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모순들

선 넘는 외국어, 여기가 대한민‘쿡’인가요?

개마두리 2022. 9. 18. 00:39

- 『 경향신문 』 서기 2022년 양력 9월 17일자 기사

- 김지윤 기자

■ 온통 영어로만 쓰인 카페 메뉴판

‘M.S.G.R’. 올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소개되며 누리꾼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펼쳐진 화제의 메뉴다. 온통 영어로만 쓰여 있는 카페 메뉴판에 대문자로 표기된 이 음료의 정체는 미숫가루. 실제 판매 중인 이 음료를 두고 “신선한 아이디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주문도 영어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비꼬거나 “영어가 공용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등 부정적인 댓글로 응수했다.

외국어(특히, 영어! - 옮긴이)가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 세계화의 흐름에 외국어를 외면할 수는 없지만 불필요한 상황에서도 과도하게 사용되는 남용의 사례는 또 다른 문제다. 한국어로 표기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애써 외국어로 치환하려 하는 ‘선을 넘은’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굳어지고 있다. 강남, 홍대, 성수동 등 젊은 세대의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영어로 표기된 간판과 메뉴판을 사용하는 상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하다는 식당에 방문한 조윤수씨는 “온통 영어로 표기된 메뉴판을 보는 순간 해외여행을 온 줄 알았다”고 말했다. 기묘한 불편함이 들던 찰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한국어 ‘1인 1메뉴’였다. 조씨는 “디자인 욕망을 뛰어넘지 못한 생계형 안내 같아 헛웃음이 났다”고 회상했다.

이 상황이 불편한 것은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캐나다인 알렉스는 “한 번은 빵을 사러 갔다가 빵 바구니에 꽂힌 성분 안내 팻말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영어와 혼재돼 국적을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적힌 문장을 보고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더라. 대체 누구를 위한 팻말이었을까”라며 반문했다. 영어학원 강사인 미국인 실비아는 “한국의 아파트 이름은 신기하다. 마치 사전에서 ‘좋은 의미’를 검색해 연결해 둔 기차 같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카페 개업을 준비 중인 최은정씨는 “한글의 아름다움이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운을 뗐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순우리말 상호명을 후보에 올려두고 고심 중이다. 최씨는 “인스타그램이 홍보의 수단인 만큼 간판이나 메뉴판이 예쁠수록 입소문이 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호의 가장 큰 목적은 정보 제공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 아더 컬러 굿 초이스 하세요

영역을 넓히면 그 심각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가을옷을 장만하기 위해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한 하은경씨는 “첫 화면부터 한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직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원 마일 룩’ ‘얼리 포 컬렉션’ ‘투턱 슬랙스’ 등의 분류도 낯설었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제품 설명 밑에 적힌 “실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바잉’해온 아이랍니다” “니즈에 따라 준비된 ‘아더 컬러’와도 잘 매치됩니다” “굿 초이스 하세요” 식의 표현이었다.

대형마트도 마찬가지다. ‘그로서리’ ‘베지터블’ ‘미트’ 등 각 구역을 설명하는 단어들에는 어김없이 영어가 등장한다. 한국어 병행 표기가 있으면 그나마 양반이다. 한 대형마트에서는 문구매장을 ‘stationery’라고 표시했다 뭇매를 맞았다. 마트 측은 “장난감 테마파크 콘셉트로 만든 공간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영문 안내판을 사용했다”고 해명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최근 지어진 아파트에는 ‘맘스테이션’(정류장),  ‘시니어클럽’(경로당), ‘라이브러리’(도서관), ‘리사이클’(분리배출) 등 영문 안내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문 공간 안내 설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두 아이의 엄마인 공지원씨는 “아이들이 유치원·학원 버스를 타는 공간에 붙여진 이름이 ‘맘(mom)스테이션’이더라. 아이의 양육이 오롯이 엄마에게 한정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면서 “디자인에 치중한 나머지 단어의 의미까지 염두에 두지 못한 한계가 아니겠냐”고 비판했다. 

공씨가 거주하는 아파트에는 ‘맘스테이션’ 외에도 ‘시니어클럽’(경로당), ‘라이브러리’(도서관), ‘리사이클’(분리배출) 등의 안내 표지가 있다. 한글 병행 표기가 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단지 밖을 나서도 불편함은 이어진다. 동네 공원 및 산책로에 설치된 운동기구에는 ‘레그프레스’ ‘체스트 프레스 머신’ ‘스텝 사이클’ 등과 같은 영어 단어들이 쓰여 있다.

대체 외국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이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0년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41.2%)였다. 이어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 있어 보이기 때문’(22.9%)과 ‘우리말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기 때문’(15.7%)이라는 의견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민병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외국어를 국어와 섞어 쓰거나 남용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익숙해서’ ‘별 문제의식 없이’ ‘외집단과의 차별화를 위해’에 해당한다면 자신의 언어 정체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민 교수는 “다듬어진 우리말을 쓰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 사용자로서 자신의 품격을 지키는 일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의 사람에 대한 협력과 배려의 자세를 의미한다. 나아가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언어를 매개로 통합하는 사회적 기능을 한다”고 설명했다. 

적절한 대응어를 떠올릴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쓰는 경우는 관련 대응어를 제공하는 국립국어원 등의 온라인 사전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응어 자체가 없는 경우 대응 순화어를 요청할 수도 있다.

