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단순히 재화를 양산하여 그것을 분배하는 과정과 결과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재화 속에는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EU(유럽연합 - 옮긴이)라는 경제 공동체는 단순히 유로화라는 돈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공유하게 되면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 장사를 하기 위해 사람이 만나면 대화를 해야 하므로 언어를 공유하게 되고, 함께 밥을 먹게 되면 음식 문화를 공유하게 되고, 옷을 바꾸어 입으면 의복 문화를 공유하게 되고, 자주 만나다보면 결혼하게 되므로 인종을 공유하게 된다.
최근에 교육부에 근무하시는 분이『고조선, 사라진 역사』라는 책을 냈는데(성삼제, 동아일보사) 여기에서 명도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책을 검색한 후 ‘책 속으로’를 선택하면 다음처럼 나온다.
‘명도전은 고대 연나라의 화폐다.’ :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명도전 출토 지역의 분포를 보면 옛 고조선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만주사의 기초를 닦았다는 중국 길림대 역사학과의 장보촨(張博泉) 교수는 어떤 연유로 2004년 중국 학회지에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문을 발표했을까? (『고조선 사라진 역사』6장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가 아닐까’ 148 ~ 156쪽)
명도전은 초기 철기시대의 화폐인데, 작은 칼(刀)처럼 생겼고, 표면에 明자가 새겨있어 明刀錢이라 부른다. 명도전은 고조선 후반기인 BC(서기전 - 옮긴이) 3~2세기 사이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국제 화폐인데(고조선의 영토에서는 명도전, 반량전, 포전, 명화전, 일화전 등이 출토된 바 있는데, 명화전과 일화전은 당시 중국 영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거의 없어서 고조선의 화폐로 보기도 한다 - 지은이의 주석), 이것이 위씨조선 - 전한(서한 - 옮긴이)의 전쟁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위씨조선(위만조선 - 옮긴이)이 동방 여러 나라들과 전한 사이의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쌓은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므로, 위씨조선의 위치도 당시 부의 상징이자 국제 화폐인 명도전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지역에 위치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만일 위씨조선이 대동강 유역에 존재하였다면 한반도 남부와 전한의 교역을 중계하였다는 것인데, 명도전이 북부에 비해 현저하게 적게 출토되는 BC 3 ~ 2세기 한반도 남부의 경제력이 그런 큰 전쟁을 몰고 올 정도로 컸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명도전은 북경 부근인 하북성과 청천강 이북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므로(명도전의 출토 지역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지역과 비슷하게 겹친다 - 지은이의 주석), 중계 무역으로 부를 쌓았다는 위씨조선도 그 지역에서 찾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동북아(동아시아 - 옮긴이) 지도를 놓고 어디를 장악하여야(손에 넣어야 - 옮긴이) 前漢과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는지를 보면 만주에서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입구(그러니까 오늘날의 요서 지방 - 옮긴이)다.
위씨조선과 前漢의 전쟁은 서양에서 트로이가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길목을 장악하고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것과 유사하다. 트로이의 위치는 그 길목을 통제하기에 편리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트로이가 경제력을 갖추었기에 그리스(헬라스/아카이아 - 옮긴이)와 전쟁할 수 있었듯이, 위씨조선도 경제력을 갖추었기에 전한과 전쟁할 수 있었다.
트로이 전쟁의 기록을 전쟁에서 패한(진 - 옮긴이) 트로이는 남기지 못하고 승리한(이긴 - 옮긴이) 그리스 측에서만 남겨 그리스인들의 눈으로 전쟁 상황을 판단하듯이, 위씨조선 - 전한의 전쟁 기록도 전쟁에서 패한 위씨조선 측은 남기지 못하고 승리한 전한 측에서만 남겨 전한 측 기록만으로 전쟁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명도전의 분포 지역이 비파형 동검의 분포 지역과 겹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고조선 영역 속에 있는 비 고조선 문화의 예’로서 틀리기 쉽다 하여 시험문제에나 출제하곤 하였다.
2004년 3월 시행 서울시 교육행정직
[문제] 다음은 고조선 세력 범위를 나타낸 지도이다. 뒷받침하는 유물 또는 유적으로 거리가 먼 것은?
① 고인돌 ② 명도전 ③ 비파형 동검 ④ 거친무늬 거울 ⑤ 미송리식 토기
[만주를 중심으로 한 비파형 동검과 지석표 등을 합한 분포 지도가 나옴]
[정답 및 해설]
정답 : ②. 명도전은 전국 시대 중국 연나라의 화폐이므로 고조선의 세력 범위와는 관계가 없다.
