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들었던 조선인들

개마두리 2018. 1. 30. 20:56

- 금영재(이산아카데미 기획본부장)의 글


- 발행 : 2017-08-23


- 수정 : 2017-08-24


- <민중의 소리> 기사


- 항일투쟁의 전설, 동북항일의용군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동료 3명과 함께 일제 쓰카다 병영을 탈출했다. 충칭 임시정부를 향한 6천 리 장정의 시작이었다. 병영에서 조선인들이 보인 비루한 모습이 그의 결행을 재촉했다.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고참병이 외출로 배를 채우고 돌아와 ‘짬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달걀에 비벼 한 숟갈 먹곤 남은 밥을 조선인 병사들에게 던졌다. 조선인 사병들은 마치 개처럼 몰려들어 맨손으로 그걸 먹었고, 한 입이라도 더 먹겠다고 일본 고참에게 갖은 아양을 떨었다. 태어날 때부터 일장기부터 보고 자란 청년들이었다.


그가 모멸감을 견딜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육군 지휘관이었던 자도 그 속에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동료와 함께 ‘잔반불식동맹 殘飯拂拭同盟’이라는 ‘자존심 비밀동맹’을 만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국민당) 중앙군관학교를 거쳐 충칭 임정으로 향했다. 중앙군관학교에 ‘한국 광복군 훈련반’이 있었지만 죄다 쓸모없는 정신교육뿐이었다. 3개월의 교육 기간이 얼마나 지루했던지 장준하가 강연을 자청했다. 내용은 ‘아가페와 에로스’였다. 이마저도 얼마나 참신했던지, 훈련반의 조선 청년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국민당의 장제스와 리쭝런은 의열단과 임시정부를 지원했지만, 실속 있는 지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 독립지사들이 좋은 선전 소재라는 점을 활용했다. 일제 병영을 탈출한 50명의 조선 청년들은 대일항전을 호소하는 연극을 했다. 공전의 히트였고 임정과 각 당파는 청년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 “나는 돌아가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질 것입니다.”


충칭의 임정에 도착한 장준하의 인사말로 환영식장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린 우리나라 국기도 본 적 없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이 임정 청사에 높이 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우리 울음을 삼키며 눌렀던 감격, 이것 때문에 우린 6천 리를 걸어왔습니다. 왜놈들은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 일인이 되길 원한다고 날조하지만, 그 반증은 여기 서 있는 우리 50명입니다!”


김구가 훅! 하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처절한 통곡이 이어졌다. 모처럼의 좋은 음식에 손대는 자가 없었고, 말도 없는 울음바다는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김구가 “너무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갑시다.”라는 말로 산회 되었다.


감격이 환멸로 바뀌는 데는 2주가 걸리지 않았다. 장준하는 임정 내각과 교포 100여 명이 모인 주회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해 충칭 폭격을 지원할 것입니다.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왜놈에게 받은 설움을 모두 잊었습니까? 어찌 임정이 네 당 내 당 하며 겨누고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시 임정에는 정당만 6개, 계파는 셋집 임정의 의자 수보다 많았다. 심지어 일인 일당도 있었다. ‘좌우통합 전선정부’ 성격의 임정을 이해할 만큼 청년들의 피가 식진 않았다.


▶ 장준하의 통한, OSS 특전임무


이후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의 주선으로 시안비행장에서 OSS(미 육군 극동전략사무국)의 특전훈련을 받는다. 400여 특전요원의 임무는 미군의 조선 진입 시 최전선에서 첩보활동과 유격대 조직 및 군 시설 파괴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상륙지점은 한국 서해안이었다. 하지만 장준하 일행을 태운 수송기는 여의도까지 갔다 돌아오는 해프닝 끝에 무위에 그쳤다.


예상보다 빨리 일제가 항복했고, 미 항모가 도쿄 만에서 피습되는 등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미 극동사령부가 태평양사령부로 개편된 이유도 있었다. 장준하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광복군 작전을 위한 C-47 수송기 한 대마저 아깝다고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폭죽 소리가 대포 소리였던 거리와 달리 임정 청사가 고요한 침묵에 빠진 이유다.


