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네시안이 태평양으로 나아갔던 대항해의 역사는 인류 역사상 중요한 진보 중 하나이다. 이들은 동쪽으로 진출하며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갔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향해 카누를 저어나가면서.
-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의 글
- 날짜 : 2015.07.21.
- <시사 IN live>에 실린 글
태평양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바다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태평양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 내내 태평양을 통과하지만 그 밑 바다에는 무심한 채 한국과 미국의 관계만 생각한다. 우리가 속한 태평양에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그저 ‘남의 동네’ 이야기다.
태평양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 아시아계이며, 아시아인이 태평양으로 나아갔던 대항해의 역사야말로 인류 역사상 중요한 진보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태평양을 말할 때, 기초 지식부터 재정리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태평양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발명품’으로 간주된다. 유럽인이 광활한 대양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네들은 발견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 관념적인 틀이 필요했다. 태평양이라는 명칭도, 태평양 문화권이라는 구분도 다 서구의 발명품이다. ‘태평양 지역’(Pacific Region)과 ‘태평양 사람들’(Pacific Islanders)이라는 개념조차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산물이다.
작은 섬들이 모였다 하여 미크로네시아, 검은 이들이 산다 하여 멜라네시아, 섬이 많다 하여 폴리네시아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 이들 삼분법은 여전히 변덕스럽기도 하고 모호하다. 3개 문화 영역은 유럽인에게 편리한 관점일 뿐이지만 일단 이름이 붙여지자 리얼리티로 받아들여졌고, 지명의 정치(Politics of Naming)는 오늘의 태평양을 규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치다.
호놀룰루 항 9번 부두의 ‘하와이 해양박물관’은 해양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역사 및 생활사에 집중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2중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는 원주민 선조들의 영웅적 활약이 장대한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그마가 분출하는 화산을 향해 폴리네시안들이 전진하는 그림은 상상이 아니라 선조가 겪었던 화산 폭발 목격담을 재현한 것이다. 긴 항해 끝에 이름 모를 섬에 닿고, 그 섬의 엄청난 화산 폭발을 목격한 선주민의 경험은 신화를 통해 구술 역사로 전해진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폴리네시안의 위대한 대항해는 기원전 1500년대 무렵, 동남아시아 라피타 문화를 향유하던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출발해 뉴기니 동쪽 해안을 따라 최초의 여행에 나선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태평양 카누와 동남아시아 카누는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다. 카누 전통은 라피타 문명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였음을 시사한다. 타이 수도 방콕의 왕립선박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카누들이 폴리네시아 곳곳에서 발견된다.
폴리네시안들은 멜라네시아의 섬들을 점령한 다음 동쪽으로 진출한다. 400~600㎞ 이상을 건너 통가와 사모아 제도에 정착한다. 라피타 도자 문화를 추적한 결과 동쪽으로 피지에 이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피지에는 후기 폴리네시안과 멜라네시안 조상이 뒤섞인 채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폴리네시안들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서 당시에는 무인도이던 사모아 제도와 통가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발굴된 도자기는 3000여 년 된 것들이다. 이곳이 ‘폴리네시안의 요람’ 같은 곳이며, 아마도 후기 폴리네시안들이 탄 카누가 몇 척 더 당도했을 것이다. 사모아·통가 등에서 다시 소시에테 제도까지 1800㎞를 가로질렀다. 이로부터 타이티·마르키즈를 거쳐 하와이에 이르는 고단한 행로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하와이 선조들이 전해온 타히티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테네는 다시 카누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대를 이어 항해했고, 또 대를 이어 항해를 계속했다! 그들은 동쪽에 있는 심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서쪽에 있는 심연에 다다랐다. 그들은 험한 조류가 흐르는 지역과 경쾌한 산들바람이 이는 지역을 건넜다. 카누는 해류에 밀려 이리저리 떠다녔다.”
▶ 생존 가능한 모든 섬에 정착하다
침묵의 바다인 적도의 무풍대를 거치면서, 거친 바다와 폭풍우를 용감하게 헤치며 폴리네시안들은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지속적으로 풀어나갔다. 폴리네시안은 언제나 동쪽으로 전진했다. 그것은 바람과 조류와 정반대 방향으로 항해했음을 의미한다. 1년에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때가 있음을 선사인들은 일찍이 간파했다. 태양과 별, 구름과 바람, 조류와 새들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항해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폴리네시안들의 대항해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산과 전파의 과정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는 그 자체가 장대한 서사시였다. 태평양 곳곳으로 뻗어나가 결과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모든 섬에 사람들이 정착했다. 이런 일은 아무 곳에서나 벌어질 수 없으며, 오직 해양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중 카누는 선체 2개를 하나의 함교로 연결하고 돛과 든든한 피신처를 갖춘 요새였다. 카누는 ‘우주선’이었다. 돌도끼 같은 석기 도구나 뼈·조개 등을 이용해 건조된 카누는 어느 문명권에서 만든 배보다 견고하고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유럽인들이 처음 태평양 섬을 방문했을 때, 더 이상 이런 거대한 2중 카누는 없었다. 대항해 시대가 끝난 다음이라 400㎞ 내외의 연근 제도와 내왕하는 일상적 카누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카누는 대항해자들에게 생명의 근거지이며, 역사의 추동력이다. 크다고는 하지만 대양에서는 일엽편주만도 못한 이 자그마한 카누로 대양을 누볐다는 사실이 경외롭다. 목적지도 불분명한 조건에서 그네들은 대항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신들은 폴리네시안들의 항해에서 신뢰할 만한 마지막 보루였다. 바다의 영혼인 탕가로아의 아이들, 그리고 자연의 영혼인 타네·투·롱고 등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그네들은 신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관통하는 모험에 나섰다. 밤에는 소라나팔로 신호를 보내 배들을 모이게 하고 북쪽의 별을 보면서 강력한 북서무역풍을 업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네들이 크기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군도에 당도하였을 때, 태평양의 새로운 역사가 열렸다.