‘주로 고조선 영역 속에 나타나나 고조선문화가 아니다.’ ‘주로 한국 영역 속에 나타나나 한국문화가 아니다.’ ‘주로 일본 영역 속에 나타나나 일본문화가 아니다.’ ‘주로 미국 영역 속에 나타나나 미국문화가 아니다.’ … 그러면 (도대체 - 옮긴이) 어디에 나타나야 그 지역의 문화가 되는가?
돈을 찍어낸 틀이 나오면 그곳이 돈을 만든 곳이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이야말로 - 옮긴이) 돈의 주인인가? 원칙은 그렇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는 조폐 기술이 뛰어나 세계 여러 나라의 돈을 대신 만들어주고 있다. 미국이 찍어낸 달러가 가장 많이 쌓여있는 곳이 동아시아다.
돈이란 자신이 들어 있는 지갑을 가진 사람을(원문은 “돈이란 지갑에 들어 있는 사람을”이나,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고 어색해 이렇게 고쳤다 - 옮긴이) 주인으로 섬기는 법이다. 즉 돈을 만드는 사람보다 그 돈을 가지고 쓰는 사람이 그 돈의 주인이다. 돈 만드는 틀이 어디서 나왔느냐도 중요하나, (그 돈을 - 옮긴이) 누가 썼느냐가 돈의 주체를 결정하므로 더 중요하다. 명도전은 오로지 무게만으로 가치를 결정하는 화폐이므로, 덩이쇠(한자로는 철정[鐵鋌]. 삼한백제의 변한[변진]에서 쓴 돈 - 옮긴이)와 마찬가지로 누가 만들건 문제가 되지 않는 화폐다(‘평량화폐’라 부르는데, 국가의 규제선을 벗어나 주조되고[만들어지고 - 옮긴이] 유통되는 세계 화폐의 기능을 한다. 오늘날에도 금괴나 은괴 같은 귀금속은 누가 만들건 상관없이 유통되는 평량화폐다 - 지은이의 주석).
(‘중국 대륙’에는 - 옮긴이) 전국 7웅이라 하여 秦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秦나라, 燕나라를 비롯한 일곱 나라가 있었다. 당시 연나라가 과연 중원문화권이었을까? 아니면 동북아문화권이었을까? 최초로 연경(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도읍한 전국시대의 연나라는 중원 국가가 아니었다. 중국(中國이란 용어는 詩經에 처음 나오는데, ‘왕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 지은이의 주석)이란 개념 자체가 漢나라 이후에 정립된 것이고, 강대국이었던 秦과 楚도 당시는 다 이민족의 야만국들이었다(진[秦]나라는 서서히 농경국가로 바뀌어가던,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였고, ‘중원’을 자처하던 진[晉]나라나 한[韓]/위[魏]/조[趙]나라와 사이가 안 좋았다. 또 초[楚]나라는 말레이 인종에 속하는 남중국의 원주민이 세운 나라였고, 춘추시대부터 [원래는 상나라와 주나라의 천자만 쓸 수 있었던] 왕[王]이라는 칭호를 쓰며 북쪽에 있는 서주의 제후국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의 역사는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우고 전국 7웅의 땅과 백성들을 모두 차지한 뒤에야 ‘중국사’라는 큰 틀에 흡수된다 - 옮긴이).
