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箕子) : 성 자(子), 이름 서여. ‘기자’는 상나라의 ‘기(箕)’라는 지역에 (제후로) 봉해진 자작(子爵)을 일컫는 말이다. 자 서여가 ‘기자’로 불린 상나라의 왕족이자 제후였기 때문에 이런 존칭으로 불렸다.(옮긴이 잉걸)
오래 전 어느 학술회의장에서『사기』에 단군이나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니, 그 실존을 인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사기』가 높이 평가받는 역사서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역사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가 그곳에 실려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간혹 우리(배달민족 - 옮긴이)와 관계된 내용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언급된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대외무역을 설명하면서 우리 특산물이 언급된다던가, 대외전쟁을 기록하면서 고조선의 서부 국경을 언급하는 경우 등이다.
이에 대해서『사기』에는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으로「조선 열전(朝鮮 列傳)」에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사기』의「조선열전」은 위만조선(위씨조선 - 옮긴이)에 관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명칭 때문에 사마천이 우리 역사를『사기』에 실은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마천은 위만조선을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록한 것이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 적어도 사마천의 ‘인식’은 위씨조선을 중국사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윤 전 교수와는 달리 위씨조선의 역사는 배달민족 역사의 ‘곁가지’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고조선이나 기[흔히 ‘기자조선’이라고 불리는 나라]나 부여의 역사와는 별개임을 분명히 밝히고 나서 말이다 : 옮긴이).
「조선열전」은, 위만이 나라를 세우고 서한(또 다른 이름은 ‘전한’ - 옮긴이)의 ‘외신(外臣)’이 되었다고 한 뒤 서한 무제(武帝. 이름은 ‘유철’ - 옮긴이)가 위만조선을 쳐서 멸망시킨 과정을 기록하는 데 내용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사기』「조선열전」은 위만조선을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기는 하지만, 우리 역사로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비록 외신[外臣]이 “한 나라의 신하가 다른 나라의 임금을 상대해서 자기를 이르던 말”이라는 뜻을 지닌 낱말이기는 하지만, 중국 사서는 중국 밖에 있는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을 중국의 ‘신하’로 불렀기 때문이다[예 : 명나라 황제가 조선 왕과 다이 비엣<大越. 대월> 황제와 류큐<琉球. 유구> 왕을 ‘신하’로 부른 사실]. 그렇다면『사기』의 외신은 위만이 진짜로 서한의 신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왕이 된 위만을 ‘왕’이 아니라 ‘[서한의] 바깥[에서 살고 있는] 신하’로 부른 증거라고 봐야 한다.
‘[중국의] 바깥[에서 살고 있는], 신하[로 불리는 사람]’이라면 ‘1.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신하로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2. 실제로는 독립국가의 왕이지만 중국에서는 신하로 불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위만은 기준[준왕]을 몰아낸 뒤 왕이 되고 나서, 그러니까 새 나라를 세우고 나서 ‘외신’이 되었으므로 - 그리고 그의 손자인 위우거[우거왕]는 서한의 말을 듣지 않고 유철의 비위를 거슬렀으며, 서한과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으니까 - 2.임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위씨조선의 역사는 사마천의 주장이나 인식과는 달리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가의 인식과 역사의 진실은 따로 떼어내서 살펴야 한다. - 옮긴이)
위만조선이 우리 역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 있는지도 검토해 볼 문제이다(이 말은 옳다. 위씨조선은 중국 역사가 아닌 배달민족의 역사로 인정하되, 직계가 아니라 방계로 다뤄야 한다. 위우거 왕[우거왕]은 환웅천왕이나 단군임검[단군왕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 옮긴이).
여기서 우리는 기자라는 인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자는 위만과 더불어 우리 상고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중국인이다(가장 잘 알려진 기자인 ‘자 서여’는 상나라의 왕족이자 유민이며, “동쪽의 조선”, 그러니까 고조선 땅으로 달아난 사람이기도 하다 - 옮긴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주 초에 조선(고조선 - 옮긴이)으로 망명한 인물로서, 서주 무왕(武王. 이름은 ‘희발[姬發]’ - 옮긴이)이 그를 조선에 봉했다고도 전한다(실제로는 희발이 자 서여의 도망과 고조선 망명을 인정하고, 그와 그를 따라나선 상나라 유민들을 더 이상 뒤쫓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사기』「송미자세가」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되, [그를]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는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자 서여는 희발의 신하가 아니었고, 서주에 무릎 꿇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서적인『고금도서집성』에 실린 글에 따르면,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조선현”은 평양특별시나 평안도나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자 서여가 ‘동쪽의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이곳도 서주에서 바라보면 “동쪽”이기는 하다! ‘동쪽’이라고 해서 무조건 평양특별시나 평안도라고 봐야 할 까닭은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는 ‘기[箕. 원래는 其 위에 己가 얹힌 한자지만, <한글 2010>에 이 글자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箕자를 쓴다]’라는 땅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기 땅의 제후’라는 뜻을 지닌 ‘기후[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는 평양특별시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요서지방이나 하북성과 산동성의 경계인 지역에서 나왔다.
따라서 ‘상[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오늘날의 평양특별시로 왔고, 그곳에서 “맨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므로, 오늘날의 한국인/조선인은 한족의 자손이며 한국/조선 공화국[수도 평양]의 역사는 중국사의 아류일 뿐이다.’라는 기자동래설은 잘못된 학설이다 - 옮긴이).
