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597년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주하다가(달아나다가 – 옮긴이) 한 소나무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날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수군은 전멸했다. 거북선을 비롯해 170여 척에 달하는 전함이 (왜군에게 – 옮긴이) 격파되었고 1만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틀 뒤인 7월 18일, 백의종군중이던 이순신(시호 ‘충무공’ - 옮긴이)은 도원수(都元帥) 권율의 허락을 받고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패전지로 향했다. (근세조선의 – 옮긴이) 백성을 위로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약 한 달 뒤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한 이순신에게 “조선 수군은 더이상 가망이 없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종군하라.”는 어명(임금의 명령. 그러니까 선조의 명령 – 옮긴이)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하고 – 옮긴이) 대답했다.
그리고 9월 16일, 이순신은 패잔병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그 전날 밤, 장군(이순신 – 옮긴이)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는 내 명령을 조금도 어기지 마라. 만일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군율(軍律. 군대 안의 규율 – 옮긴이)대로 처리할 것이다.”
이순신이 말한 병법은 『 한비자 』 와 『 사기열전 』 에서 ‘손무의 『 손자병법 』 과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한 『 오자병법 』 이다. 오기(吳起. 존칭은 “오자[吳子]” - 옮긴이)는 『 오자병법 』 「 치병(治兵. ‘군대[兵]를 관리함[治]’ → 군대를 관리하고 훈련함 : 옮긴이) 」 편에서 말했다.
“죽음을 각오한 자는 살고, 살기를 바라는 자는 죽는다([필사즉생 행생즉사 – 옮긴이] 必死則生 幸生則死).”
그리고 (오기는 – 옮긴이) ( 『 오자병법 』 의 – 옮긴이 ) 「 여사(勵士) 」 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목숨을 버리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인투명 족 구천부 – 옮긴이] 一人投命 足懼千夫 .”
이순신은 자신보다 약 1800년 일찍 태어난 오기가 쓴 병법서(그러니까, 『 오자병법 』 - 옮긴이)에 나오는 말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필사즉생 필생즉사 – 옮긴이] 必死則生 必生則死).”/“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 옮긴이] 一夫當逕 足懼千夫).”라고(로 – 옮긴이) 바꾸었다. 그리고 이 두 문장으로 패배의식에 찌든 부하들을 인류 역사상 최강의 전사들로 탈바꿈시켰다.
어쩌면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는 기적 같은 전적(戰績. 상대와 싸워서 얻은 실적 – 옮긴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병법서 중(가운데 – 옮긴이) 하나인『 오자병법 』을 활용한 덕분이 아닐까?
아니, 아니다. 이순신은 오기의 병법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손무(존칭은 ‘손자[孫子]’. 『 손자병법 』 을 쓴 사람이다 – 옮긴이)의 병법도 뛰어넘었다.
대표적으로 『 오자병법 』 과 『 손자병법 』 모두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더 많으면, 절대로 (맞서 – 옮긴이)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명기(明記. ‘똑똑히 밝히어[明] 적음[記]’. → 분명히 기록함 : 옮긴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력이 열 배나 더 많은 적(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 – 옮긴이)과 싸우는 것을 선택했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어떻게 오기와 손무를 뛰어넘는 병법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이순신에게는 오기와 손무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백성을 향한 사랑이었다.”
- 이지성, 『 생각하는 인문학 』, 10 ~ 12쪽
- 『 생각하는 인문학 』( 작은 제목 「 5000년 역사를 만든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 ‘이지성’ 지음, ‘(주)문학동네’ 펴냄, 서기 2015년 )에서
▶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내가 이 글을 소개하면서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 정부, 아니, 용산 총독부가 독도 구조물을 없애고 홍범도 대장이나 김좌진 장군을 군대의 정신교육 교재에서 없애며 “(서기) 1945년 8월 15일이 광복된 날이라고 여기는 한국인들은 사실을 잘못 아는 것이다!”하고 떠드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서기 1909년(대한제국이 망하기 바로 앞 해)이나 (대일[對日] 항전기인) 서기 1924년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을 보내 근세조선을 침략한 서기 1592 ~ 1598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문에라도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사옵니다.”고 말하며 수군으로 왜군과 싸우기를 고집한 충무공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 충무공이 고전이자 병서(병법을 담은 책)인 『 오자병법 』 을 참고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근세조선 수군이 처한 상황에 맞게 바꾸어 그 바꾼 병법으로 적군(왜군)과 싸워 이긴 점이 ‘옛 사람의 뛰어난 이론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상황에 맞게 써먹은 충무공의 훌륭함’을 입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외우기만 하지 않고, 그것을 유연성 있게/융통성 있게 바꿔서 써먹은 충무공의 자세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셋째,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고, 병법이 가르치는 것을 어기면서까지 왜군과 맞서 싸워 근세조선의 백성들을 구하신 충무공의 드높은 정신(그러니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야말로 난세이자 말세인 오늘날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과 힘이 남아있고, 그러니 종일(從日) 세력과 왜국(倭國) 정부/우익/재벌/언론과 맞서 싸우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왜국에 맞서 온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부디 이런 내 뜻이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해졌기를 빈다.
- 단기 4357년 음력 7월 23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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