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퍼온 글]「대심문관」

개마두리 2012. 9. 28. 23:44

 

 

- 글쓴이 : ‘짜라투스트라’ 님

 

 

- 날짜 : 2009-02-13

 

 

-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1260462

 

 

“그는 정신을 차려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레마 사박타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더니 기운이 빠져 그는 머리를 떨구었다.

 

 

그는 손과 발과 가슴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시야가 걷히고 그는 가시 면류관과 피와 십자가를 보았다. 두 개의 황금 귀고리와 날카롭고 새하얗게 반짝이는 두 줄의 이빨이 어두워진 태양의 빛을 받아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는 느긋하게 조롱하는 웃음소리를 들었고, 귀고리와 이빨이 사라졌다. 예수는 혼자 공중에 매달렸다.

 

 

그는 머리가 흔들렸다. 언뜻 그는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누구이고, 왜 고통을 느끼는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맹렬하고, 주체하기 힘든 기쁨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렇다. 그렇다. 그는 겁쟁이, 도망자, 배반자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최후까지 명예롭게 그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켰으며, 약속을 지켰다. 그가 ‘엘로이, 엘로이!’라고 소리치며 기절한 순간에, 아주 짧은 한순간 동안에 ‘유혹’이 그를 사로잡아 못된 길로 이끌었다. 모두가, 모두가 악마가 보낸 환상이었다. (···) 모든 일이 올바르게 이루어졌나니, 하느님께 영광을!

 

 

그는 승리감에 차서 소리쳤다. ‘이루어졌나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니라.’“ -『최후의 유혹』에서

 

 

말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불후의 명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양립 가능한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던진다. 기나긴 철학사와 맥을 같이하는 이 쟁점은, 무신론자이자 까라마조프 집안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둘째아들 이반이 자신이 지은 서사시를 읊는 방식으로 소개된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세계 문학사의 압권으로 칭한 이 ‘책 속의 책’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6세기 서유럽에서 이단자들을 화형 시키는 일은 특이한 사건이 아니었다. 서기 1000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리라 믿었던 천년왕국은 오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 사후 33년을 더한 1033년에도 마찬가지로 오지 않았다. 하늘나라를 보증하며 자신들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강요했던 사제들의 권위도 위태해진다. 종말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겁주거나 달래려던 말들도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제 본분을 다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클뤼니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필두로 많은 수도원들은 11세기 초 교회를 재생시키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하며, 교회가 직면한 이 위기를 하나의 기회로 만들어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존 체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보완하는 형식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이전부터 권위적인 교회에 반발심을 갖고 있던 반골들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단’의 탄생이다.

 

 

사실 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죽음의 공포나 고문의 폭력으로 억압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어차피 종교가 믿음이라는 ‘감정’의 문제인 이상, 이성적인 설득과정이나 합리적인 해결방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을 인정해주거나 이들을 잡아 족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기득권층인 사제들의 입장에선 후자가 분명 편리했으리라.

 

 

이들은 믿음의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예수에 대한 광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그 미칠 것 같은 사랑이 한쪽에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다른 한쪽에는 그 새로움을 이단이라 칭하며 억누르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예수는 어린애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민중들에게 모습을 나타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15세기 전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왔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숨어있어도 튀는 법(囊中之錐). 15세기 전 허름한 마구간에도 저 멀리 동방박사가 친히 인사를 왔던 것처럼, 우리의 예수도 인간 세상에 내려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만다. “그분의 가슴속에는 사랑의 태양이 타오르고, 광명과 교화와 권능의 빛이 두 눈에서 흘러나와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 화답 받는 사랑으로 몸을 떨게 하시지.「대심문관」” 하필 이 모습을 아흔이 넘은 고집스러운 노인이자 이단 대심문관이기도 한 추기경이 발견하고 군사들을 시켜 예수를 사로잡는다. 이단이라는 이유로.

 

 

이 웃지못할 역설 속에서 우리의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 시키기로 한 날 새벽에 찾아와 자기변명을 시작한다. 그는 죄수가 바로 ‘그 분’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괜히 대심문관이겠는가, 뻔뻔하게 할 말은 다 한다. 너무나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을 믿은 당신의 선택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나무라면서.

