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구럼비 폭파와 심판론의 실종

개마두리 2012. 3. 22. 20:07

 

- 이중근(기획에디터)

 

정부와 해군이 서귀포 강정마을의 상징인 구럼비 폭파를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지만 기지 건설을 막아선 마을 주민들의 대오는 요지부동이다. 구럼비를 폭파함으로써 기지 건설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정부의 의도와 반대로 기지 건설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동안 공사에 묵시적으로 동의해온 제주도마저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구럼비 폭파는 계속되고 있지만, 공사가 진척되기는커녕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강정 주민들의 기지 반대 운동은 사실 제주도민들로서도 뜻밖이다. 그동안 제주도에서 이런저런 사업이 진행됐고, 그때마다 적잖은 반대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한 적은 없다. 6년째 투쟁을 이끌고 있는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은 그 이유를 “주민의 의사에 반해 공사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민의견 수렴 절차만 제대로 밟았어도 이렇게까지 반대하기 어려웠으리란 ‘고백’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꼼수와 편법/탈법의 연속이다. 해군은 당초 기지 부지로 같은 서귀포시에 있는 화순항에 눈독을 들이다 여의치 않자 위미항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마저 무산되자 강정항을 슬쩍 거론한 뒤 제주도를 끌어들이고 주민을 회유했다. 그리고 2007년 4월 26일 밤 강정마을 주민 87명은 박수로 기지 유치를 결의했다. 흔하디 흔한 주민공청회도 없었다. 마을 주민 1930명(실제 유권자 1050명) 중 대부분은 그날 회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뒤늦게 이를 안 주민들은 마을회장을 불신임했다. 4개월 뒤엔 주민투표를 실시해 투표자 725명 중 94%의 압도적 찬성으로 기지 건설 반대를 결의했다. 결국 주민 8%가 내린,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로 뒤집힌 결의가 해군이 내세우는 기지 건설 적법성의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그리고 2009년 12월 17일엔 한나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제주도의회가 날치기로 강정마을 해안을 절대보전지역에서 해제했다. 기지가 들어설 곳이 개발이 ‘절대’ 금지된 곳임을 안 해군이 제주도를 통해 또다시 편법을 동원한 것이다. 한나라당 소속 도의원들은 관련 상임위원회가 절대보전지역 변경 동의안을 부결하자 3일 만에 이를 뒤집었다. 도의회 의장이 직권상정하고, 의사봉 대신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는 명백한 날치기였다. 절대보전지역은 제주도가 섬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스스로 지정한 곳이다. 한라산국립공원을 포함해 전체 제주도 면적의 10%이고, 이 중 해안지역은 3%에 불과하다. 구럼비를 제주 해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형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절대보전지역 해제를 저지했던 문대림 전 제주도의회 의장은 “그때 날치기 처리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이처럼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격분했다. 적법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한나라당이 스스로 날치기로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환경영향평가도 요식행위였다. 태풍 부는 날 하루 동안 평가한 게 전부였다. 결과를 정해놓고 절차를 밟는 시늉만 한 셈이다. ‘민/군 복합미항’이라는 생소한 개념의 항만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절차는 무시됐다. 강한 바람과 조수간만의 차로 15만t 의 대형 크루즈 선박이 접안할 경우 위험하다는 총리실 산하기구의 지적도 간과했다.

 

이처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란은 거의 모두 정해진 절차를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그러니 이를 되돌려놓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다시 절차를 밟는 게 순리다.

 

정부와 해군은 지금도 공사가 주민의 결정에 따른 것이며 절차를 어긴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럼비 폭파 직전 제주도가 강정기지 부두를 고정식에서 가변식으로 설계변경한 것을 문제삼아 구럼비 해안 매립공사를 정지시키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제주도가 적법하게 들이댄 이 절차마저 무시하려 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유권자들은 이명박 정권의 의미를 간과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깎아내린 정권이라 해도 그동안 다져진 절차적 민주주의는 허물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제주 해군기지에서부터 민간인 사찰, 선관위 디도스 공격에서 보듯 현 정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더구나 정부와 새누리당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엊그제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이념의 문제라고 말했다. 안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럼비 해안 폭파를 다음달 11일 치러지는 19대 총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구럼비를 서둘러 폭파해 이념 대결을 부추김으로써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가리려는 게 여권의 선거전략이라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의 본질은 안보를 둘러싼 이념 대결이기에 앞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이다. 아무리 분석해도 4.11 총선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경향신문』서기 2012년 3월 22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