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누가 정말로 아메리카를 발견했을까?

개마두리 2017. 6. 17. 15:07

- 다큐멘터리의 원제 : <Who really discovered America?>


※옮긴이(잉걸)의 말 : 내가 6년 전인 서기 2011년 9월 26일에 본, <히스토리 HD>의 다큐멘터리 내용을 소개한다.
 

1. 가설 1 :


- 서기 1421년, 명나라의 제독인 정화(본명 하이드 핫지), 아메리카 대륙 도착?


→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서기 1459년(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주에 도착하기 33년 전), 천주교 사제가 그린 지도에 ‘대서양’이 나온다는 사실이다(문제는 그 지도에 정화가 오늘날의 케냐를 비롯한 동아프리카를 항해할 때의 모습만 그려졌지, 아메리카 주가 그려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 잉걸의 주석 :


이 사제가 그린 지도에 “대서양”이 나오는 건 굳이 정화 제독의 항해를 들먹이지 않아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북쪽 바닷가에 있는 에우스카디아(에스파냐식 이름 ‘바스크’)의 어부들이 콜럼버스가 배를 띄우기 훨씬 전부터 대서양 깊숙이 들어가 대구를 잡고 있었고, “서기 1459년”이 아니라 그보다 230년 전인 중세시대에 시칠리아의 왕이 (유럽에서 보았을 때) ‘지중해 밖에 있으며, 서쪽 끝까지 뻗은, 넓고 어두운 바다.’에 탐험대를 보냈으나, 그들이 바다의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유럽인은 콜럼버스 이전에도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아메리카 주가 있다는 사실만 몰랐을 뿐이다.


- 정화 본인의 말에 따르면, “10만 리”를 돌아다니며 “이방인들의 나라”를 보았다고 하는데, 10만 리(里)는 남경에서 마이애미까지의 거리다(만약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 잉걸의 주석 :


그러나 이 “10만 리”를 실제로 여행한 거리로 봐야 할지, 아니면 관념상/문학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수천 년’이 말 그대로 수천 년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즈믄 해나 2천년 정도인 것을 그렇게 말한 것일수도 있고, ‘백관(百官)’이 ‘벼슬아치 온 명’이 아니라 그냥 ‘모든 벼슬아치’라는 뜻일 수도 있는 것처럼, 정화의 말은 지금 남아있는 단서나 기록과 견주어서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하고 나서야 받아들여야 한다.


2. 가설 2 :


- 서기 455년(이 무렵 페루의 나스카 평원에 커다란 그림들이 그려졌다), 양(梁) 나라(중국 남조 왕조)의 ‘혜심’이라는 불교 승려가 ‘부상(扶桑)’으로 항해했다? (그는 부상에서 양나라로 돌아온 뒤, 부상의 원주민과 식물, 풍습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는데, - 이것이『양서(梁書)』「부상전」이다 - 이것이 메히코 원주민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 또한 그가 항해했다는 거리는 중국 남경에서 캘리포니아 남부 - 메히코와 미국의 접경지대 - 까지의 거리와 같다. 만약 혜심이 진짜로 메히코에 왔다면 해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 이 가설의 문제점은 한족이 뛰어난 해양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서기 1972년에 발견된 바위들(35~40개)은 중국 배(정크선?)의 닻과 비슷하고, 사람이 일부러 구멍을 뚫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분석 결과 중국 채석장에서 온 돌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청나라 배의 유물일 수도 있다.


* 잉걸의 주석 :


나는 혜심 선사가 양나라를 떠나 북아메리카(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에서 메히코 중부까지는 북아메리카에 속한다)에 다녀온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단, <히스토리 HD>와는 달리 그가 바닷길(태평양과 폴리네시아를 거치는 뱃길)이 아니라, 양나라에서 백제 본국으로 건너간 뒤 다시 고구리[高句麗]를 지나 아무르강 동북부까지 갔고, 다시 시베리아 북부로 올라가서 캄차카 반도와 알류트 열도를 건넌 뒤 북아메리카로 가는, 땅 길로 아메리카로 건너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돌아올 때에도 바닷길이 아니라 땅 길로 왔고, 그 때는 계림국도 들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 올릴 글에서 따로 다루겠다.