이승만은 비록 개인 자격이지만 10월 16일 미 군정의 사이드 카 호위를 받고 들어와 20일 연합군이 주최한 환영대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미 일본에서 맥아더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한 미 사령관 하지에 이승만을 소개한 뒤였다.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정 각료와 장준하는 텅 빈 김포의 벌판에 내려야 했다. 그들을 기다린 건 미군 장갑차 6대였다. 귀국환영을 준비하고 있던 측조차 일정을 몰랐다. 임정으로 권력 이양을 주장했던 김구는 방송국 환국 연설을 하며 이 말을 콕 찝어 넣었다.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임정 인사들이 3달을 기다려 오직 개인 자격으로 환국했는데, 사정은 북한도 비슷했다. 조선(왜국 점령지 한국 - 옮긴이)으로 진격하던 2만의 중국공산당 계열의 ‘조선의용군’ 역시 소련군에 막혀 북한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나중 11월이 되어서야 개인자격으로 입국한 이들이 소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된 ‘연안파’의 모태다. 장준하는 ‘OSS의 작전만 실행되었더라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 개탄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한 축이었지만, 중국은 동북지방의 조선인 항일의용군의 투쟁을 크게 평가해왔다. 사회주의 계열과 혼재되어 국내 방송에선 소개하기 껄끄러운 소재지만, 1920~30년대의 동북지방(이른바 ‘만주’ -  옮긴이)을 모르면 씨줄과 날줄로 얽힌 한국, 북한(조선 공화국 - 옮긴이), 중국의 현대사를 모르는 것과 같다. 독립을 위해 중국 땅에 피 흘린 조선인이 너무나 많다.


▶ 항일투쟁 전설의 시작, 동북 항일의용군


19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을 침공했을 때(왜군이 이른바 ‘동북 지방’을 점령하고 왜국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을 때 - 옮긴이) 중국인은 두 번 놀랐다.


첫째는 거대한 땅덩이에 수백만 정규군을 확보하고 있던 대륙을 감히 섬나라가 넘봤다는 것이고, 더 큰 충격은 중화민국 최강이라던 장쉐량의 동북 군이 총소리 하나 못 내고 퇴각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동북 3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정규군보다 강력한 반격에 부딪혔다. 장쉐량의 이동 명령에 불복하고 남은 지휘관들은 혈전을 치렀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조선인이 들고일어났고, 헤이룽장성에선 국민당 잔류부대와 의용군이 모여 3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육박전 끝에 일본군을 천여 명 가까이 사살했다. 동북지역에 남은 인민들, 당시 이들이 유례없이 간고한 10년 대혈투를 벌일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중국당국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일본 침략자와 장장 14년 동안 전투를 해 40여 명의 지도자가 장렬하게 희생되었고, 76만 명의 일본군을 견제했으며 18만 명의 침략자를 소멸해 중화민족이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며 불굴의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했다. 또한 전국의 항일전쟁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을 지원했다.”


조선(한국 - 옮긴이) 청년들은 돈이 조금 생기면 총을 사기 위해 암시장을 뒤지고 다녔고, 중국인(한족[漢族] - 옮긴이)은 창검술을 할 줄 아는 청년을 모아 유격대를 만들었다. 심지어 병력과 총을 얻기 위해 감옥을 털었다. 명칭은 달랐지만, 이들이 바로 ‘동북 항일의용군’이다. 20대는 물론 10대 소년도 많았다.


일제가 동학군을 진압(‘학살’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할 때 쓴 총이 ‘무라타 연발 소총’이었다. 당대엔 이 총이 최고였고, 러시아제 소총도 꽤 쓸 만했다. 조선 청년들은 총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빛이 돌았다. 아편은 물론, 담배와 술마저 끊는 젊은이가 많았는데 돈을 모아 총을 사려 했다. 3.1항쟁의 의의와 제한성을 지도자들이 떠들지 않아도 부모/형제의 주검을 봐야 했던 조선청년은 몸으로 체득했다. 무장투쟁이 답이었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유격전이 벌어졌다.


