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취재파일] 산신령은 진짜 할아버지일까?

개마두리 2018. 1. 27. 12:41

* 옮긴이의 말 : 이 글은 배달민족의 전통신앙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라 ‘믿음(종교)의 갈마(역사)’에 해당한다. 


- 서울방송(SBS) 뉴스


- 입력 : 2018.01.27


서울 서대문 독립문 쪽으로 북한산에 오르다 보면 인왕사를 지나 울퉁불퉁 버섯 모양으로 요상하게 생긴 선바위를 만납니다. 그 바위 바로 아래에 국사당이 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무속인들이 굿당으로 써온 건물입니다. 원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지금의 인왕산 자락으로 옮긴 겁니다.


용기를 내서 내부를 엿봅니다. 벽면을 죽 둘러가며 무신도들이 걸려 있습니다. 정면에 9점, 좌우에 3점씩입니다. 나중에『한국 민속 신앙사전』을 찾아보니 현재 21점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성계를 그린 아태조(我太祖. 여기서 ‘아我’는 ‘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무학대사, 최영 장군, 나옹선사처럼 무속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고려 말, 조선 초 인물들입니다. 모두 국가 민속 문화재로 지정된 어엿한 문화재들입니다.


호랑이(줄범 - 옮긴이)를 올라타고 앉아 오른손에 깃털 부채를 든 노인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딱 봐도 산신령입니다. 도교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누구나 아는 ‘금도끼 은도끼’ 설화에 나오는 산신령과 많이 닮았습니다.

     
느닷없이 의문이 듭니다. 산신령은 왜 하나같이 수염이 치렁치렁한 할아버지일까? 책과 논문을 찾아보고, 민속학자들에게 여쭤봤습니다. 뜻밖에도 산신령의 상당수는 여성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여(女)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 입니다. 가야산을 지킨다는 산신으로,『동국여지승람』은 “정견모주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고왕과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단, 나는 정견모주는 원래 실존인물이었고, 최영 장군처럼 죽은 뒤에 산신으로 모셔졌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합천 해인사의 국사단에는 지금도 정견모주를 모신 산신도가 걸려 있습니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후덕한 인상입니다.


지리산 산신도 여성입니다. 아래 사진은 쌍계사 성보박물관장인 순원스님이 촬영해 보내주신 여산신, 지리산 성모(聖母)의 모습입니다. 오른편에 당당히 호랑이를 거느리고 화려한 한복(치마저고리 - 옮긴이) 차림을 한 늠름한 중년 여성입니다. 옆에서 보좌하는 시자들도 흔히 보이는 동자승이 아니라 모두 여성입니다. 기품이 느껴지는 수작입니다.


지리산에는 성모상도 남아 있습니다. 정상인 천왕봉에 있던 이 성모상은 행방불명됐다가 1970년대 홀연 천왕사에 나타났습니다. 높이 74cm로, 귀와 손가락 끝은 없고 코는 옥석으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고려 말에 왜구 장수가 귀를 떼어가다가 즉사했다는 설화가 전하는 걸 보면 고려 말~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그러나 “설화”가 다루는 시기가 “고려 말”이라면, 이 “성모상”은 그 이전에, 그러니까 고리[高麗] 초기나 중기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양국시대[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 옮긴이).


아주 드물게는 무속(무교[巫敎] - 옮긴이)에서 여산신을 모셔 둔 경우도 있습니다. 남강 김태곤 선생(1936~1996)이 수집해 기증한 그림을 보면 언뜻 흔히 보던 무신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산신령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것, 그 사람을 상징할 만한 것'을 주로 지칭한다. “산신령의 트레이드마크”는 “산신령 하면 떠오르는 짐승”으로 고쳐 써야 한다 - 옮긴이)인 호랑이가 젊은 여산신 뒤에서 호위하고(지키고 - 옮긴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대 국가들은 하나같이 산천 숭배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는 신라였습니다(그러나 기록을 보면 백제/남부여도 뫼[山]를 섬겼다 - 옮긴이). ‘삼신산(三神山)’과 ‘오악(五嶽)’을 지정해 해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시조 박혁거세를 선도산(경주 서쪽에 있는 높이 381m 산) 성모가 낳았다는 전설이『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영취산(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남 양산시 사이에 있는 높이 1,081m 산)의 산신, 김유신을 보호했다는 신라 3산의 산신도 모두 여성입니다.


고려(고리 - 옮긴이) 왕조 역시 전국 명산에 제단을 만들어 치성을 드렸습니다. 특히 시조인 왕건이 여산신인 평나산 성모의 후손이라고 기록한 것 등을 보면 여산신 숭배가 이 때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단군이나 석탈해처럼 남성이 산신이 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후에 벌어진 일이고, 여산신은 애초부터 산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 원시 모계 사회의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 왕조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모계가 산신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민초들의 여산신 신앙을 정권의 정통성 강화에 이용한 것(써먹었기 때문 - 옮긴이)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여산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남아 있는 산신도는 거의 다 조선 후기 작품이기 때문에 이를 분석해 그 시기를 밝혀내긴 어렵습니다. 민속학자들은 대체로 가부장적인 유교(더 정확히는 성리학 - 옮긴이)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산신들이 사라지거나 할아버지로 대체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인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한국민속신앙사전』에는 “고려로 오면서 산신의 성은 대부분 남성으로 바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신이 남성으로 바뀌면서 개성 덕물산, 나주 금성산에서는 산신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습까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 근거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 김창호 학예사는 “조선 중기에 ‘음사’라고 핍박을 받던 무속이 사찰 안에 ‘산신각’의 형태로 불교와 융합하게 된다.”면서 “산신의 신격이 바뀌었다면 그 시기쯤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가요? 저는 최근까지도 인왕산 국사당이든, 사찰의 산신각이든, 천왕문이든 뭔가 요란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모셔둔 장소를 갈 때면 좀 으스스한 느낌을 갖곤 했습니다. 마음속에 쌓아둔 편견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근 <저승사자>에 이어 <산신령>을 취재하면서 온갖 종류의 귀신, 신장, 산신, 무신을 그린 문화재들을 접하면서 이런 공포심이 싹 사라지더군요. 어쩌면 너무 몰라서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김명진 기자 km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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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2 : 그러고 보니, 배달민족의 옛 이야기에 나타나는 도깨비도 - 통념과는 달리 - 머리에 뿔이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뿔이 달린, 초자연적인 존재는 사실 일본의 귀신인 ‘오니’란다]. 이처럼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옛 모습 - 그리고 옛 정신세계나 문화 - 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 말고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