 

 

죽기 3년 전 예수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는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 이 달콤한 유혹에도 예수는 넘어가지 않고 되레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며 면박을 준다. 이 위대한 거부는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빵)와, 기적(성전에서 뛰어내리기)과, 지상왕국(악마에게 절하기)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예수의 속 깊은 배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십자가에서 조롱당하는 장면에서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실존적 위기상황에 처하면 본능이 드러난다. 그게 자기 목숨에 천박할 정도로 집착하는 추한 것이 됐건, 아니면 자기를 희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됐건 간에 지나온 삶의 철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수 또한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모진 고문을 겪은 후의 십자가형만큼 다급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드러난 예수의 속마음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믿음,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이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39-43)”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는 시시콜콜한 것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굵직한 것까지, 실제로 예수는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행하여 왔었던가. 그러나 그는 악마에 굴하지 않았다. 이 유혹은 인간 정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예수에 의해 거부된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네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겠다.’고 소리 지르며 조롱하고 놀려 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당신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요. 당신은 단번에 인간을 영원히 공포에 떨게 할 권세 앞에서 드러나는 예속적인 노예들의 환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을 열망했던 거요.「대심문관」”

 

 

사실이 그렇다.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초자연적인 현상, 즉 기적을 목격한다면 아무리 완고한 사람일지라도 몹시 동요할 것이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보여줬더라면,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한 사람들 말처럼 자신을 믿게 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수많은 종교가 난무하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 작은 별에서 거의 유일한 신으로 숭배 받는 것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 일생에서, 아니 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거물답게 시기를 잘 안 것일까. 누가 시켜서 혹은 두려움에 생기는 믿음 보다는, 믿고 싶어서 그리고 따르고 싶어서 자연스레 생기는 자발적인 믿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독재자에 대한 믿음에는 광기나 공포가 있을지언정, 존경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성인(聖人)들의 믿음에는, 가슴 따뜻해지는 애정으로 가득하다. 예수는 그것을 간파했다. 기적의 거부는 ‘기적의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바란 예수의 유언 그 자체인 셈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현혹되어 포로가 된 인간이 자유의지로 당신을 따르는 자유로운 사랑을 기대했던 거요. 인간은 강력한 고대 율법 대신에 당신의 형상만을 지도자로 삼은 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이오. 당신은 인간이 당신의 뒤를 따라 기적을 물리치고 하느님과 함께 하기를 기대했던 것이오.「대심문관」”

 

 

십자가의 신비는 여기에 있다. 인간이 신을 믿기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필요는 없다. 십자가의 진리는 그 어떠한 확신도, 강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자발적인 믿음과, 그것의 실천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모든 믿음과 실천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예수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숨을 거둔다.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안티크리스트」”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가 없어졌다는 것.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려 온 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이 사랑을 완성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의 간극을 녹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니라.

 

 

십자가 이전의 시간은 원죄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숨 막혔던 복종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자유의 시간을 ‘시작’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수의 순진한 믿음만큼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것 같다.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자식이 그렇다. 부모가 보기에 자식은 항상 옳다. 더욱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 말 그대로 신적으로 우리들을 사랑했던 예수였기에 인간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

 

 

대심문관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았소. 그들은 비록 반역자로 창조되긴 했어도 노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되풀이해서 말하건대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소? 당신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단 1분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정말 있소? 인간의 본성이 기적을 거부하고 그 무서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고통스러운 정신적 의혹의 순간에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을 것 같소?「대심문관」”

 

 

노예에게 자유란 고통과 동의어이다. 아니 어쩌면 노예의 고된 노동은 자유의 시련에 비하면 어려움 축에도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이 힘든 것이야 몸으로 때워버리면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푹 쉬면 나아지는 것이지만, 자유를 공부하거나 접해보지 못한 이에게 주어진 자유는 막연함 그 자체다. 그래서 자유가 주어질 경우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대개 두 가지다. 살인과 겁탈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같은 망나니의 방종상태에 빠지거나, 새로운 신(종교)이 됐건 새로운 주인이 됐건 어쨌든 다시 복종하는 것이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인간의 양심을 영원히 평안하게 할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주지는 않고 특별하고 수수께끼 같고 불확정적인 것만을 가져왔고 인간에게 힘겨운 것만을 건네주었소.「대심문관」”

 

 

그래서 대심문관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내려준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을 수 없었던 허약한 영혼들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할 때에만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하라고? 물론 쉽사리 수긍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랑에 빠져 넋 나간 시인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복종을 좋다 하겠는가.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사람들은 자유가 얼마나 끔찍한 공포와 혼란으로 자신을 이끌었는지 기억하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복종을 선택한다.

