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창작 글]가짜 사자를 알아낸 소녀

개마두리 2016. 10. 1. 00:17


어느 나라에 임금이 살고 있었다. 그 임금은 됨됨이가 아주 고약하고, 질투를 잘 하고, 화를 잘 냈다. 그래서 왕족과 대신들도 그 임금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그리고 그 임금의 나라에는 한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아주 똑똑하고 말을 흐르는 강물처럼 막힘없이 잘 하며, - 그게 무엇이건 상관없이 -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 소녀에 대한 소문이 이곳저곳으로 퍼져, 마침내 나라의 대신까지 그 소문을 듣게 되었다. 대신은 궁궐에 가서 임금을 만나 여러 가지를 아뢰다가, 별 생각 없이 소녀를 다룬 소문도 아뢰었다.


임금은 대신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똑똑한 소녀가 있다고? 대신, 그 애가 똑똑하다면 과인의 공주는 똑똑하지 않다는 거요? 과인은 우리 공주만큼 똑똑한 소녀는 없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대신은 ‘아뿔싸! 내가 전하의 질투심을 건드리고 말았구나!’하고 생각하고 얼른 말을 돌려서 “전하, 아니옵니다. 그 소녀가 똑똑하다고 한들 우리 공주님한테 견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임금은 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대신, 당장 군사를 보내 똑똑하다고 소문이 난 그 소녀를 잡아오시오. 과인이 그 애한테 할 말이 있소. 만약 못 잡아오면, 대신도, 군사들도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할 거요!”


대신은 ‘아이쿠, 그 소녀가 죽거나 옥에 갇히겠구나!’하고 생각하며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한 뒤 자리를 떴다.


대신은 장군에게, 장군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고, 군사들은 그 소녀의 집으로 찾아가 소녀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 소녀는 두려웠으나,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알겠습니다. 갈게요.”하고 대답한 뒤 군사들을 따라나섰다.


궁궐로 끌려온 소녀는 임금 앞에 꿇어 엎드렸고, 임금은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비스듬히 위로 든 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임금은 입을 열어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네가 이 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소녀라고 들었다. 사실이냐?”


소녀는 엎드린 채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비록 소녀가 아는 것이 많습니다만, 가장 똑똑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임금은 다시 말했다.


“그거야 직접 시험해 보면 알겠지. 과인도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런 소문을 믿는다면, 과인이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냐? 그래서 과인은 소문을 잠재울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들어보겠느냐?”


소녀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마음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전하. 말씀하소서.”


임금은 씩 웃으며 오만한 표정을 지은 뒤,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인은 왕실의 동물원에서 사자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는 수놈이지. 내일 과인은 정원에 그놈을 끌고 올 것이야. 그런데 그놈은 사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너는 내일 정원에 끌려온 짐승이 진짜 사자인지, 아니면 가짜 사자인지를 밝혀라.”


소녀는 ‘뭐야, 겨우 그거였어?’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고, 곧 자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하. 그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임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단, 조건이 있다. 너는 정원으로 나온 짐승을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짐승이 풍뎅이 만하게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 그리고 너는 그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과인이 그 짐승에게 재갈을 물려서 데려오라고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지도, 직접 만지지도, 소리를 듣지도 않으면서도 그 짐승이 진짜 사자인지 가짜 사자인지를 밝혀야 한다.”


“네? 하지만 ….”


임금은 소녀의 말을 자르며 말을 이었다.


“과인의 말은 아직 안 끝났다! 계속 들어라! 만약 네가 이 문제를 단 한 번에 푼다면, 과인은 세간의 소문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네가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겠노라. 하지만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과인은 헛소문을 퍼뜨리고 왕실을 속인 죄로, 사람을 시켜서 네 머리카락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너에게 족쇄를 채운 다음 여자 죄수들만 갇힌 감옥에서 20년을 썩게 하겠다. 그렇게 해야 과인은 공주의 아비로서 그 애의 자존심을 지키고 왕실의 명예도 지켰다는 평가를 받을 테니까!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니 그리 알아라!”


“여봐라! 이 소녀를 숙소로 데려가라!”


소녀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을 따라 숙소로 걸어갔다.


그날 밤, 소녀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지도 않고, 직접 만지지도 않고, 울음소리도 듣지 말고 사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라니? 게다가 만약 그 문제를 풀지 못하면 자유와 머리카락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혀야 한다니? 자신이 똑똑하다는 소문이 난 게 왕실과 공주를 모욕하는 일이라니? 절망스럽고 억울했지만 그 감정을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정원으로 끌려온 소녀는 먼 거리에서, 그러니까 정원의 끝부분에서 사슬에 묶인 채 앉아있는 - 그리고 사육사 한 명과 군사 두 명이 곁에서 감시하고 있는 - ‘수사자’ 한 마리를 보았다. 임금은 소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의자에 앉아 소녀와 사자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하인들과 하녀들과 군사들과 대신들이 모여앉아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소녀는, 임금의 명령을 곱씹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녀는 임금 쪽으로 몸을 돌린 뒤, 엎드려 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사옵니다.”


“뭐냐? 말해라.”


“전하는 어제 제게 저 짐승에게 다가가지 말고, 저 짐승을 만지지도 말며, 저 짐승의 울음소리도 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사옵니까?”


“그렇다.”


“하오면 그것들 말고 다른 방법은 써도 되옵니까?”


“……? 그래.”