▶ ‘총 맛’을 알아버린 조선 청년들


총 이야기를 하자면 ‘철혈광복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20년 간도의 조선 청년 6명이 일본영사관으로 가는 현금수송 차량을 털었다. 총을 쏴 마부와 호송 경찰을 죽이고, 반항하는 놈은 쇠몽둥이로 내려쳐 죽였다. 조선은행의 만주철도 자금 15만 원이 나왔다.


청년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을 살 계획이었다. 당시 러시아 5연발 소총 한정과 100발의 탄환, 탄띠가 30원에서 100원이었으니 잘만 흥정하면 4천 정가량의 총과 탄환을 구할 수 있었다.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했던 독립군이라 여긴 변절자와 상의한 것이 화근이었다. 총값을 흥정한다고 무기업자와 거한 술판을 벌였는데 이날 한 명만 탈출하고 모두 체포되었다. 거금 또한 그대로였다. 변절자는 엄인섭이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은 배역, 염석진과 묘하게 닮았다.


중국인은 만주사변 이전엔 조선 청년들이 죽기 살기로 무장투쟁에 뛰어드는 걸 이해 못 했다. 중국 군벌이 독립군부대를 찾아와 ‘시끄러우니 제발 저 멀리 연해주로 가서 싸우라’고 하소연하는 건 양반에 속했다. 일제와 결탁해 독립군 사냥으로 돈 버는 중국 마적이 득실거렸다.


37년 전 동학 항쟁(동학 혁명 - 옮긴이)이 있었고, 이 항쟁에서 살아남은 이가 의병 전투를 이어가고, 3.1 운동(만세시위/3.1 항쟁 - 옮긴이)은 연해주, 만주의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은 의열단과 임시정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탄생한 영웅의 시대이며, 대학살의 시대였다. 무대는 연해주에서 길림을 중심으로 한 만주일대다.


▶ “연길은 전시상태며 조선인은 흥분상태다.”


1910년대에 이미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는 한 달이 멀다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했다. 작은 전투들이었지만 국내 진공이었다. 연해주와 간도의 조선인들을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처음엔 함북지역의 포수들을 불러 모아 유격전을 했고 이후 독립단체와 연계해 400명 단위로 진공해 한 번에 수십 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상해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 - 옮긴이)가 놀란 나머지 두 명의 요원을 급파해 사실을 확인할 정도였다.


일제 정보기관은 홍범도와 지역 민심을 이렇게 보고했다.


“홍범도는 간도와 백두산을 넘나들며 지형을 익혔는데 조선과 간도의 지형 읽기는 신 神에 가깝다.”


“의란구 지방(연길)은 전시 분위기며 정신은 일종의 흥분상태다. 사람들은 홍범도를 심히 숭배하고 있다. 한족(조선) 독립이 다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아주 많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이라 불렀고 평안도 지방 민중은 ‘축지법을 쓰는 장군’이라는 전설을 믿었다. 험한 준령 타기를 업으로, 호랑이 잡으러 다녔던 산포수 부대의 대장이었던 홍범도에게 걸맞은 평가다.


“홍대장 가는 길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


당시 평안도를 풍미했던 '날으는 홍범도'의 가사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를 부르며 ‘일본놈’을 이기기만 하면 스포츠 스타와 비행사에게도 열광했던 시절이다. 일제 경성헌병대 정보자료엔 당시 만주와 러시아에 결집한 독립군 병력이 1만 6천이고, 국내 진공은 시간문제라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


▶ 홍범도가 크게 이길수록 동포들은 더 많이 학살당했다


1920년 6월 4일, 홍범도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일제 헌병대를 박살내고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다. 추격한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전멸하고, 다시 덤빈 추격군이 봉오골에서 무리 죽음(떼죽음 - 옮긴이) 당했다. 대한독립군 1,200여 명이 일본군 500명을 궤멸시켰다. 독립전쟁 1회전, 봉오동 전투는 무적황군의 신화를 처음으로 깼다.


