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1941 ~ 1945, 태평양전쟁 - (5) : 끝

개마두리 2024. 10. 9. 22:32

일본군은 얼마나 강했는가

 

(전략) 동북아(동아시아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의 일본군(왜군[倭軍] - 옮긴이)은 고대 이래로 그리 강군이 아니었다. 중세 무사정권 이후에는 시종일관 전사국가였음에도 그렇다.

 

이유(理由. 까닭 옮긴이)는 간단하다. 변방에 위치하여(자리하여 옮긴이) 과학기술이 뒤떨어졌고, 그런 만큼 무기(병기[兵器]. 순수한 배달말로는 잠기’ - 옮긴이)와 장비가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기습전과 단기전에 강했다. 항상(옮긴이) 싸우고 있었으므로 병력 자체는 상시적으로 실전에서 단련된 정병(精兵. 우수하고 힘센 군사 옮긴이)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기 고리[高麗] 말기에 일어난 옮긴이) 왜구의 약탈과 (서기 1592년에 일어난 전쟁인 옮긴이)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6년 전쟁 옮긴이)에서 일본군이 초기에 성공한 이유다.

 

그러나 정규전에서는 약했다. (서기 옮긴이) 663년 나당연합군(/당 연합군 옮긴이)에 맞선 백제(남부여 옮긴이)/왜 연합군의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의 패배, 일본 본토 정벌에 나선 몽고군(몽골군 옮긴이)과의 야전에서 겪었던 수세, 고려(후기 고리 옮긴이) 장군 최무선/최영/이성계 등에게(같은 사람들에게 옮긴이) 당한 결정적인 패배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백촌강전투는 백강구전투라고도 하는데, 일본서기 에는 백촌강, 구당서 삼국사기 에는 백강구[白江口]로 기록되어 있다. 동진강 하구라는 설도 있지만 백마강 하구가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정설은 없다. 이 전투에서 왜군 27000 포함 백제/10만 연합군이 괴멸함으로써 부여풍을 끝으로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편집자)

 

이 전쟁들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는 언제나 준비가 안 된 적군에 대한 초기의 기습전들이었으며, 패배한 전투는 화력이나 정규전 전술의 열세에 기인(起因. ‘일어나는[] 까닭[]’ 일이 일어나는 원인 : 옮긴이)한 것이었다.

 

동북아에서 몽골 초원의 (유목민/기마민족인 옮긴이) 전사들이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과 한국의 농경문치국가의 군사력에 비추어 총체적인 전력은 일본이 가장 뒤떨어졌다. 문명의 변두리에 위치하며 대륙과 교류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자신들끼리 아무리 전쟁을 하고 군사력을 강화해도 무기와 전술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역전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 과학문물을 적극 수용하여(받아들여 옮긴이) 군비(軍備. 전쟁을 위한 준비. 여기서는 군사 장비를 줄인 말로 쓰였다 옮긴이)를 비약적으로 강화한 데서 기인한 현상이다.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이 사정을 명확히 드러냈다.

 

청일전쟁은 청나라 입장에선 외부에서 벌어진 국지전이다. 게다가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버티고 있는 등 아직은 건재한 청군이라 해도 아편전쟁(올바른 이름은 1차 영 청 전쟁’ : 옮긴이) 이후 이미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던 군대였다.

 