 

 

과거 신분적, 종교적 예속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된, 그래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아니면 자유롭다고 믿는) 우리들 삶만 해도 벌써 그렇다. 장래를 선택할 때 일류대학, 일류직장에서 자유롭거나, 사회생활하면서 부동산, 증권 투자(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고 합리화하긴 하지만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롯데월드에서 우리의 선택에 의해 자유롭게 놀이기구를 탄다고 믿지만, 그래봤자 롯데월드 안에서 놀아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리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은 부득이 ‘원하게 하는’ 내적, 외적 압력에 따르고 있다. 사람들이 관습과 의무 혹은 단순한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들 자신’의 결단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일반적인가를 알게 된다.『자유에서의 도피』”

 

 

우리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작가 스탕달은 조토(Giotto)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를 보고 기절했다. 이것이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 증을 경험하는 현상인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다. 적어도 스탕달은 그 그림이 아름답다고 ‘본인’이 스스로 느꼈기에 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술책에서 수천 번도 보아왔던,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 배웠던 모나리자 같은 그림들은 실제로 접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박물관에 가서 렘브란트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분석해보면 그는 그 그림에 대해 어떤 특별한 내적 반응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림이 일반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도 그 그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 일반 신문 독자에게 그가 어떤 정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어보라. 그는 신문에서 읽은 다소 정확한 기사를 마치 ‘그의’ 의견인 양 말할 것이며,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사고의 결과라고 믿고 있다.『자유에서의 도피』”

 

 

안타깝게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복종하는 편이 훨씬 편하긴 하다. 정해진 노선에서 벗어나려 애쓴 사람치고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혁명가들, 아카데믹한 풍토에 반하여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경향을 선보인 학자들과 예술가들, 하다못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틀에 박힌 공부가 하기 싫어 학교 밖으로 떠도는 수많은 학생들까지. 이들은 주어진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별다른 반감 없이 복종한 자신의 동료들이 승승장구 할 때, 당장 끼니를 해결할 걱정에 막막해한다.

 

실제로 맘 맞는 동지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매일 밤새가며 서로의 철학을 나누고 정치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분기별 실시하는 공무원 시험 따위에 지원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시험문제가 아무리 어렵기로소니 자기수양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좋다. 구구절절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 관심사,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던 성장배경을 설명하기 보다는,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시키는데도 쉬울 테니까.

 

 

하다못해 신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어떻게 해야 우리 주변의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 따위로 고민하고 예수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 사이로 들어가 살기 보다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궂은일에 매달리기 보단, 교회와 목사에 복종하고 그들 말을 따르는 것이 인정받기에도 쉽다.

 

 

이렇듯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자유와 영혼을 판다. 그만큼 복종은, 자유를 누릴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깝고도 쉬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대심문관의 논리는 되레 타당해 보인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사 결정이라는 그들의 큰 두통거리나 현재 당면한 무서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그들이 무력하고 가엾은 어린애에 지나지 않으며, 어린애의 행복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이오.「대심문관」”

 

 

대심문관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목수의 굴욕적인 처형, 스스로를 신이라 행사했던 자의 파멸과 죽음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의 심복이라 자처하는 대심문관은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모두 받아들인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명백히 그 작은 집단은 이런 요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방식의 죽음이 보여준 모범을, 즉 모든 원한 감정을 넘어서 있는 자유와 능가라는 모범을. 이 점이 그들이 얼마만큼 그를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인 것이다! 용서해주는 것이 가장 최고의 의미에서 복음적이었을 텐데도. 바로 가장 비 복음적인 감정인 복수심이 맨 위로 올라섰다. 그 죽음을 그대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보복’과 ‘심판’을 필요로 했다. (···)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저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거기서 모든 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했고, 의미를 가져야만 했으며, 합리적이어야, 최대한 합리적이어야만 했다.「안티크리스트」”

