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여인은 도(道)를 배워도 별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한 답변

개마두리 2017. 1. 30. 14:17

“어제 내려주신 거룩한 가르침에는 부녀자의 소견(所見.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 옮긴이)은 좁아서 도를 배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지요! 옳은 말씀이고 말구요! 무릇 부녀자들은 (집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이 없는 데 반해 남자들은 뽕나무 활이나 쑥대 화살을 들고서라도 사방으로 나돌기 때문에 그 소견에 우열이 있을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짧은 견식은 보는 바가 안방 문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고, 원대한 견식(見識 : 견문과 학식 - 옮긴이)은 환하고도 넓은 벌판에서 깊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견식이 짧은 사람은 겨우 백 년 안쪽의 일만 볼 뿐이어서 어떤 이는 아들이나 손자 정도에 접근하고, 또 어떤 이는 겨우 자기 한 몸에 그칠 따름입니다. 원대한 식견(識見 : 견식과 같은 말. 학식과 견문, 즉 사물을 가려서 볼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임 - 옮긴이)이란 육체를 초월하고, 생사의 껍데기를 벗어던졌으며, 백/천/만/억겁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선 비유의 영역일 따름입니다.


견식이 짧은 사람은 그저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시정잡배의 유치한 말이나 들을 뿐이지만, 견식이 원대하면 덕이 높은 대인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이 승복하고 성인의 말씀은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며 특히 속세 사람들의 호불호(好不好 : 좋음과 좋지 않음)를 따지는 입방아 따위에 흔들리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견식의 길고 짧음을 논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고 부녀자의 견식이 짧다고 단정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남녀(男女)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견식에 남녀가 있다는 말이야 어찌 가당(可當 : 이치에 맞다고 할 수 있음 - 옮긴이)하겠습니까?


견식에 길고 짧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아도, 남자의 견식은 하나같이 길고 여자의 견식은 하나같이 짧다는 말이 또 어떻게 가당하겠습니까?”


― 이지(李贄)의 책『분서(焚書)』에 실린 글


* 옮긴이(잉걸)의 말 :


그러니까 이지 선생의 말씀은 여성을 집안에 가두어 두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현실을 보아야지, 무작정 ‘여자는 속이 좁고 멍청하고 아는 게 없다. 멀리 보지 못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여성이 선천적으로 학습 능력이나 판단력이 떨어지고 남성보다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지 선생이 이 글을 정리할 때(서기 1590년)에는 중국에서 남성 우월주의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지 선생은 그런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의 글을 읽고 그에 반박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이 글은 427년 전의 명나라 사회를 비판한 글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남성 우월주의자들에게도 써먹을 수 있는 글이고,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나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나 중남미의 남성 우월주의자들에게도 써먹을 수 있는 글이다.


* 이지 :


호 탁오. 명나라의 지식인이다. 유가(儒家)에 대한 법가(法家)의 우위를 주장하고 당시 지식인들이 깎아내리던 소설이나 희곡 같은 통속 문학을 긍정했으며, 공구(공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역사서를 풀이한『사서평』을 썼고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버림받았던『묵자(墨子)』를 재조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