홍범도의 기질은 청년 이봉창만큼이나 독특했다. 자신을 착취하던 제지소 주인 3형제를 도끼로 죽이고 항일의병에 나섰다. 함경도 철령 고개에서 동료 김수협과 단둘이서 화승총으로 일본군을 10명을 죽여 총을 노획했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결심도 순간이고, 일본군에 대한 습격도 간단했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정보원들의 자료를 종합해 홍범도의 특질을 기록에 남겼다.


“홍범도는 호걸의 기풍이 있어 (중략) 독립군 각파가 항상 행동일치를 하지 못하고, 각 독립군이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하고 단독행동을 취해 함남 삼수, 갑산의 국경을 습격해 여론을 환기하고 독립군의 의기를 보이려고 하는 등 본격적 기백을 토로하기도 하여, 역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봉오동 전투 후 일제는 2만 5천의 병력으로 북간도를 포위했다. 훈춘, 왕청, 화룡 일대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경신참변). 영아를 대창에 꽂아 어미 앞에 던졌고, 여성은 강간 후 죽이고 아이들을 한 줄에 말아 불구덩이에 던졌다. 독립군과 가깝다 싶은 사람은 얼굴 가죽을 뜯거나 눈을 파냈고, 이미 살해당한 아버지를 땅에 묻으면 다시 파내게 해 유골이 모두 바람에 날릴 때까지 석유로 태웠다. 실험용으로 독가스도 동원했다. 10월부터 두 달간의 통계만으로도 이 일대 조선인 3천 664명이 살해당했다. 학교, 교회, 민가 등 남은 곳이 없었다.


▶ 한/중/북이 모두 인정하는 항일명장 양세봉


같은 시기 10월, 화룡현 청산리 부근에서 1,200 명의 조선독립군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6일간 10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연대장, 장교 200여 명을 비롯해 1,200여 명의 일제 토벌군을 죽였다.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 북로군정서가 주력이었다.


조선독립군의 승전 뒤엔 학살이 잇따랐다. 크게 이길수록 학살의 범위도 넓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모르면 이후 1930년대 폭풍같이 일어선 조선청년들의 무장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도, 왕청, 용정, 화룡 등 길림의 항일유격대는 조선인의 피를 먹고 성장했다.


김좌진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소련으로 넘어간 홍범도 부대는 무장해제 당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끼리 서로 죽이는 자유시 참변이 빚어졌다. 소련 영도자 레닌에게 권총도 선물 받았지만, 강제이주와 노동으로 말년은 불우했다. 지도자는 곧잘 죽거나 떠났지만, 조선인은 약간의 쉼도 없이 반일 무장투쟁을 했다.


조선혁명군 대장이었던 양세봉은 홍범도, 김좌진의 빈자리에 남아 1934년까지 항일유격전쟁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모두에게 존경받았고, 지금은 중국과 남과 북 모두 그의 업적을 인정한다.


중국인과 조선인(한국인 - 옮긴이) 사이엔 한일관계처럼 큰 불신의 강이 있었다. 중국인은 조선인을 “전투 한번 없이 일제에 나라를 바치더니, 이젠 일본인이 되려고 안달한다.”고 보았다(사실, 이건 오해다.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하기 세 해 전, 정미의병이 들고 일어나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들이 진 뒤에야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했다 - 옮긴이). 만주엔 중국말과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일제 앞잡이 조선인도 있었고 무엇보다 간도이주정책으로 대거 둥지를 튼 조선인과의 갈등도 심했다.


양세봉은 조/중 연합유격부대를 만들어 조중 단결의 모범을 보였고 민중에게 헌신적이었다. 일제와 싸우겠다면 이념과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아무리 훌륭한 싸움꾼이라도 인민 위에 군림하면 가차 없었다.


- 기사 원문 :


http://www.vop.co.kr/A000011932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