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미친 개’의 시대에 응답하라

개마두리 2016. 3. 25. 19:43


- <뉴스분석 왜?> : ‘응팔’ 신드롬 유감


▶ <응답하라 1988>(응팔)의 열풍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제작과 관련한 후일담(後日譚. 순우리말로는 ‘뒷이야기’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이 끊이지 않고, 서울 쌍문동은 노스탤지어(Nostalgia. 순우리말로는 ‘그리움’ - 옮긴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되살아났다 - 옮긴이).


1997, 1994, 1988 등 세 편이 나온 ‘응답하라 시리즈’는 구제금융(IMF) 이후 무한경쟁 체제에서 힘겹게 사는 우리들에게 평화와 풍요의 벨에포크(Belle époque. 프랑스 말로 “좋은 시대”라는 뜻. 일시적으로는 ‘지난 과거의 좋았던 때’를 일컫는다 - 옮긴이)를 소환한(불러온 - 옮긴이) 듯하다.


그런데 1980~90년대는 ‘좋은 시대’이기만 했던가. ‘쌍문동 5인방’과 동시대(같은 시대 - 옮긴이)를 통과했으나, (그 시절을 - 옮긴이) 마냥 추억할 수만은 없는 이가 글을 보내왔다. 응팔과 다른 에피소드(그리고 연속극이 다루지 않은 서기 1988년 한국사회의 참모습 - 옮긴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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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엔(tvN)의 드라마(연속극 - 옮긴이)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최고 시청률 21.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지난달(서기 2016년 1월 - 옮긴이) 막을 내렸다. 15일에는 작품의 배경인 서울 쌍문동(이 동네는 만화『아기공룡 둘리』에서, 주인공 둘리와 대립하는 고길동 씨가 사는 동네로 잘 알려진 동네다 - 옮긴이)에서 팬 사인회가 열리는 등 ‘응팔 신드롬’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2012년 <응답하라 1997>로 시작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응답하라 1994>에 이어 이번 <응팔>까지 세 편 모두 시청자들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가족드라마라는 설정이 늘 그렇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 - 옮긴이) 중(가운데 - 옮긴이) 악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악인들이 펼치는 사건이 아니니, 드라마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든 에피소드는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랬을까? 적어도 같은 시대(서기 1988년 ~ 서기 1997년 - 옮긴이)를 살아온 내 기억 속에서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주인공 덕선의 쌍팔년도(여기서는 서기 1988년을 일컫는 말이다. 8이라는 숫자가 두 개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그러나 원래 “지금 무슨 쌍팔년도 얘기하냐?”라는 말은 서기 1988년이 아니라, 서기 1955년, 그러니까 단기로는 4288년인 해를 일컫는 말이었다. “쌍팔년도 얘기”라는 말은 ‘오래 된/해묵은 때에나 통하던 고리타분한 얘기’나 ‘시대에 뒤떨어져 현실과 맞지 않는 얘기’라는 뜻으로 자주 쓰였다 - 옮긴이)보다 4년 전인 1984년, 나의 고교 시절도 녹슨 곤로나 전화번호부, 회수권 등 인기를 끈 응팔 소품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덕선의 시간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처절하기만 했다.


▶ 90m 달리기 + 매트리스


내가 살던 곳은 쌍문동 비슷한 서울의 변두리 중곡동이었다. 1970년대 서울 외곽지역 개발 붐을 타고 부모님은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 집 한 칸 장만하고자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돈 한 푼 없이 서울로 올라와 아끼는 것 말고는 돈 벌 구석이 없던 부모님은 버는 돈의 대부분을 집 장만에 쏟아 부었고, 본의 아니게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학교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중곡동을 감싸고 있던 용마산 중턱에 학교 하나가 들어서더니, 그 신흥학교에서 서울대를 한 해 60명 이상 보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모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자식이 그곳에 입학을 하고 (수업을 - 옮긴이) 열심히 쫓아가기만 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신 것이다.


신흥 명문고에 입학한 내가 진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이 좋아 신흥 명문이지, 성적이 조금 된다 싶으면 과는 아무 상관 없이 서울대라는 간판만을 위해 지원서를 써야 했다. 학생들의 꿈이나 적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서울대 ○○명 입학’이 학교를 지배했다. 물론 나는 서울대를 갈 만한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다. 나 정도의 학생은 신흥 재단의 부족한 재원을 채우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입학한 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담임선생님은 2/4분기 등록금을 내라고 했다.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학생은 물론 부모님조차 항의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가 말했다. 등록금 납부도 체벌로 해결하는, 학교 안 모든 문제를 군대식으로 다루는 그였다.


“등록금 이거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남자답게 내일 다 내도록!”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선생님, 등록금을 일찍 내는 것과 남자다운 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 친구에게 돌아온 것은 귀싸대기였다.