 
3. 가설 3 :


- 서기 1150년 웨일스(켈트 이름 ‘킴루[Cymru]’. 정확한 발음은 ‘컴ri'. 이곳 사람들은 켈트인의 후손이다 - 잉걸)의 ’매독‘ 왕자가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전설에 따르면, [킴루의] ’서쪽 땅‘으로 갔다고 한다. → 단, 이야기가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 매독 왕자와 그의 일행은 오늘날의 미국 앨라배마 주(州)로 갔다고 한다.


(앨라배마 주는 미국 남동부에 있고, 남쪽으로 메히코 만을 끼고 있으며, 앨라배마 강이 메히코 만으로 흐르기 때문에 일단 메히코 만 바닷가에 다다르면 강으로 배를 저어 내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잉걸)


- 웨일스 말로는 ‘집’이 ‘티(Ty)’인데, 앨라배마 주의 원주민(미국 원주민)인 ‘만’족의 낱말로도 ‘집’은 ‘티’다.


- 미국 원주민인 체로키(올바른 이름은 ‘차라기’고 원래 이름은 ‘다스라게’인데, 그들의 적인 다른 미국 원주민 ‘크리크’족이 그들을 ‘체로키’라고 불렀고, 북아메리카에 온 잉글랜드 인들이 ‘체로키’라는 이름을 받아들여 이 이름이 널리 퍼졌다 - 잉걸) 족의 전설에 따르면, “금발인 사람들”이 그들의 땅에 와서 돌로 성을 지었다고 한다(학자들은 미국 원주민이 이 성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 미국 조지아 주(앨라배마 주 바로 옆에 있다 - 잉걸)의 원주민인 ‘만단’족과 웨일스 인의 피가 섞였다는 주장이 있다(웨일스 인의 배와 만단 족의 배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 불행하게도, 서기 1837년 이후 순수 혈통인 만단 족이 사라져서, 이 주장의 입증이 불가능하다(그리고 웨일스 인의 배도 해류를 견디지 못한다).


* 잉걸의 주석 :


지도를 펼쳐보면, 킴루에서 배를 띄우고 서쪽으로 가면 에이레 섬에 닿는다. 그리고 에이레 섬에서 서쪽으로 가면 이론상으로는 북아메리카로 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순수한’ 만단 족이 사라져 버려서 유전자 조사로 이 가설을 입증하는 게 불가능하고, 중세 킴루의 배가 대서양의 “해류”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배”가 “해류”를 견디지 못한다면, 애초에 건너올 수도 없다!).


게다가 매독 왕자 이야기는 서기 16세기,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를 다스리던 시대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식민/점령/침략을 합리화하려고 매독 왕자 이야기를 지어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킴루는 중세시대부터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정체성이나 자립을 놓고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만약 잉글랜드 왕실이 “4세기 전 <웨일스>의 왕자가 바다 건너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갔는데, 그게 알고 보니 북아메리카더라. 그리고 <웨일스>는 우리 잉글랜드의 일부다. 따라서 우리가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우는 건, 옛 사람들이 한 일을 따라하는 것이자 이어받은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려고 했다면, 과연 그것을 ‘순수한 동기’로 봐야 할 것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앵글로색슨이 아닌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나는 그 때문에라도 이 이야기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그와는 별도로 콜럼버스 이전에 켈트인이 아닌 다른 백인(유럽인)이 북아메리카에 건너왔을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하는데, 차라기 족의 전설에 나오는, 돌로 성을 쌓았다는 “금발인 사람들”은 킴루 사람들이 아니라 바이킹이나 중세 서유럽 사람인 성전기사단[성당기사단/템플기사단]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메린드(Amerind)의 머리카락은 예외 없이 검은 빛이고,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은 고구리의 돌무지무덤이나, 메소아메리카의 테오칼리나, 자지라[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비슷하게 생긴 제단/무덤이나 돌과 진흙으로 네모난 집들을 만들었으나, “돌”로 “성”을 쌓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설에 나오는 “금발인 사람들”은 아메린드가 아니라 유럽, 특히 북유럽이나 서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서기 16 ~ 17세기에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통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로 만든 집을 지었지, “돌”로 “성”을 쌓지는 않았으므로 판단에서 제외한다).