위만은 서한 초에 조선(실제로는 기[箕]나라 - 옮긴이)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한 사람이다. 기자와 위만은 시대만 다를 뿐, 중국에서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서, 기(箕)라는 곳에 봉해졌던 제후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 상나라가 주족(周族. 서주를 세운 민족. 한족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며, 전근대사회의 한족들도 주족을 ‘중화[中華]’로 부르며 존경했다 - 옮긴이) 때문에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지만(달아났지만 - 옮긴이), 뒤에 서주를 방문하여 무왕에게 정치의 대요(大要. 대략의 줄거리 - 옮긴이)인 홍범(洪範)을 강의하기도(가르치기도 - 옮긴이) 하였다. 공자는 그를 비간(比干), 미자(微子) 등과 더불어 상나라 말기의 어진 인물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와는 달리, 위만의 신분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높이 잡아도 서한 초에 연(燕) 지역의 제후왕(諸侯王)으로 있었던 노관(盧綰)의 부장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역사에서 기자는 위만보다 훨씬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위만조선에 관해서는(위만조선의 역사는 - 옮긴이)「조선열전」이라는 명칭으로 독립해 기술한(적어서 설명한 - 옮긴이) 반면, 기자에 대해서는(기자족의 역사는 - 옮긴이)「주본기(周本紀)」,「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등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만 언급하였을 뿐이다.
사마천은 왜 위만은 독립된 열전으로 취급하면서, 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혹시 기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자의 후손인 준왕(준왕은 ‘기준 왕’으로도 불린다 - 옮긴이)이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긴 시기는 사마천이 출생하기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그는 기자와 그 후손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기자를 독립된 세가나 열전으로 다루지 않았다.
기자의 존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을 근거로 그의 실존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는 갑골문(甲骨文) - 갑골문에서는 ‘기후(箕侯)’로 나온다 - 에서도 확인되고,『사기』,『상서대전(尙書大傳)』,『논어(論語)』등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므로, 실존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자가 세가나 열전에 들지 못한 것은 사마천의 역사의식과 관계가 있다. 사마천은『사기』를 편찬하는 데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다.『사기』의 기술 대상은 중국(서한 - 옮긴이)의 천자를 중심으로 그의 통치 아래 있는 곳(또는 서한이 사신을 보낸 곳이나, 서한의 군사가 무너뜨리거나 잠시라도 점령한 곳 - 옮긴이)만을 포함시켰으며, 그 밖의 지역은 제외하였다.
사마천은『사기』의「태사공 자서」에서『사기』의 편찬 방법과 내용, 그리고 그 기준에 대해 “18수(宿)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 수레바퀴의 살이 모두 하나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어(속바퀴로 모여서 - 옮긴이) 그 운행이 무궁한 것처럼, 보필하는(輔弼하는. 낮은 벼슬아치나 대신[輔]이 [윗사람이나 임금을] 돕는[弼] - 옮긴이) 신하들을 여기에 비기어(빗대어 - 옮긴이) 그들이 충신의 도를 행함으로써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 그리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명(功名. 공[功]을 세워 널리 알려진 이름[名] - 옮긴이)을 천하에 세운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70열전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기』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본 골격은 천자에 관한 기록인 본기와 제후에 관한 기록인 세가, 그리고 여러 분야의 인물에 관한 기록인 열전이다. 표와 서는 이를 보완한 것으로서, 표는 연표이고 서는 문물제도 변천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마천이 천자(황제 - 옮긴이)를 북극성 또는 수레바퀴의 속바퀴에 비유하고(빗대고 - 옮긴이), 제후들을 북극성의 주위를 운행하는 18수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는 수레바퀴의 살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들과 그 주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역사를 엮어간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사기』는 중국 천자를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 안에 포함된 것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위만이나 위만조선은 중국(서한 - 옮긴이)의 통치질서 안에 포함된 서한의 외신이었지만, 기자나 기자국(흔히 ‘기자조선’으로 알려진 ‘기’나라 - 옮긴이)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기자는 상나라 말기에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주족이 상 왕실을 멸망시킨 뒤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기자는 자신의 조국이 망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서주 무왕은 기자를 그곳에 봉하였다. 그 뒤 기자는 자신을 봉해준 데 대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서주 무왕을 찾았으며, 그때 무왕에게 홍범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기』「주본기」와「송미자세가」그리고『상서대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기자는 서주 무왕의 봉함을 받아 조선(고조선 - 옮긴이)으로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여 조선으로 도주(망명 - 옮긴이)했으며,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그곳에 봉했다. 기자는 무왕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난 고마움을 저버리고 조선으로 도망을 했던 것이다. 무왕으로서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인품을 생각해서 (서주[西周]에 무릎 꿇지 않고 - 옮긴이) 조선에서 사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천자의 행위에 대한 중국식 표현으로 ‘봉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는 조선으로 이주한 뒤에는 서주의 신하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기』「송미자세가」에는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하였다. 그렇다면 기자는 어느 나라 신하였을까.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기자와 그 후손을 ‘조선후(朝鮮侯)’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의 제후라는 뜻이다. 이것을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조선에 봉해진 서주의 제후’라는 뜻으로 해석(풀이 - 옮긴이)하면서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으로까지 확대 설명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기자는 서주의 신하(제후)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기자가 고조선의 제후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여러 기록과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기자는 단군조선(고조선 - 옮긴이)의 서부 변경인 지금의 요서 지역에 망명하여 거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면서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마천은 기자나 기자국을 중국의 역사서인『사기』에 세가나 열전으로 독립해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 윤내현,『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124 ~ 129쪽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윤내현 지음, (주)지식산업사 펴냄, 서기 2003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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