그렇게 미리 받아낸 등록금으로도 열악한 학교 시설은 개선되지 않았다. 가로세로도 아니고 ‘대각선’으로 최대로 벌려봐야 90m 밖에 나오지 않는 운동장은 커질 줄 몰랐고, 콘크리트 철골이 흉물스럽게 드러난 건물 측면에 덧붙여 새 건물을 짓는 소음만 교실을 울렸다. ‘여고’와 ‘외고’가 그렇게 생겼다.


놀라운 크기의 운동장에서는 희한한 방식으로 체력장이 열렸다. 100m 달리기를 해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매트리스 서너 장을 운동장 한쪽 구석에 세워두고, 학생들에게 90m 전력질주를 시킨 뒤 매트리스에 부딪히도록 ‘안전장치’를 해준 것이다. 그리고는 1초를 더해 100m 기록을 쟀다. 우리의 체력장 기록은 매트리스가 남긴 것이었다.


여고가 생긴 덕에 여학생들과의 에피소드가 있었을 거라고? <응팔>에서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서기 1984년에 남자 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 - 옮긴이)는 여고와 같은 교문을 사용함에도 등교시간을 달리해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당했다. (학교는 - 옮긴이) 그 좁은 운동장을 나누어 쓸 때도 남녀의 만남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런데 <응팔>에서는 여고의 수학여행에 가서 타 학교 남학생들이 대신 노래자랑을 나가더라.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당시 고교생들은 남녀의 만남이란 날라리들이나 하는 추접스러운 일이라고 배웠다.


▶ ‘자손’의 성추행


그 시대 학교에는 ‘미친개’라 불리는 교사들이 한 명씩은 있었다. 교사 폭력은 학교의 빈번한 일상이었다. 교사들은 학교를 군대로 아는지, 자기들이 하는 말에 무조건 복종을 강요했다. 조금이라도 삐딱한 발언을 하는 학생은 폭력으로 응징했다.


그나마 말이라도 하고 얻어맞으면 덜 억울했다. 국어를 담당한 ‘미친개’의 일화다. 수업이 시작되자, 갑자기 발로 문을 ‘꽝!’차고 들어온 그는 문 바로 옆에 앉은 학생에게 “대! 이 새끼야!”하고는 시작해 우리 반 전체 학생들의 뺨을 때리며 교실을 돌았다. 교실 구석에 앉은 마지막 학생의 뺨을 기필코 다 때리고는, 시계를 보며 “이 새끼들 빨리빨리 대야지. 기록을 못 깼잖아!”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우리의 선생님들이었다.


대걸레 자루나 당구장 큐대로 허벅지 때리기, 스테인레스로 된 분필꽂이로 머리 찍기 등 실로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때려댔고, 우리는 맞았다. 어떤 선생은 발로 얼굴을 차기까지 했다. 그나마 신발을 벗고 양말 신은 발로 때려 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생들이 자기가 때리기도 귀찮을 때, 서로에게 때리도록 강요한 일이었다. 이런 폭력이 당시 학교에서는 일상이었다.


<응팔>의 학주(‘학생 주임’을 줄인 말 - 옮긴이)처럼 몇 마디 훈시하고 학생을 보낸다고? 그건 촌지를 거부하며 학교 현장에 새 바람을 일으킨 교사들이 주축이 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하고, 교사 폭력이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나마 실릴 수 있었던 한참 뒤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남학교에서도 성추행은 자행됐다. 이런 일에 체육 선생이 빠질 리가 없다. 그의 별명은 ‘자손’이었다. 한창 왕성하던 우리의 성기를 집중해서 만지기에 ‘남자 성기를 만지는 손’이라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체육 수업은 준비체조로 시작됐다. 그중 허리운동이 있는데, (‘자손’은 - 옮긴이) 앞으로 숙이는 동작 바로 다음에 양손을 허리에 대고 뒤로 허리를 젖히는 순간을 기다려 “동작 그만!”하고는 갑자기 우리들의 성기를 ‘철퍼덕철퍼덕’ 만져댔다. 그러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다음 동작을 시켰다.


같은 재단의 중학교를 다닐 적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이 들어와 미술 시간만의 반장과 부반장을 뽑아야 한다고 훈시하더니, 1번부터 순서대로 10명씩 교단에 서게 했다. 그러더니 선생이 우리의 성기를 한 명씩 만지고는 성기가 큰 상위(?) 두 명을 본선에 진출시켰다. 총 70명 중 본선에 오른 14명이 전반전과 후반전을 거쳐 최종 결선 진출자 5명으로 뽑혔고, 그중 2명이 선발되어 가장 큰 학생이 반장, 그 다음 학생이 부반장을 맡았다.