그렇다면 바이킹과 성전기사단 가운데 누가 차라기 족과 만났을까? 둘 다 “금발인 사람들”이었으니, 밝히기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돌”로 쌓은 “성”이 힌트다. 바이킹 시대에 바이킹이 만든 요새는 통나무들을 한데 엮어 벽을 만들고, 나무 벽 앞에 참호를 파고, 벽 안에는 통나무와 진흙과 풀로 만든 집들이 모인 것이었다. 반면 중세 말기에 활동한 성전기사단은 돌을 깨서 만든 벽돌들을 모아서 성채를 지었다. 따라서 차라기 족이 만난 사람들이 “금발”인 유럽인들이라면, 그들은 바이킹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단원들일 가능성이 높다.


성전기사단 단원들이 바이킹 이후 - 그리고 콜럼버스 이전 - 에 북아메리카로 달아났다는 주장은 예전에도 나온 적이 있는데, 그 주장은 나중에 올릴 글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4. 가설 4 :


- 서기 1000년(그러니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주에 도착하기 492년 전) : 오세아니아의 원주민인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남미 바닷가에 왔다(이 무렵 바이킹인 ‘에릭슨’이 북미로 떠났다). → 서기 1380년에는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태평양을 모두 손에 넣었다.


- 폴리네시아 인이 남미에 닭을 소개했을 수 있다(칠레에서 닭의 뼈가 나왔는데, 그 뼈는 유럽의 닭뼈가 아니라 폴리네시아의 닭뼈였고, 콜럼버스 이전의 것이라는 연대 측정 결과가 나왔다).


- 폴리네시아 말의 낱말인 ‘쿠마라’는 고구마를 일컫는 말인데, 폴리네시아의 고유어가 아니고,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남미다(내가 <두산백과>를 뒤져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고구마의 원산지는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 북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되며 원종(原種)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약 2000년 전부터 중/남아메리카에서 재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옮긴이). 게다가 폴리네시아에서 숯이 된(한자말로는 ‘탄화[炭化]’한 - 옮긴이) 고구마가 나왔는데, 이 사실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콜럼버스 이전인 서기 1000년경부터 고구마를 길렀음을 시사한다(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남미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닭을 주고, 대신 남미 원주민들에게서 쿠마라를 얻어간 것일까? - 옮긴이).


- “폴리네시아인의 항해는 탐험이고 발견이다.”


- 칠레 바닷가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州) 바닷가에서는 뼈로 만든 낚시 바늘이 나왔는데, 이는 타히티(폴리네시아의 일부)에서 쓰인 것과 똑같다.


- 태평양에서 남미로 부는 무역풍은 항해를 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조건을 제공했다.


- 서기 1000년 ~ 1300년의 사람들로 보이는 뼈가 칠레의 섬에서 나왔는데, 분석 결과 그 뼈는 폴리네시아 인의 뼈였다(칠레 내륙의 원주민 뼈와는 다르다).


* 잉걸의 주석 :


나는 콜럼버스 이전에(그리고 제임스 쿡 선장 이전에)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남미와 북미 바닷가에 도착했다는 가설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세아니아는 ‘물’, 그러니까 ‘바다’가 둘러싸고 있는 지역인데, 이곳은 먼 곳을 갈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다면 고속도로나 다를 바 없으며,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배를 잘 만들고 먼 바다를 오가는 데 익숙한 해양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카누는 아주 크고, 돛대가 두 개 달려 있고, 넓은 돛을 펼치고 큰 배와 작은 배를 하나로 이어 만든 것이었는데, 태평양의 비바람과 파도를 견디면서 아주 먼 곳까지 사람과 짐승과 식물과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옛 헬라스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넓게 뻗어나갔으며(폴리네시아 사람들은 태평양을 무대로 삼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비롯한 헬라스 사람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삼았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몇 곱절은 더 크다!), 이는 그들의 카누와 뛰어난 항해술 덕분이었다.