당시의 연나라는 인종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오히려 고조선에 훨씬 가까운 동북아 국가였다(연나라가 자리 잡은 중국 하북성이 원래는 - 공공족[환웅족]의 토성이 남아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 신시[신불]와 고조선의 땅이었고, 연나라는 주위에 있는 ‘동이’나 예맥족을 쫓아내거나 흡수하면서 커졌으며, 망할 때까지 고조선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어떤 나라가 돈을 주로 중원 국가가 아닌 고조선과 공유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고조선과 경제 공동체라는 뜻이다. 연나라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곳도 (기箕 나라를 비롯한 - 옮긴이) 고조선 영역이고, 주로 만나던 사람들도 고조선 사람들이고, 주로 쓰던 말도 고조선 말이고, 주로 입던 옷도 고조선 옷이고, 등등 … 이란 뜻이다. 燕나라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우리(배달민족 - 옮긴이)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김 상,『삼한사의 재조명 2』, 414 ~ 418쪽
-『삼한사의 재조명 2』(김 상 지음, [주] 도서출판 북스힐 펴냄, 서기 2011년)에서
※ 옮긴이(잉걸)의 말 :
나는 이 글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3자의 책에서 이 글의 논지를 뒷받침할 수도 있는 대목을 찾아냈다(순전히 우연이었다!). 서기 1996년 일본인 학자가 쓴 훈(흉노)족을 다룬 책(서기 2007년에 한국어로 옮겨졌다)에서, 연(燕)나라를 다룬 구절을 읽은 것이다. ↓
“춘추시대에는 장강 중류지역의 초(楚)와 위수(渭水) 유역의 진(秦), 오늘날 북경 부근의 연(燕)조차도 중원 제국으로부터 만족(蠻族. 야만족 - 옮긴이) 또는 이적(夷狄. 오랑캐 - 옮긴이)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동호[東胡]족과 임호[林胡]족 - 옮긴이) 전부를 순수 유목민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 사와다 이사오(澤田 勳[택전 훈]),『흉노』, 18쪽
(→『흉노』[사와다 이사오 지음, 김숙경 옮김, 도서출판 아이필드 펴냄, 서기 2007년]에서)
물론 사와다 교수는 같은 책에서 “춘추시대에 오면 화하의식이 중원제국에 국한되어 초, 진(秦), 연 등도 이적으로 인식되었다. 춘추시대 화와 이의 차이는 음식과 복식 같은 풍속이나 습관의 차이였으며, 명확한 민족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한시대가 되면 그 차이는 그 집단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식’을 표시하는 것으로 되었다.”는 ‘호리 도시가즈(堀 敏一[굴 민일])’ 교수의 견해를 인용해서 “이적” “인식”이 “민족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주장하나, 나는 초나라나 진나라나 연나라 땅에 주나라(서주/동주)의 중심지인 북중국 내륙과는 다른 문화와 말과 풍습을 지닌 민족이 살았기에(아니면 서주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 세운 나라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서주 왕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대신 주변의 원주민들과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유전자와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그나마 하족(夏族)과 주족(周族)의 유산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편이었던 ‘중원’ 사람들이 그들을 ‘오랑캐’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나는 이런 인식은 전국시대에도 유지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진(秦)나라가 전국시대 중기까지 유목민족의 관습인 순장제도를 유지했고, 진나라의 지배층이 몸에 스키타이/훈(흉노)의 물건과 비슷한 황금/청동 치레거리를 둘렀으며, 연나라 사람들이 명도전을 제나라나 조나라나 한나라나 위나라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고조선 사람들과 나눠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단순하게 ‘중국사’로 여겼던 역사들 - 특히 연나라 역사 -을 보는 눈을 바꾸고, 그것들을 다른 민족의 역사나 문화와 견주어 그것들의 정확한 소속을 밝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순히 ‘동이전(東夷傳)’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삼국지』의「오환전」이나『사기』의「흉노 열전」을 내다 버리면 안 되듯이(전자는 박[朴]씨족이 세운 서나벌을 연구할 때 필요하고, 후자는 김[金]씨족인 김알지와 모루한[내물이사금]이 세운 계림국과 좌지왕이 세운 후기가야를 연구할 때 필요하다),『구당서』와『신당서』에 진(발해)의 역사가「동이전」이 아니라 (몽골초원의 유목민족을 일컫는)「북적(北狄)전」에 실려 있다고 해서 진이 고구리[高句麗]와 부여를 이어받은 나라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되듯이, 옛 기록에 나오는 연나라 역사도 고조선과 관계가 있는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설령 사마천의 말대로 연(燕)나라가 서주 왕실이 보낸 왕족이자 주족인 희(姬)씨 집안이 다스린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위엔 온통 예맥이나 동호 같은 이민족뿐이었고, 이민족을 점령하거나, 무릎 꿇리거나, 교류하는 동안 그들의 말과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역사는 ‘처음엔 주족의 점령지이자 서주의 제후국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점점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른바 “오랑캐 나라”가 된 나라의 역사’로 봐야 한다(물론 고대 중국의 기록을 나보다도 더 의심하는 사람은 이런 풀이도 ‘너무 온건한 것’이라고 여기며 반발할 것이다).
연나라가 “오랑캐 나라”로 불리며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면, 위씨조선을 ‘중국인의 정권’으로 부르며 그 역사를 ‘중국 역사의 연장’이라고 여기는 한족 학자들의 견해는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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