 

 

이들에 의해 십자가는 이 세계의 정치적이고 강압적인 힘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카이사르의 칼을 받아들인다. 십자가의 신비도, 예수의 숭고한 희생도 모두 망쳐졌다. 예수의 진리를 규정하고 확신하는 순간, 예수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길이 아닌 강제의 길을 걷고 말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를 자신들만의 십자가에 못 박아버림으로서, 예수의 삶과 모범, 가르침과 죽음, 기쁜 소식(복음) 전체의 의미를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믿음도 못 박혔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의 이름으로 자유를 거부한다. 우리는 말씀대신 ‘빵’만을 처다 보며 산다. 조금 귀찮고 힘들더라도 정정당당히 벌어먹고 사는 대신, 부동산 값 폭등이나 로또 당첨과 같은 ‘기적’을 바란지도 오래됐다. 뿐만 아니라 돈이나 명예 같은 ‘지상왕국’에서의 행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악마의 발등에 입맞춤을 한번, 아니 수백 번 할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돌이 빵으로 바뀌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은 자유의 상실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있다. 대심문관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살아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대심문관은 말을 마치고 나서 얼마간 자신의 포로(예수)가 대답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죄수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런 반박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열중해서 듣고만 있다. 그러다 갑자기 예수는 아무 말 없이 심문관에게 다가오더니 아흔 살 노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것이 그의 대답의 전부인 것이다. 대심문관은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문 쪽으로 다가가 감옥 문을 활짝 연 다음 죄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앞으론 절대 찾아와선 안 되오. 절대, 절대로.”

 

 

위대한 「대심문관」은 이렇게 끝난다. 15세기 전 예수가 골고타 언덕에서 보여준 자유는 로마인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8)”며 감탄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그의 삶이 카이사르에 충실히 복종하던 백인대장 시절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 분명하다. 죽은 예수도 수십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의 미래를 바꿔놓는 판국에, 살아있는 예수의 철학을 온몸으로 접했으니 그러고도 남으리라. 그로부터 15세기 후 대심문관도 예수의 압도적인 모습에 할 말을 잊는다. 화형을 시키겠다는 다짐, 온갖 증오와 살기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다. 아마 내일 당장 대심문관 직책에서 사퇴하련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그것만큼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줄 수 있는 모습은 없다.

 

첫째, 자유는 하나의 축복이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4;16-19)”

 

 

에덴동산은 평화로워서 일할 필요가 없었고 선택해야 할 일도, 자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단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인데, 최초의 인간은 이 명령을 배반했다. 사실 명령에 반항하는 일은, 강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 기존의 무의도식하며 살던 존재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자의 명령에 반항하여 죄를 짓는 최초의 자유 행위, 이것이야 말로 인간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나 자유의 결과는 참혹하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저주처럼, 죽을 때까지 고통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는 하나의 고통이다.

 

 

삶이 힘들 때면 아무런 걱정 없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지곤 한다. 그 나이 때는 부모가 다 해주기에 무엇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시키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면 칭찬 받던 시절이다. 참 편했다. 이렇듯 자유가 고통스러울 때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성장하고 공부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져가면서, 우리는 뚜렷한 개성을 갖는 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공자 말대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선다는 이립(而立). 이때만큼 멋져 보일 때는 없다. 셋째, 자유는 하나의 고통이자 축복이다.

 

 

현재의 삶이 힘들다고 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 뱃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이상, 무의도식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단 하나, 온갖 고통을 감안하면서까지 힘들게 얻은 자유를 이 세계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자유는 하나의 고통이자 축복이지만, 축복만이 영원하리니.

 

 

“왕은 죽었다. 왕이여, 만세! 아베 마리아!”(Le roi est mort, vive le roi! Ave Maria!) 자유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자유는 바로 우리들 가운데 있다. 십자가를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