 해삼 장사꾼은 동해 해삼으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해삼 무역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진상/공무역뿐 아니라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잠상(潛商)이 혼재되었다. 해삼을 채취해 말려서 바쳐야 했던 어민들의 실질적 고통이 짐작된다. 실제로 기록에는 환동해 어민들의 무한 고통이 곳곳에 등장한다. <만기요람>(1808)에는 “별사방물(別使方物)을 보면 사은(謝恩)에 황제에게 대구 200마리·해삼 200근·홍합 200근·다시마 200근·광어 100마리를 바친다”라는 대목이 있다.


사신을 통한 공무역으로는 양이 부족하므로 중국과 거래하는 개시(開市)가 마련된다. 중강개시(中江開市)에서 거래된 공식 매매 총수에 다시마 1만5795근, 해삼 2200근, 소금 310석이 등장한다. 말린 해삼 2200근이면 상당한 양이다.


함경도 회령개시, 경원개시와 더불어 압록강변의 중강개시는 명나라로 들어가는 물자의 통로 구실을 했는데, 후금의 요구로 다시 개설되었다. 개시에 내보내는 물자는 국가에서 엄격히 통제했다. 개시에 내보낼 해삼 문제로 비변사에 보낸 함경감사 성수묵의 장계를 보자.


“실로 바닷가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막이 되고 있습니다. …개시(開市) 있는 고을의 해삼에 대한 행정이 포민(浦民)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되지만 개시에 관한 정례와 관계되고, 또 바닷가 가호의 신역(身役)이 되기 때문에 변통을 하지 않고 어물어물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중국인들은 개시에서 해삼 가격을 싸게 후려쳤다. 함경도 해삼은 두말할 것 없이 동해변에서 채집되었을 것이다. 해삼을 채취한 후 건조·가공해서 내보내는 어민의 고통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해삼 수요가 간절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연행무역에서 의주부 수검소의 수출입품 목록을 보면, 수출은 담배·해삼·홍삼, 수입은 모자·수은 등이 주력품이었다.


사신을 통한 무역이나 개시 무역에서만 해삼이 거래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모든 무역선은 해삼을 필수적인 거래 품목에 올려두었고, 상품성 있는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조선 해안에 직접 출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되는 해산물은 국제적인 무단 어업, 난폭 어업을 유발하는 대상이다.


중국은 일본에서도 해삼을 수입했다. 일본 쪽 환동해의 해삼은 전량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후반기인 1695년께부터 말린 해삼은 막부의 통화정책, 물가정책의 중요 수단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일본은 금과 은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생사·견직물을 구입했다. 그런데 금과 은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구리로 바꾸었지만 이 역시 부족했다. 금·은·동은 수출상품인 동시에 통화였다.


부족한 구리 대신 새롭게 개발된 교환 상품이 ‘다와라모노’라 부르는 표물(俵物)이었다. 해산물을 모두 가나미(俵)에 넣었기에 표물이라 부른 것이다. 표물은 건해삼/상어지느러미/말린 오징어/조각난 전복/말린 새우/우무/말린 가다랑어/쪄서 말린 정어리 등이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이리코, 즉 해삼이다.


에도 막부가 새로운 수출상품으로 해삼 생산을 독려하기 시작했던 1744년, 나가사키에서 수출된 해삼 총량은 31만7000근(약 190t)이었다. 막부의 요청에 가장 잘 부응한 곳은 다섯 군데 해역이었다. 기타큐슈, 세노 내해, 노토를 중심으로 한 동해, 이세시마, 홋카이도. 생산량을 살펴보면 환동해 권역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리코는 고대부터 조공, 진상물, 신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이리코를 귀인에게 주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고대 관습은 중세부터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해삼 창자로 담근 젓갈을 필두로 이리코 진상이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 해삼이 싱가포르 국부를 떠받쳤다고?


한편 중국인들은 환동해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해삼을 수집했다. 원주민에게 해삼 건조기술을 가르치면서 양질의 해삼을 구하고자 했으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아보리진(Aborigine)에게서도 해삼을 구했다.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에 앞서 중국의 해삼 장사꾼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부터 다량의 해삼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중국에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으로 퍼져나간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이 해삼이었다.


중국인의 요구에 따라 형성된 세계 해삼 루트에서 북방의 해삼 집결지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간사이의 오사카, 개항장이자 대외 출구였던 나가사키에 포진되었다. 중국 본토는 베이징, 톈진, 푸저우, 광저우, 홍콩 등이 주요 거점이었으나 중소 도시에도 해삼 집결지가 산재했다. 중국인이 사는 곳마다 해삼은 필수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 재래시장은 과거에 남방 해삼이 흘러들어 오는 집결지였으며, 현재도 사정은 변하지 않아 남방의 말린 해삼이 흘러들어 오고 있다. 남방 해삼 집결지는 싱가포르, 마닐라 등이었다. 마닐라에는 일찍부터 화교 사회가 존재했고 이들은 묵묵히 해삼을 수집해 광둥으로 보냈다. 싱가포르가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싱가포르 국부를 떠받치는 중요 요소에 해삼이 숨어 있음은 덜 알려져 있다.


중국 옌볜 훈춘 시장에 나가보니 북한에서 들어온 해삼들이 즐비했다. 말린 해삼 작은 봉지에 기십만원을 호가하니 너무 비싸서 그만 들었다 놓고 말았다. 북방으로부터 남방에 이르기까지 해삼을 먹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식욕이 불러일으킨 ‘해삼 루트’가 곳곳에 만들어지면서 100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396&dable=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