온 태평양을 누비면서 식민지를 세운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태평양을 끼고 있는 남아메리카 서부와 북아메리카 서부에 다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 가설이 증거로 삼는 것들(닭뼈/고구마/사람 뼈/무역풍)은 기록이나 전설과는 달리 누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증거보다도 더 정확한 것이다.


71년 전, ‘소르 헤이에르달’이라는 학자는 남미 바닷가에서 뗏목을 타고 해류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면 폴리네시아의 섬들 가운데 하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뗏목을 타고 항해함으로써 입증했는데(그는 항해를 끝낸 뒤『콘 티키』라는 책을 써서 이 항해의 시작과 끝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남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다지 뛰어난 해양민족은 아니었으므로, 만약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갔다면 헤이에르달의 주장과는 달리 남미 원주민이 아니라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남미로 건너가서 남미 대륙 바닷가에 다다랐다고 봐야 한다.

 
나는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학자들이 중세시대 안데스 산맥(오늘날의 페루나 칠레)에서 만들어진 남미 원주민의 미라를 연구하다가, 그 미라의 식구[또는 아랫사람]들이 미라에 오세아니아에서 가져온 물질을 발랐다는 사실을 알아냈음을 보았는데, 이것도 폴리네시아와 남미가 교류(또는 교역)했다는 증거로 들 수 있다.


이런 관계가 콜럼버스 이전에 끝났는지, 콜럼버스 이후에 끝났는지, 아니면 마젤란 이후에 끝났는지는 앞으로 연구해서 알아내야 할 과제다.

   
5. 가설 5 :


- 서기 1000년 : 바이킹(스칸디나비아 인)이 북미에 도착했다.


- 오늘날의 캐나다 동쪽 끝인 ‘뉴펀들랜드’ 주(州)에 바이킹의 주거지가 남아있고, 바이킹의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은 ‘포도의 땅’이라는 ‘빈란드[내륙이다]’까지 갔다고 한다. 오늘날의 미국 뉴욕 시에 속하는 자치구인 ‘브루클린’에서 서기 11세기의 노르웨이 은화가 나온 것이 이 전설이 사실임을 시사한다.


* 잉걸의 주석 :


뉴펀들랜드의 바이킹 주거지와 브루클린의 노르웨이 은화는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다. 이는 북유럽 사회에 내려온 이야기인 사가(Saga)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가에 따르면 서기 995년(또는 서기 1000년), ‘레이프’라는 바이킹이 아메리카에 상륙했는데, 그는 거기서 “겨울에도 자라는 ‘포도’”(아마 야생 베리 종류였을 것이다)를 보았고, 원주민인 ‘스크뢸링’(‘못 생긴 사람’이라는 뜻)을 보았다고 한다.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 동부에 뿌리내린 뒤, 그곳 원주민들과 교역했으나(사가에 따르면 바이킹은 “우유”나 모직물을 주었고 원주민은 짐승의 털가죽을 주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돌했고, 결국 바이킹은 정착을 포기하고 북아메리카를 떠났다(내가 ‘히스토리 HD'의 다큐멘터리인 <인류 -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따르면, 바이킹이 스크뢸링이라고 부른 민족의 진짜 이름은 ’이누‘라고 한다).


“또, 미국 메인 주(미국 동북쪽 끝에 있는 주. 대서양을 끼고 있다 - 잉걸)와 북극 지방에서 바이킹과 관련된 물건들과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바이킹들이 이곳에서 원주민들과 여러 물건을 거래한 증거이다(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나는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도착과 식민 시도를 다룬 이야기는 오랫동안 북유럽 사회 안에서 맴돌았고, 그들 가운데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십자군 전쟁(서아시아 이름은 ‘프랑크인의 침략’)에 참전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유럽인 기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으며(아마 성전 기사단에 참여한 북유럽 출신 기사들도 이 이야기가 퍼지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서유럽의 성전기사단 단원들이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고, 그래서 성전기사단이 프랑스 왕과 교황에 의해 와해되고 탄압받았을 때, 그들은 보물을 챙겨 북아메리카로 달아났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유럽에 남아있던 성전기사단 단원들(물론 더 이상 기사는 아니었다)은 ‘서쪽 바다로 가면 나오는 땅’이 있다는 사실을 몰래몰래 전했고, 그들과 접촉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땅을 ‘중국’이나 ‘인도’로 생각해서 서쪽으로 배를 몰았던 건 아닌지. 이 가설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 생각이다.  