■ 외국어 남용, 소통 부재로 이어질지도

이미 굳어져 익숙해진 표현을 굳이 우리말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외국어의 남용이 자칫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 불공정과 차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문화연대가 국민 1만107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외래어·외국어에 대한 국민 이해도 조사’에 따르면 총 3500개의 단어 중 70세 이상 연령대에서 60% 이상 이해한 단어는 256개, 7.3%에 불과했다. 국립국어원의 자료에 따르면 특히 ‘큐알코드’ ‘팝업창’과 같은 정보통신 관련 용어의 이해도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한미혜씨는 “의사소통의 단절은 세대 간 갈등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외래어 사용이 지적 우월함으로 포장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기지 한글학회 연구편찬실장 역시 “모든 국민이 외국어에 능숙하지 않고, 또 능숙해야 할 의무도 없다”면서 “그런데 외국어가 지속적으로 남용되면 급기야 외국어 능력에 따라 알 권리를 침해당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60대 후반의 홍혜자씨는 이번 추석 명절 식구들과 함께 동네 식당을 찾았다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홍씨는 “‘키오스크’라는 신문물 앞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감이 들었고 도통 이해하기 힘든 (외국어) 메뉴들 속에서 먹고 싶은 음료 하나 고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모르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읽지 못하는 대상이 ‘안전’과 직결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감염병 대유행을 뜻하는 ‘팬데믹’, 비대면을 의미하는 ‘언택트’, 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을 의미하는 ‘코로나블루’ 등 코로나19로 만들어진 신조어는 중장년층 중심의 정보 소외 계층에 또 다른 문턱이었다.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8월까지 중앙정부기관에서 낸 보도자료 1만1918건 가운데 5501건에서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이 확인됐다.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8월까지 중앙정부기관에서 낸 보도자료 1만1918건 가운데 5501건에서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공문서 등에 쓰는 공공 언어와 홍보 업무에 사용되는 외국어 남용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에 의거하면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8월까지 중앙정부기관에서 낸 보도자료 1만1918건 가운데 5501건에서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이 확인됐다. ‘가이드라인’ ‘거버넌스’ ‘아카이브’ 등이 대표적이다. 서은아 상명대 계당교양교육원 교수는 “오랫동안 공공 언어 사용 실태를 평가하고 연구해왔지만 공공기관이 발표하는 사업과 정책의 이름은 매년 낯설다”며 “‘Safety House 구축 사업’ ‘스마트팜 테스트베드 교육장’ ‘원도심 아프프리마켓’ ‘손愛손 Job Go’ 등 사업 뜻을 짐작하기 어렵거나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홍보 대행사에서 일하는 김유진씨도 “가끔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외국어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면서 “기업이나 브랜드에서 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술의 관점이 공공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관료사회다 보니 지금의 결과를 내는 데 급급해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다행인 것은 외국어 남용을 반대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여주시 세종대왕릉역, 수원시 광교중앙역 등 철도역 앞 도로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K&R(키스 앤 라이드)’ 표지판을 ‘임시정차구역’으로 바꾸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키스 앤 라이드’는 운전자는 내리지 않고 같이 타고 온 여행자만 환승을 위해 하차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헤어질 때 입을 맞추며 배웅하는 영어권 문화에서 유래했다.

‘친절한 메뉴판 만들기’에 동참한 사업자에게 전달한 ‘줸이 갔싸요’ 인증 안내판. 강릉 사투리로 ‘주인이 갔어요’, ‘문을 닫았다’를 의미한다. 엄은영씨 제공
‘친절한 메뉴판 만들기’에 동참한 사업자에게 전달한 ‘줸이 갔싸요’ 인증 안내판. 강릉 사투리로 ‘주인이 갔어요’, ‘문을 닫았다’를 의미한다. 엄은영씨 제공

직장인 엄은영씨 역시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기 때문”이라는 대세에 반기를 들었다. 엄씨는 지난 8월 강릉시 문화도시지원센터가 진행하는 시민 참여형 사업 ‘작당모의’를 통해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친절한 메뉴판 만들기’ 캠페인을 벌였다. 외국어가 아니어도 멋있는 메뉴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70대 어르신의 시선에서’ 음료를 주문한다는 가정으로 ‘프라프치노’ ‘브런치’ ‘시그니처’와 같은 메뉴를 우리말로 바꿔보는 온라인 이벤트도 진행했다. ‘골이 띵한 얼음 커피’ ‘늦게 일어나 사부작사부작 먹는 밥’ ‘주방장이 제일 잘하는 것’ 등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엄씨는 “우연히 마트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S·M·L이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이 계기였다. 누군가에겐 (소·중·대보다) 익숙한 표기가 누군가에게는 어려움이 될 수도 있구나 싶더라”며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소소하게 화두로 던지다 보면 언젠가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말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언어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진화하는 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냐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며 “언어는 자연과 같다. 먹이사슬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된다. 이미 권력이 돼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려고 하는 언어가 영어인데 이를 그대로 두면 결국 우리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

- 기사 원문 :

https://www.khan.co.kr/life/life-general/article/202209170600001

 

선 넘는 외국어, 여기가 대한민‘쿡’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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