반대로 일본군(근대 왜군[倭軍] - 옮긴이)은 당시 첨단의 군사강국이던 영국의 장비들을 갖추었다. 고래(古來. ‘자고이래[自古以來]’를 줄인 말. ‘예부터 지금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로 준비된 전사국가로서 일본군의 기습적 진격능력에 장비의 우월성이라는 날개를 달았으므로 청일전쟁은 일본군이 손쉽게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한편 일본(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의 침탈에 저항한(맞선 옮긴이) 조선의 의병(서기 1907년에 들고 일어난 대한제국의 정미의병? - 옮긴이)은 더욱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동학군이든 의병이든 이미 서구의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의화단 봉기 옮긴이) 이후 급속하게 약화되고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중국(사실은 외부인으로서 제하[諸夏]를 점령/지배했던 청나라 옮긴이)은 더욱 약화되었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와 중국 본토 침략은 그만큼 수월해졌다. (국민당의 중화민국 군대와 군벌들의 군대를 모두 합친 - 옮긴이) 중국 군사력이 정체되거나 약화된 반면, 일본은 비상한 속도로 군사력을 강화시켰기(강화했기 옮긴이)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왜군의 군사력은 옮긴이) 일본의 오판만큼 강화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중화민국과 근대 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 옮긴이)에서 빈약한 중국군을 얕보던 일본군(근대 왜군 옮긴이)3개월이나 6개월 만에(석 달이나 여섯 달 만에 옮긴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이[] - 옮긴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전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중국군은 넓디넓은 중국(당시에는 중화민국 옮긴이) 전토(全土. ‘[] []’ 국토의 전체/어떤 땅의 전부 : 옮긴이)에 퍼져 게릴라전(유격전 옮긴이)을 벌였다. 장제스(장개석 옮긴이)의 국민당군은 내륙 깊숙한 충칭(중경 옮긴이)으로 들어가 주둔했고 마오쩌둥(모택동 옮긴이)의 홍군(오늘날의 인민해방군’ - 옮긴이)은 집요하게 후방을 괴롭혔다.

 

이런 중국군을 제압하려면 항공기를 비롯한 여타의 운송수단과 보급이 넉넉히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먼 길을 진창 속에서 걸으며 피로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한다. 이래서는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중국군을 격퇴하기는커녕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것을 극복할(이겨낼 옮긴이) 만큼 강력하지(힘이 세지 옮긴이) 못했다. 이 거대한(커다란 옮긴이) 땅에서 벌어진 전투에 비추자면 일본군은 기껏해야 재래식 군대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순간까지 일본은 이 가망 없는 소모전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대신 (근대 왜군은 옮긴이) 악명 높은 삼광작전(三光 : 살광[殺光]/소광[燒光]/창광[搶光],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한다는 작전 편집자)을 통해 무수한 중국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학살했다. 말했듯이 본래 일본 무사의 정신력이란 민간인 등의(같은 옮긴이) 약자에 대해 잔혹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본군의 전력은 이 정도였다.

 

반면 서구제국과의 전투에서는 사실상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옮긴이) 흔히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말한다. 승리인 것은 맞다. 그리고 이 승리는 차후(此後. [] [] - 옮긴이) 일본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청일전쟁 같은 승리가 아니다. 청군(원문에는 <>’으로 나오나, 비교 대상이 로[Ro]시야 제국이 아니라 로시야 군이기 때문에 <>’으로 바꾼다 옮긴이)과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러시아([Ro]시야 옮긴이) 군대를 상대하느라 일본은 거의 모든 국력을 소진했다.

 

게다가 (그들은 옮긴이)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영국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전비(戰費. 전쟁에 드는 비용 옮긴이)의 절반을 영국 차관에 의존했다.

 

이만큼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일본 자신의 힘만으로 싸웠다면 아마 러일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 운이 좋았던 건 1905년 러시아 본국에서 발발한 민중혁명이었다. 일본은 이런 계기들을 기회로 강화를 갈망했다. 미국의 중재를 통해 겨우 전쟁을 멈출 수 있었으며, 덕분에 만주(간도와 흑룡강성 옮긴이)와 조선(대한제국 옮긴이)에서의 이권을 얻어냈지만, 가장 중요한 전쟁 배상금은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다.

 