6. 가설 6 :


- 서기 530년 : 에이레(Eire)의 수도승 브렌단(영국식 발음 ‘브랜던’)이 서쪽으로 항해했다(옛 문서에 따르면, 그는 바이킹보다 먼저 그린란드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미국 코네티컷 주에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 아이슬란드의 화산과, 페로 제도(아이슬란드와 셰틀랜드 사이에 있는 섬들. 셰틀랜드는 ‘셔틀랜드 제도’라고도 하며, 알바[스코틀랜드]의 동북쪽, 노르웨이의 서쪽에 있는 섬들이다. - 잉걸)의 양을 묘사한 브렌단의 글이 정확해서, 최근에는 그의 글을 믿는 학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 에이레 사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항해 직전, 일지에 “나는 성(聖) 브렌단의 약속의 땅을 찾으러 간다.”고 적었다고 한다(그렇다면 콜럼버스는 브렌단이 간 ‘유럽 서쪽에 있는 땅’과, 마르코 폴로가『동방견문록』에서 다룬 아시아가 같은 것이라고 여긴 걸까? - 잉걸).


- 오늘날의 미국 북동부에 있는 ‘코네티컷’ 주(州)[대서양을 끼고 있다]에 서기 17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돌집이 있는데, 그것의 구조가 에이레의 중세 예배당과 비슷하고, 북미에서는 (켈트족의 글자인) 오감(오검) 문자로 보이는 부호들이 나온다(학자들은 그 “부호”가 가짜라고 주장한다).


* 잉걸의 주석 :


나는 브렌단이 페로 제도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간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에이레에서 배를 띄우면, 서풍이나 편서풍이나 북대서양 해류 때문에 동북쪽으로 밀려나고, 페로 제도로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페로 제도로 갈 수 있다면 거기서 다시 배를 띄워 아이슬란드로 건너가는 것은 쉬운 일이고, 그린란드는 아이슬란드와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갈 수 있다. 게다가 브렌단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로 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이슬란드의 “화산”과 페로 제도의 “양”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기 9세기에 페로 제도로 건너간 바이킹은 그곳이 사람 없는 섬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에이레 출신인 고행 수도승(천주교 수도사들)이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고, 바이킹은 그들을 쫓아내고 페로 제도에 뿌리를 내렸다. 이는 에이레 사람인 브렌단이 서기 6세기에 페로 제도로 왔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동족에게 에이레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바다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으며, 그래서 에이레의 수도승들이 페로 제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의 뉴욕 시의 바로 동북쪽에 있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 도착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서기 17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돌집”의 “구조”가 “에이레의 중세 예배당”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오감 문자로 보이는 부호들”은 가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내버려두고자 한다.


7. 가설 7 :


- 미국 원주민인 차라기(체로키)족 가운데, ‘중앙 부족’은 자신들이 서기전 600년에 북미로 건너온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 그러나 DNA를 조사한 학자들은 차라기 족이 히브리인이나 유대인과는 이렇다 할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남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렘바 족과는 다르다. 렘바족은 유전자 조사 결과 그들이 고대에 아프리카로 달아난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잉걸).


- 다만 학자들이 차라기 족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백인’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기 때문에, 논란이 끝나지는 않는다(클로비스 석기를 만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그들이 북아시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인’들과 만나 피가 섞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내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몇 해 전, 아메리카 원주민의 석기로 알려진 클로비스 석기가 시베리아 원주민의 그것과는 다르고, 오히려 유럽의 크로마뇽인이 만든 석기와 비슷하다는 학설이 나왔기 때문이다 - 잉걸).


8. 가설 8 :


- 서기전 3044년(서기 2010년 현재를 기준으로 삼으면 ‘지금으로부터’ 5054년 전) : 에콰도르(남미에 있는 나라. 페루의 북쪽, 콜롬비아의 서남쪽에 있고 태평양을 끼고 있다) ‘발디비아’ 지방의 원주민이 수준 높은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다(서기전 4000년부터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구주[九州 : 규슈]의 조몽인[일본열도의 원주민. 야요이인이나 고분인과는 계통이 다른 사람들이다 - 잉걸]들이 에콰도르로 건너갔나?).