이들 폴리네시안은 누구인가. 그들의 언어와 그들이 기른 동물, 그리고 키운 작물은 그네들의 기원이 동남아시아임을 말해준다. 동남아시아에서 어떤 강력한 외부 집단에 의하여 밀려나게 된 이들이 지금 인도네시아라 부르는 섬들을 통하여 바다로 바다로 동진을 거듭한 후 1차로 멜라네시아에 당도한다.
멜라네시아에는 그네들이 당도하기 전부터 검은 피부의 선주민이 살고 있었다. 뉴기니의 주민 거주는 무려 3만 년 이상 되었다. 뒤늦게 찾아들어온 이들을 학술상 ‘후기 폴리네시안’(Proto Polynesians)이라 부른다. 태평양 너른 바다 고립무원의 섬에 격리된 채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살면서 후기 폴리네시안의 종족 분화가 이루어진다. 일부는 북쪽 항로를 택하여 미크로네시아로 알려진 자잘한 섬들로 이주한 후 오늘날 미크로네시아 원주민의 조상이 된다. 다른 일부는 뉴기니 북쪽에서 흩어져 살거나 멜라네시아의 많은 섬으로 항해하여 정착한다.
▶ 폴리네시안의 기착지, 하와이
쿡 선장과 타히티인의 일화는 왜 이들이 같은 폴리네시안인지를 잘 말해준다. 통역으로 데리고 간 타히티인이 멀리 떨어진 마르키즈 사람들과 그런대로 대화가 가능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머나먼 이스터 섬, 타이티 섬과 하와이 섬 사이에도 어렵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러한 언어적 계보, 나아가 외모가 풍겨주는 인종상의 일치점이 같은 폴리네시안임을 말해준다. 대항해 이래로 너무도 먼 섬에서 오랫동안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언어나 풍습에서 공통된 문화적 원형질을 간직했다.
항로를 다시 보자. 동남아시아에서 필리핀을 거쳐 오늘날의 미크로네시아로 가는 항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뉴기니 북단을 거쳐서 피지와 통가에 이르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네들 일부는 북상하여 미크로네시아로 올라갔을 것이다. 사모아와 통가가 ‘폴리네시안의 요람’이라 불리는 것은 이 같은 인종 전파의 중간 길목이자 폴리네시안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모아와 통가에서 타이티와 마르키즈 제도로 나아가는 길이 확인된다. 타이티와 마르키즈에서 하와이로 가는 길을 폴리네시안이 개척하였으며, 아래로 나아가 뉴질랜드에 이르는 남쪽 길도 개척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동쪽으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까운 이스터 섬(원주민이 부른 정확한 이름은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을 지닌 ‘라파누이’ 섬 - 옮긴이)에 이르는 고단한 길이다.
남태평양에서 하와이로 가자면 3개의 전혀 다른 해류를 거쳐야 하며 바람의 방향도 다르다. 따라서 그네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분명히 알고도 북상을 거듭해 마침내 하와이를 발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스터 섬으로 가는 길은 동풍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스터 섬을 넘어서면 바람과 조류가 북동쪽으로 커다란 구비를 그리며 카누를 페루에 닿게 하였을 것이다.
폴리네시안들은 언제나 새로운 거주지를 발견하고 건설했다. 그네들은 서쪽에 있는 원초적인 고향의 고대적 추억을 실어 날랐다. 사모아에서 ‘하바키키’(Havaiki)란 서쪽으로라는 뜻이다. 그네들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서쪽 끝의 섬에서 뛰어오르며 조상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하와이에 닿은 폴리네시안들은 대단히 실용적이었던 것 같다. 그네들은 바다와 땅을 두루 이용할 줄 알았다.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주어진 에코시스템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마르키즈와 타이티에서 출발할 때, 생존에 필요한 돼지와 얌·타로·바나나·빵나무 등 곡식과 동물을 가지고 왔다. 해안에 정착하여 숲을 태워 화전을 일구었으며, 물줄기를 조절해 관개시설을 만들고 거대한 물고기잡이 못을 조성했다.
서구가 하와이를 발견(사실은 ‘도착’ - 옮긴이)한 지는 250년도 되지 않았다.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1778년에 하와이에 당도했다. 인류사로 치자면 지극히 짧은 세월이다. 불과 200여 년 조금 넘는 사이에 하와이는 폴리네시안의 기착지에서 아메리카 합중국의 일원이 되었다.
휴가차 하와이로 떠나는 이들은 미국 시민 이전의 하와이 선주민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83&dable=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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