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군대 없는 국가 일본이라는 거짓말

개마두리 2012. 3. 19. 21:25

 

[2012.01.09 제893호] -『한겨레 21』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평화헌법 지키려 ‘군사 거부 국가’ 코스타리카를 발견한 일본 시민사회

헌법 조문과 달리 주일미군, 자위대가 보여주듯 일본에 군사력 줄곧 있어

 

2000년대 들어 일본에서 코스타리카 신드롬이 잔잔하게 분 적이 있다. 중부아메리카에 자리한 인구 약 450만 명에 국토 면적이 일본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국’ 코스타리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지구의 반대편에 서로 자리한 코스타리카와 일본의 접점을 금세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코스타리카에 대한 책과 글들이 쏟아져나왔다.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 <평화를 만드는 교육- 군대를 버린 코스타리카의 어린이들> <헌법을 살리는 시대- 코스타리카에서 헌법 9조로> <평화헌법을 가진 3개국> <비무장 평화헌법과 국제정치- 코스타리카의 사례> <평화란 무엇인가- 군대를 버린 코스타리카에서 생각한다> <비무장 국가- 군대를 버린 코스타리카의 평화전략> 등 적지 않은 책들이 책방에 깔렸고 독자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코스타리카 열풍의 숨겨진 이유

 

이유는 책 제목만 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코스타리카가 군대가 없고 무장을 금지한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국가라는 점에 있었다. 코스타리카에는 실제로 군대가 없다. 코스타리카 헌법 12조에는 “군대는 영구히 폐지한다. 공공질서의 감시와 유지를 위해 경찰력은 유지한다”고 돼 있다. 게다가 31조에는 “코스타리카 영토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의 피난처다”라고 돼 있으니 경이롭기조차 하다. 물론 단서 조항으로 “국방을 위해서는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고 돼 있으니 비상시에 징병제를 발동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돼 있지만, 이런 단서 조항이 비무장 평화국가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코스타리카 관광홍보국 누리집이 코스타리카를 “세계에서 하나뿐인 비무장 영세중립국”이라 소개할 만하다. 일본의 유명 작가인 오다 마코토가 코스타리카를 ‘양심적 군사 거부 국가’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비무장 국가 코스타리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지난한 역사 과정이 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이는 생략하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왜 2000년대 들어 일본 사회가 코스타리카를 비무장 평화국가의 이름으로 ‘발견’했는지다.

 

지금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2000년대 들어 자민당 정부가 헌법을 ‘정말로’ 개정하려 한 적이 있다. 2007년에 헌법 개정 절차에 관한 법률(국민투표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으니 헌법 개정의 초입 단계까지 진입한 셈이다. 1950년대 거세게 불었던 개헌 바람에 이어 두 번째다. 1950년대에는 사회당 등의 호헌 정당이 주도해 광범위한 호헌 조직을 결성해 당시의 개헌 움직임을 막아냈다. 그러나 2000년대는 대표적 호헌 정당이던 사민당(옛 사회당)은 소수 정당으로 겨우 명맥을 잇는 정도였고, 지금은 집권당이 된 민주당도 헌법 개정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헌법 개정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던 시기였다. 정당이 헌법을 지키지 못하니 정당 밖에 있는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각종 시민단체가 생겨났고, 이곳저곳에서 집회·성명·강연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서점에는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우파들의 자극적인 제목의 책과 함께 반대로 현행 헌법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설파하는 책들이 나란히 깔렸다. 헌법에 대한 태도가 일본의 보수와 진보를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는 장이었다.

 

우파는 현행 헌법이 미군정기에 미군이 강요해서 만든데다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았으니 일본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군대 없는 국가’란 비정상 국가이니 일본을 국가다운 국가로 만들려면 군대가 필요하며 따라서 무장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은 현행 헌법을 미군이 주도해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19세기 이래 평화를 위한 내재적 운동과 사상의 연장선상에 현행 헌법이 자리하고 있으며,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이를 지켜온 역사 과정 속에 일본 국민의 평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이 헌법 논쟁의 핵심에 무장을 금지한 헌법 9조가 자리하고 있다.