- 6300년 전(서기전 4290년? - 잉걸) 전 일본 남부에서 화산이 폭발했고, 그 때 조몽인들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동(東)일본(본주[本州] 섬 동북부 : 잉걸) → 북해도(北海道) → 캄차카 반도 → 북미 바닷가(북미 대륙 서쪽. 태평양을 끼고 있다) → 에콰도르로 간 것일까?


- 발디비아 원주민의 도자기와 조몽인의 토기를 견주면 비슷한 무늬를 26가지나 찾아낼 수 있고, 두 인간집단이 기른 개의 뼈가 똑같으며, 그들이 즐겨 그린 모래시계 무늬가 일치한다.


- 일본 구주 남부의 일부에서 나오는 조몽인의 뼈와 남미 아타카마 사막의 원주민 미라에서 나오는 ‘HTLV - 1'이라는 병균이 있는데, 이 병균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거나, 남성과 여성이 성 접촉을 할 때에만 옮는다.


* 잉걸의 주석 :


이 가설의 약점은, 조몽인의 배가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배나, 페니키아 사람들의 배나, 바이킹의 배와는 달리 돛단배(또는 키가 달린 커다란 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배는 단순한 통나무배였는데, 설령 연안항해로 건너갔다 하더라도 그런 배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규슈 섬에서 화산이 터진 해는 서기전 4290년이고, 발디비아의 원주민이 수준 높은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해는 서기전 3044년인데, 만약 이것이 조몽인이 발디비아에 온 결과라면(그리고 규슈의 조몽인이 화산이 터지자마자 고향에서 달아났다면) 그들이 무려 1246년 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어서 문제가 된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라 하더라도(그리고 이미 아메리카에 와 있던 다른 원주민들을 피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하더라도) 규슈에서 발디비아까지 오는 데 1250년(반올림)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이 가설은 완벽할 수 없으며, 정설로 인정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설령 이 가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일본인(야마토 민족)이 ‘우리 조상이 콜럼버스 이전에 남아메리카로 건너간 증거’라고 주장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토기가 나타난 때와 토기의 양식과 개의 뼈와 병균이라는 물증으로 미루어 볼 때,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열도의 원주민인 조몽인이지, 오늘날의 일본인인 야요이인이나 고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9. 가설 9 :


- 미스르(영어 이름 ‘이집트Egypt'. 원래 이름은 ’케메트Kemet' - 잉걸)의 미라에서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물건이 나온다(콜럼버스 이전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접촉했다는 이야기인가?).


* 잉걸의 주석 :


나는 오늘날의 레바논 사람들인 페니키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가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과 교역했고, 그 뒤 지중해 세계로 돌아와 케메트 왕국에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물건”을 팔았기에 케메트(미스르)의 미라에서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물건”이 나온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첫째로 케메트 사람들은 뛰어난 해양민족이 아니었고(따라서 대서양을 건널 수 없다), 그건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대서양 쪽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페니키아 사람들은 지중해 뿐 아니라  케메트를 떠나 온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한 바퀴 돈 뒤 케메트로 돌아올 정도로 실력이 좋은 뱃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게시판의 글인「▩역사가 잊어버린 억울한 선구자들」을 참고하라).


게다가 페니키아의 배는 돛단배였고, 2층/3층으로 이루어진 큰 배였기 때문에, 그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것은 이론상 가능했다(나는 대서양에 있는 섬에서 페니키아의 동전이 나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28년 전에 읽은 책에 따르면, 메소아메리카의 고대 유적에서 고대 셈족 남성처럼 생긴, ‘수염을 기른 남자’를 본떠 만든 머리가 붙어있는 토기가 나왔고, 그것은 실제로 셈족을 보지 않았다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페니키아인은 셈족에 속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하고 고증해야겠지만, 적어도 서아시아의 해양민족(페니키아 사람들)이 대서양을 가로질러서 아메리카로 갔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


- 앞으로는 미대륙에 안 간 사람들을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는 서기 2010년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