그 뒤 미술 시간이 시작될 때 인사는 성기가 가장 크다고 인정받은 반장이 구령을 외쳤고, 마치는 시간에는 부반장이 했다. 당시 우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몰랐다. 서로 키득대기만 했을 뿐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했지만, 내가 살았던 응팔의 시대는 폭력과 비리, 성추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나의 과거에만 존재하던 일이라고? 아니다. 필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고개 끄덕이는 이가 있을 것이고, 사회에서 만난 내 또래의 사람들도 이런 일화에 공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한때 나의 모교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상문고를 모델로 한 영화 <두사부일체>와 <말죽거리 잔혹사>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공감했을까? 학교의 비리와 폭력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당한 일상에 대해 우리는, 또 우리의 부모님은 왜 변변한 항의조차 못 했을까? 간단하다. 자신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나마 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성공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어린 시절의 황금기는 그렇게 빼앗겨버린 채 지금은 또다시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삶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응팔>을 보며 당시를 그리워하고 열광하며 환호할까? <응팔>의 주제곡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어 좋게 포장한 것만 남겨지도록 자위하는 것일까?


물론 <응팔>이 다루고자 하는 소재는 폭력도, 비리도, 성추행도 아니다. 그렇다고 1980년대를 소환한다고 하면서 당시 우리를 지배했던 이런 부분을 이토록 철저히 무시해도 되는가? 배우들이 입었던 옷과, 유행하던 가요 테이프 등의 사소한 소품들과, 자판기의 커피와 우유를 섞어 먹었던 일상의 디테일(세부사항 - 옮긴이)로만 그 시대를 채우고선 <응팔>은 또 다른 판타지(환상 - 옮긴이)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우리 과거의 전부인 양 최면을 걸어버렸다.

 
▶ 기억의 정치학 : 판타지의 반대편


판타지로 채워진 <응팔>에는 폭력과 비리가 잉태해 체제의 공범으로 성장한 우리의 어두운 욕망이 숨쉬고 있다. <응팔>의 주인공 중 누구 하나 인생의 낙오자는 없다. ‘쌍문동 5인방’ 중에 성공 못한 친구가 없다. 성공에 관심조차 없던 덕선은 많은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스튜어디스(여성 승무원 - 옮긴이)가 되었고,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바둑기사를 남편으로 둔 덕에 신분 상승마저 이뤘다. 심지어 공부를 못한 도롱뇽마저 일찌감치 사업을 일으켜 세웠으니, 누구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모두 다 ‘성공 신화’를 이룬 것이다.


오늘날 ‘성공한다.’는 것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달콤한 형용사가 아니다. 보기 좋은 직장을 갖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건강에 안 좋아도 설탕과 화학조미료를 써서 맛만 있고, 손님이 많이 들어 돈을 벌게 해주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돈은 당시의 선생들처럼 직접적인 위해를 우리들에게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하도록 이끌었다. (<응팔>을 만든 사람들은 - 옮긴이) 이 참혹한 현실을 아무런 비판 없이 좋은 면만 과장해 소환해서는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원래 드라마란 그렇게 소비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음험한 의도가 무방비 상태의 무의식을 잡아먹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맞은 사람이 폭력을 배운다고 했다. 당시의 폭력과 비리와 성추행의 소용돌이에서 살아온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동일한(똑같은 - 옮긴이) 일을 자행해왔다(저질렀다 - 옮긴이) 무협지 같은 학교를 지배하던 교사들도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미친개’의 시대는 한 번도 청산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내 속에서 저것들을 떼내기 위해 얼마나 의식적인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 옮긴이) <응팔>의 주인공처럼 사는 걸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나? (라고 물어볼 것이다 - 옮긴이) 맞다. 하지만 그런 꿈조차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고,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러시안룰렛으로 이끄는 자본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가 먼저 멈춰야 할 때다.


<응팔>을 홍보하는 티브이엔 누리집에 가 보면,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입니까?”라고 묻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기억되어야 한다. 어차피 드라마는 소비되어야 하고, 소비자의 욕망을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응팔의 방식은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는 - 옮긴이) 성공한 사람도 있고 낙오한 사람도 있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풍경도 있고, ‘자손’에게 당한 것처럼 숨기고 싶은 굴욕의 기억도 있다. 모든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체제의 공범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 나올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질곡의 세월을 살아내면서도 돈과 성공으로 합리화되지 않는 그런 인물이 한 명쯤은 나왔으면 한다. 우리의 세상이 그나마 살 만하고 조금이나마 바뀌어왔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와 사람이 보고 싶다.


- 박성호(영화제작자/목사)의 글


-『한겨레』서기 2016년 2월 13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