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모순들

[근현대사]독립 영웅 후손, 남은 건 무거운 삶의 무게

개마두리 2024. 2. 20. 22:24

▶ 죽는 순간까지 당당했던 윤봉길 의사

(서기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상해[上海] - 옮긴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전승 행사장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나는 ‘투사’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가 던진 물통 폭탄으로 현장에 모여 있던 일본군 수뇌부가 괴멸한 것입니다. 자결용으로 추측되는 도시락 폭탄을 터뜨리기 전,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러니까 서기 1990년대에는 윤 투사가 “도시락 폭탄”을 근대 왜군 수뇌부에게 던졌다고 배웠다. 이 글을 읽으니, 내가 잘못된 교육을 받았음을 알겠다 – 옮긴이).

[덧붙이자면, 윤 투사가 폭탄을 던진 뒤, 그 자리에 몰려있던 수많은 왜인[倭人]들이 윤 투사를 두들겨 패고 욕을 퍼부어서, 윤 투사가 끌려갈 때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옷도 엉망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 옮긴이]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사형선고를 받은 후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같은 해 25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총살형으로 하늘의 별이 됩니다. 

(윤 투사는 – 옮긴이)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당한 것도 모자라서 돌아가신 후에도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는 길목에 묻혀 행인들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전 다짐처럼 윤봉길 의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죽는 순간까지 두려울 것이 단 하나도 없었던 영웅 중의 참 영웅이었습니다.

▶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남은 무거운 삶의 무게

윤봉길 의사께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둘째 아들은 아홉 살 때 복막염을 앓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은 첫째 아들 윤종 선생님은 일제 치하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에서 가장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주홍 글씨가 찍힌 채 일본인 교사들의 비난과 왕따를 견뎌야만 했습니다(이것은 자신의 나라를 남의 나라에 잃은 민족이 겪는 비극이다 - 옮긴이). 

하지만 윤종 선생님은 광복 후에도 윤봉길 의사의 이름 석 자에 누가 되지 않으려 애썼고, 자녀들에게도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팔아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없는 설움과 가난,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평생을 살다 가신 분으로 윤종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손녀인 윤선한(가명) 님은 어린 나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지만, 그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 마음속으로 늘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삶의 무게가 늘 그녀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 지금이라도 독립 영웅께 보답해야 할 때입니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보훈 급여가 없으면 독립유공자 후손 중 46.4%가 저소득층이 됩니다. 집과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거나 일찍이 가장의 부고를 겪었기에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며, 설령 벗어난다 해도 일부에 국한된 일일 뿐입니다

윤선한 님은 현재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가 어려운데, 폐와 기관지마저 약해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자주 염증이 생기고 힘든 상황입니다. 기침과 가래가 나오고 심하면 호흡이 곤란할 때도 있지만, 치료비가 부족해 병원 방문을 주저합니다. 

< 따뜻한 하루 >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독립유공자 다섯 분을 광복회, 윤봉길 기념사업회, 이봉창 기념사업회에서 추천받아 생계비를 지원하고 싶습니다. 과거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부디 지금이라도 독립 영웅께 보답할 수 있도록 해피빈 후원자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 원문 :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94080?redirectYN=N

 

독립 영웅 후손, 남은 건 무거운 삶의 무게

많은 독립 운동가 분들이 나라 위해 목숨 바쳤지만, 후손들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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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이 글이 소개하는 모금활동에 돈을 내고 온 사람으로서, 한 마디만 하겠다. 어쩌면 우리 한국인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독립전쟁을 치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일파(從日派. 왜국[日]을 [종처럼] 따르는[從] 사람들[派]. 이완용 같은 자들의 성향이나 행동을 평가할 때는 '왜국과 친하다'는 뜻인 '친일'이 아니라, 이 말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들이 서기 1945년 이후에도 처벌받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은 (원조 종일파와 그 후손/제자/후배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오히려 서기 1945년 이후에 태어나 왜국에 종일파로 포섭된 ‘한국인’들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 버린 교재를 군인들에게 나눠 주거나, 공개석상에서 “<일본(왜국)>이 과거의 일 때문에 계속 한국에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하고 떠들거나, “솔직히 말할게. 그때(근대)에 태어났으면, 나라도 친일(종일)했겠다!”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의 항일 민족주의자나 식민사관/신국사상/왜국의 제국주의/왜국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한국인들에게 “<반일>을 외치는, 사람 같지도 않는 것들(내가 한 달 전, 유튜브 게시판에서 실제로 접한 한 종일파의 댓글이다)”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3.1 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둔 나라 사람이자, 독립국가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니, 그 때문에라도 이런 종일파들과(나아가 이 종일파들을 만들어내고 적극 지지하는 왜국 정부/우익과) – 모금 활동이 되었건, 시위가 되었건, 투표가 되었건 가릴 것 없이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 맞서 싸우는 수밖에. 

나는 한인애국단 단원이신 이봉창 투사님과 윤봉길 투사님을 존경하며, 그 분들처럼 왜국 정부와 우익과 왕실에 맞서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평범한 왜인(倭人)이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며 나를 공격한다면,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를 공격할 것이며, 친일국가 출신 ‘사냥개(왜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왜국 우익을 위해 한국인을 공격하니까)’들 – 예를 들면, 대한제국 시절의 친일 미국 백인 남성인 스티븐스나 오늘날의 미국 백인 남성인 마크 램지어 교수 – 이 나를 공격하면 나도 똑같이 그들을 공격할 것임을 지금 이 자리를 빌어 분명하게 밝힌다!

- 단기 4357년 음력 1월 11일에, ‘더 늦기 전에, 한국이 완전히 왜국화[倭國化]하기 전에, 해방이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그리고 윤 투사님에게 “천[즈믄/1000] 번의 감사를” 하고 싶고, 그 분의 후손이신 윤선한 님이 처하신 상황을 보며 마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