이는 청일전쟁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결말이다. 청일전쟁에서는 당시 일본 연 예산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 이후 국가재정과 군비강화에 더할 수 없이 요긴한 자산으로 삼았지만, 러일전쟁에서는 그보다 몇 배의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도 한 푼의 배상금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일본은 강화를 해야 했다. 그만큼 힘에 겨운 전쟁이었고, 일본군(근대 왜군 옮긴이) 전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전쟁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처음엔 승전 축하 물결이 넘실댔지만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강화 내용이 전해지자, 도쿄에서는 일본 민중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히비야 대폭동이 발생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勘案. 참고하여 생각함 옮긴이)하면 일본이 러시아를 이겼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거의 한 세대인 서른 네 해가 지나서 옮긴이) 1938 ~ 1939년 장고봉/노몬한 전투(장고봉[張鼓峰]은 두만강 유역의 중/소 국경지대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으로,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 사단 병력이 점유권을 놓고 19387월 말부터 공방전을 벌이다가 피차 수백명의 전사자를 낸 채 10여 일 만에 휴전했다. 그런데 소련군을 얕본 일본군이 장고봉전투의 연장으로, 이듬해 5월 몽골 초원 할힌골 일본에서는 노몬한으로 부름 에서 소련군에 도발하여 8월까지 1,2차에 걸쳐 피차 대규모 병력, 전차, 화포, 전투기를 동원한 가운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노몬한 전투[한국인들은 이 전투를 할힌골 전투로 불러야 하지 않나? - 옮긴이]에서 일본군은 최소 5만여 명이 사상당하는 괴멸적인 참패를 당하고 말았는데, 소련군의 막강한 화력과 우월한[뛰어난 옮긴이] 기계력 앞에서 일본군의 정신력따위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을 뼈아프게 새겨준 전투였다 편집자)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비록 만주 서북지역 몽골 국경에서 벌어진 국지전이고 일본은 서둘러 강화를 체결하여(맺어 옮긴이) 소리 없이 사건을 덮었지만, 이 전투는 일본군의 실제 전력과 차후 태평양전쟁 운명의 전조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일본군의 전력을 단련된 대규모의 조직폭력단 수준이라 가정하자.

 

여기에 비추면 당시의 조선군(근세조선의 신식 군대와 대한제국군 포함 옮긴이)은 초등학생들 모임이었다. 아예 싸움이 안 된다.

 

청군은 고등학생 집단 정도라고 할 수 있으므로, 대등한 숫자가 싸워서는 청군이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1000명의 조폭과 10만 명의 고등학생이 붙는 싸움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싸움이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중일전쟁의 진상이다. 아직 완력이 여물지 못하고 싸움에 서툰 고등학생이 아무리 수가 많다 해도 맨주먹과 몽둥이만으로는 총칼로 무장한 조폭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는 없지만 반대로 1000명의 조폭이 도처에서 치고 빠지는 10만 명의 고등학생을 모두 제압할 수는 없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반면 서구의 전력은 군용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된 기동경찰에 비유할 수 있다. 조폭들이 야전과 시가전을 포함하여 온갖 전투를 벌였지만 기동경찰을 이길 수는 없다. 러일전쟁처럼 국지전에서 다른 지역 기동경찰의 후원을 받으며 잠깐 승리할(이길 옮긴이)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모조리 궤멸된다. 조폭 특유의 의리나 정신력 따위를 강조해도 소용없다. 그래 봤자 손톱 사이에서 이(사람의 치아 말고, 벌레의 한 갈래인 이 말이다 옮긴이)가 부서지듯 샅샅이 죽어나갈 뿐이다. 근대사 전체를 개괄했을 때 일본군의 강함이란 이 정도일 뿐이다.

 

조폭의 비유는 임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뒤에서 논하겠지만(이야기하겠지만 옮긴이) 일본 야쿠자를 포함하여(비롯하여 옮긴이) 일본의 과거 정치는 물론 현재의 정치도 조폭의 논리와 분리될 수 없다. 일본군을 조폭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만약 당신의 나라가 옮긴이) 일본보다 더 강하면([힘이] 세면 옮긴이) 그들이 (당신을 옮긴이) 호강시켜준다. 일본 천황(히로히토 왜왕[倭王] 옮긴이)이 맥아더에게 그랬다. 반대로 (당신의 나라나 조직이 옮긴이) 일본보다 약하면 (당신은 옮긴이) 지옥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군 특유의 정신력이 힘을 발휘해 온 대지를 (당신과 당신 동족의 옮긴이) 피와 공포로 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 이상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 ( 작은 제목 폭력과 허위로 얼룩진 천년 사무라이 국가 . ‘김상태지음, ‘()책으로 보는 세상펴냄, 서기 2014)에서 발췌/인용

 

- 단기 4357년 음력 97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