 

해석개헌으로 미군·자위대 합리화

 

제9조(전쟁 포기, 군비와 교전권의 부인)

 

1.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2. 전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이외의 어떤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의 현행 헌법을 논할 때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평화의 규범으로 현행 헌법을 보는 것이다. 헌법을 국가의 규범이라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코스타리카와 마찬가지로 ‘양심적 군사 거부 국가’이다.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육해공군과 그 이외의 어떤 전력(군사력)도 보유할 수 없고”,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의 진보 진영은 현행 헌법을 “인류의 공유재산” “세계문화유산”이라 한다. 세계 각국이 일본의 헌법을 도입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면 전쟁이나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헌법을 “수출하자”는 말도 나온다. 이 내용이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면 말 그대로 세계 평화의 규범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헌법의 현실을 보게 되면 이야기는 다소 달라진다. 실제로 현행 헌법의 조항대로 일본이 비무장 국가가 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헌법이 만들어진 것은 1946년이고 시행된 것은 1947년이다. 옛 일본군은 해체됐으니 이 시점에서 일본 국적의 군대는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미군 점령 상태였고 막강한 미군이 일본열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일본열도 내에 군사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 경찰예비대로 출발해 1954년에 이름이 바뀐,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자위대는 군사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리고 미-일 안보조약에 입각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헌법이 금지한 군사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주일미군과 자위대라는 막강한 군사력과 헌법 9조의 모순을 일본 정부는 이른바 ‘해석개헌’을 통해 돌파해왔다. 해석개헌이란 헌법의 조문을 바꾸는 명문개헌과는 달리, 헌법 조문의 해석을 바꾸는 방식을 말한다. 주일미군은 일본 국적의 군대가 아니니 헌법 9조가 금지하는 군사력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자위대는 헌법 9조가 금지하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력행사”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수방위’와 ‘집단적 자위권 금지’라는 원칙이 해석개헌을 통해 자리잡았다.

 

1950년대 호헌 vs 2000년대 반개헌

 

그런데 1990년대에 상황이 바뀐다. 냉전 해체 뒤 등장한 이른바 ‘국제공헌론’이다. 일본도 경제대국의 위상에 맞게 국제사회에 군사력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일본 정부는 세계 분쟁지역에 자위대를 파견한다. 미국의 요구와 일본 사회의 군사대국에 대한 욕망이 맞물린 셈이다. 그러나 자위대의 해외 파병이 늘어날수록 전수방위 원칙과 집단적 자위권 금지라는 해석개헌과의 모순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이른바 ‘해석개헌 최악론’이다. 헌법 9조대로라면 자위대를 해체하고 주일미군을 철수시켜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자위대와 주일미군을 부정할 수 없으니 어정쩡한 해석개헌은 그만두고 명문개헌을 통해 군사력 보유를 규정해 자위대와 주일미군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하자는 내용이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명문개헌의 움직임이 본격화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군사력 보유를 금지한 현행 헌법하에서도 해석개헌을 통해 세계적 군사대국의 지위에 오른 일본이 ‘해석개헌 최악론’에 입각해 명문개헌을 단행하면 군비 확장에 대한 최소한의 제어장치가 없어지니 ‘해석개헌 최악론’은 ‘명문개헌 최악론’의 가려진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정당 밖에 자리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헌법 개정 반대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헌법 개정 반대운동을 보고 있자니, 1950년대의 운동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첫째는 명문개헌에 반대하기 위해 헌법 9조의 보편화를 꾀하는 움직임이다. 실제로 2008년에 개헌 반대운동 단체가 개최한 ‘9조 세계대회’는 헌법 9조의 보편화를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밖’으로부터의 힘을 통해 일국 평화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코스타리카는 현행 헌법의 보편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하나의 ‘발견’이었다. 무장을 금지한 헌법을 가진 곳이 일본만이 아니라는 발견을 통해 현행 헌법의 보편적 의의를 찾은 셈이다. 둘째는 과거에 사용했던 ‘호헌’을 대신해 ‘개헌 반대’ ‘헌법 개정 반대’ ‘반개헌’이라는 표현이 다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1950년대부터 사용돼온 호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헌법을 지키자’는 것이지만, 그 내용에는 해석개헌도 반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해석개헌을 반대하는 것이니, 당연히 자위대를 해체하고 주일미군을 철수시켜 비무장 국가를 지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자위대와 헌법 9조의 관계를 현실과 이상의 관계로 표현한다면, 호헌은 이상에 맞게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 된다.

 

오키나와 미군 용인하는 반개헌

 

그런데 최근 사용되는 ‘개헌 반대’ ‘헌법개정 반대’ ‘반개헌’이라는 말은 명문개헌에 반대한다는 뜻이 강하다. 명문개헌이라는 최악을 막으려고 해석개헌이라는 차악을 용인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최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석개헌이라는 차악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악을 막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10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어느 오키나와 사람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본토 사람들은 헌법 개정을 반대한다. 그런데 미군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즉 본토로 오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니 오키나와에 계속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삼 확인하는 것은 일본은 코스타리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