임금은 왼쪽 눈썹은 위로 올리고, 오른쪽 눈썹은 아래로 내린 채 눈을 치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소녀가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을 허락했다. 임금은 ‘어차피 이 애는 과인이 낸 문제를 못 풀어.’하고 생각했다.


소녀는 입을 다문 채 씩 웃더니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전하, 궁궐 안의 요리사에게 날고기 하나만 가져오라고 명령해 주시옵소서. 기왕이면 작은 손수레에 실어서 가져오라고 덧붙이소서.”


임금과 다른 구경꾼들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소녀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임금은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소녀는 요리사가 날고기를 실은 손수레를 가져오자, 그에게서 손수레를 받은 뒤 손수레의 방향을 돌려 ‘수사자’쪽으로 향하게 한 뒤 온 힘을 다해 손수레를 밀었다. 손수레는 ‘수사자’쪽으로 굴러가서 녀석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수사자’는 잠시 손수레에 실린 날고기를 쳐다보더니,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수사자’는 그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런 ‘수사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임금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전하, 이번에는 궁궐 안의 마구간지기에게 마른 풀을 잔뜩 가져오라고 명령해 주시옵소서. 이것도 작은 손수레에 실어서 가져오라고 덧붙이소서.”


임금과 다른 구경꾼들은 눈을 치뜨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번에도 소녀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임금은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소녀는 마구간지기가 마른 풀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가져오자, 그에게서 손수레를 받은 뒤 손수레의 방향을 돌려 ‘수사자’쪽으로 힘껏 밀었다. 이 손수레도 ‘수사자’쪽으로 굴러가서 녀석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수사자’는 마른 풀들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발을 앞으로 휘저으며 마른 풀들이 실린 수레로 달려들려고 했다. 사육사와 군사들은 그런 ‘수사자’를 달래고 주저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소녀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뒤, 마침내 모든 고민이 다 날아간 표정으로 - 그리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 씩 웃었다. 그는 임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 저놈은 수사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암사자인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자는 아닙니다. 한마디로 가짜이옵니다.”


임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입을 열어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말도 안 된다. 도대체 너는 저놈이 사자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소녀는 눈을 감고 입 꼬리가 올라간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사자라면, 고기를 먹는 짐승이니 소녀가 고기를 실은 손수레를 보내주었을 때 고기를 먹으러 달려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저놈이 사자라는 사실을 의심했사옵니다.


하지만 단순히 배가 불러서 안 먹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풀을 주었지요. 만약 고기를 먹는 짐승이 배가 불러서 고기를 안 쳐다보는 것이라면, 풀을 주었을 때에는 - 고기를 먹는 짐승은 풀을 안 먹으니까요 - 그 풀도 쳐다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오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놈은 풀을 보자마자 풀에 달려들었으니까요. 그건 그놈이 풀을 좋아하고, 따라서 풀을 먹는 짐승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풀을 좋아하는 짐승이라면 사자는 당연히 아니지요. 그래서 소녀는 저 짐승이 뭔지 모릅니다만, 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임금을 뺀 다른 구경꾼들은 소녀의 말을 듣고 감탄했다. 임금은 한동안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감은 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너는 당장 저 짐승을 지키는 사육사와 군사들에게 가서, 더 이상 ‘수사자’를 분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인의 말을 들은 사육사는 ‘수사자’를 구경꾼들 바로 앞으로 끌고 온 뒤, 갈기를 뜯어내고 ‘수사자’의 탈을 벗기고 발에 신긴, 사자의 발처럼 생긴 신발도 벗겨낸 뒤, 물로 ‘수사자’의 몸을 씻어냈다. 모든 분장을 없앤 ‘수사자’는 자신의 본 모습인 수나귀로 되돌아갔다.


구경꾼들은 가짜 수사자의 정체를 안 뒤, 다시 한 번 소녀에게 감탄했다. 임금은 괴로운 얼굴로 소녀에게 물었다.


“과인이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노라.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과인한테서 뭘 받고 싶으냐? 말해 봐라. 들어주겠노라.”


소녀는 눈을 반쯤 감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하. 백성들이 소녀 때문에 처벌받는 것을 바라지 않사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까닭이 된 소문이 나라 안에 돈다 하더라도, 그 소문을 말하거나 들은 사람들을 처벌하지 말아주소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 소녀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사옵니다. 왕립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 두 가지 말고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사옵니다.”


임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궁궐 안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소녀의 착한 마음과 슬기를 칭찬했고, 소녀는 대학에 들어가 더 많은 것을 배운 뒤 나라에서 으뜸가는 학자가 되었으며, 질투를 잘 하는 임금은 못해도 소녀를 만나기 전보다는 성질이 덜 고약해졌다고 한다. 

   
 (글쓴이[잉걸]의 말 : 이 글은 그저께 사진을 보고 나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해외 뉴스’를 소개하는 기사에 사진이 실렸는데, 그 사진에는 한 여성이 목덜미에 긴 털들을 잔뜩 붙여 갈기처럼 만들고, 온 몸을 누렇게 칠해서 마치 수사자처럼 분장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도 잠시, 곧 ‘만약 저런 짐승을 보고 진짜 사자인지, 가짜 사자인지 알아보라는 문제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곧 가지를 쳤고, 얼마 안 있어 내 머릿속에는 ‘한 소녀가 수사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라는 문제를 푸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 이야기를 나 혼자 알고 있기는 아까워서, 이렇게 글로 적어 여러분에게 선보인다. 부디 즐겁게 읽으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