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기 1992년 『 철학 』 제 37집에도 실린 글이다. 이 글을 쓴 ‘이성규’님은 서기 1992년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교수이다 – 옮긴이)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비록 이 글이 서른 두 해 전, 그러니까 한 세대 전에 쓰인 글이지만, 한때[그러니까, 냉전시대]는 적이었고 스물두 해 전부터는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선 이웃나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여겨 – 그리고 ‘적의 논리나 주장이나 사상을 알아야, 적에게 반박하거나 적의 공격에 대비하거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 이곳에 인용/소개한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중화사상의 실체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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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세계의 여타(나머지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지역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격리된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문명의 형성과 발전은 선사 시대(‘석기시대’라는 말을 쓰는 편이 옳지 않을까? - 옮긴이) 이래 이 지역에서 활동한 제집단(諸集團. 여러[諸] 무리[集團] - 옮긴이)의 공동 참여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최근(서기 1980 ~ 1990년대 : 옮긴이)의 고고학 성과는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래(從來. ‘[지금까지] 내려온[來] 그대로[從]’ → 이제까지 : 옮긴이) 이 문제와 관련 유행하였던 ‘동아시아 문명의 중국 기원론(동아시아의 모든 문명은 그 뿌리를 황하 문명에 두고 있다는 주장 – 옮긴이)’ 또는 ‘중국 문명의 중원(中原) 기원론(제하[諸夏]에서 맨 처음 문명이 꽃핀 곳이 오늘날의 화북지방 내륙, 그러니까 황하 근처라는 주장 – 옮긴이)’은 그 설득력을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전통적인 중화(中華)사상의 역사적 근거가 다시 한 번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고고학자들이 오늘날의 요령성이나, 산동성이나, 장강[長江] 유역이나, 절강성이나, 사천성[四川省]이나, 광동성/광서장족자치구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 전에 나타난 문명이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문명의 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 옮긴이).
그러나 초기 문명 단계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된 문명을 유지,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가장 강대한 정치조직을 배경으로 주변의 분산적이고 후진적인 제집단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중원’(황하중/하류[유]역[黃河中/下流域]에 위치한 은(殷. 원래 이름은 ‘상[商]’ - 옮긴이)/주(周)였고(나는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의 요령성에서 나타난 문명, 그러니까 환웅족의 배달국이나 단군의 아사달[‘고조선’]은 황하문명에 속하는 하[夏]나라보다 3 ~ 10세기 더 일찍 나타나서 하나라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주[周] 왕실과 그 제후국들로부터 ‘야만인’/‘오랑캐’로 여겨진 – 그리고 스스로 왕[王]으로 일컬으며[이는 진시황 이후로 치면 이민족이 스스로 ‘황제’라 일컬은 것과 같다] 서주/동주와 대립한 – 초[楚]나라는 장강 문명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천성의 고대문명을 이어받은 촉[蜀]도 “오랑캐”로 불리며 제하[諸夏]의 전국시대 후기에 진[秦]왕국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나라를 유지했기 때문이다[나는 제하의 삼국시대에 유비가 세운 촉한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수천 년 전부터 사천 분지에 세워졌던 독립 왕국이었던 촉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광동성과 광서장족자치구에 세워졌던 문명은 비엣남[Vietnam]의 첫 왕조인 ‘반랑[한자로는 “문랑(文郞)”]’이며, 이 왕국도 하[夏]나라보다 8백 수십 년 전[서기전 2879년]에 세워져, 하나라가 망한 뒤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서기전 258년에야 망했다 – 옮긴이),
그 전통은 대체로 진(秦)/한(漢) 이후의 역대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왕조(와 유목민/한화[漢化]한 유목민이 세운 정복왕조 – 옮긴이)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많은 경우 주변의 제민족(諸民族. 여러[諸] 겨레[民族] - 옮긴이)도 이와 같은 중국 왕조의 절대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런 관계는 전한[前漢]의 황제인 유철[시호 ‘한무제(漢武帝)’]이 즉위한 다음에야 시작되었지, 서주[西周] 초기나 진[秦] 제국 때부터 시작된 건 아니다. 그리고 동진/남북조 시대에는 ‘한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가 없었고, 북송/남송 시대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음을 지적해야 한다 – 옮긴이).
그렇다면 그 왕조의 주인공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다른 이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 옮긴이) 정치적/문화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화를 단순한 최고가 아닌 ‘유일한 문화’로, 자신의 왕조는 단순한 초강대국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국가와 민족을 포괄적으로 지배하는 유일한 보편적 통합 질서 그 자체로 주장한 것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한족[漢族]’의 조상들 – 옮긴이)은 이 주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천명(天命) 사상(‘지도자가 하늘[天]의 명령[命]을 받아서 나라를 세우며, 만약 그 지도자나 지도자의 후손이 덕을 잃고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새로운 집안이나 세력이 하늘의 명령을 받고 옛 나라를 없앤 뒤 새 나라를 세워 다스린다.’는 사상 – 옮긴이)과 왕도 정치의(왕도 정치‘라는’ - 옮긴이) 이상을 발전시켰다.
즉 중국 왕조의 최고 수장은 ‘천명’에 의해 ‘천하’를 일원적(一元的)으로(단 한명으로서 → 혼자서 : 옮긴이) 통치하는(다스리는 – 옮긴이) 권한을 부여받은 천자(天子)로서 ‘천하’에 ‘왕도(王道)’ 즉 ‘유일한 문화’의 가치를 구현하는 ‘왕자(王者. 제왕인 사람/임금/왕도[王道]로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 – 옮긴이)’라는 것이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이[勿], - 옮긴이) 천(天 : 하늘/하늘의 신/천신[天神] – 옮긴이)의 수명자(受命者. 명령[命]을 받은[受] 사람[者] - 옮긴이)는 결코 복수(複數. 겹치는[複] 수[數], 그러니까 여러 명 – 옮긴이)가 아니다.
따라서 ‘천하’는 ‘여일인(余一人)’(오직 나 한 사람뿐)을 자칭하는(스스로 일컫는 – 옮긴이) 천자의 일원적인 지배하에 당위적으로 통합되는 공간이며, 그 안의 모든 영토와 주민은 ‘왕자’에 귀속(歸屬. 재산이나 영토/권리가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나라의 것이 됨 : 옮긴이)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역대 중국인(‘한족[漢族]’ - 옮긴이)들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천하일통 춘추지대의(天下一統 春秋之大義 : ‘온 누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춘추의 큰 뜻이다.’라는 뜻 – 옮긴이)” “보천지하 막비왕토 솔토지빈 막비왕신(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 ‘널리 하늘 아래[에 있는 땅 가운데] 임금의 땅이 아닌 것은 없고, 온 나라의 영토 안[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임금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뜻 – 옮긴이)”은 바로 이 관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천자의 지배가 ‘천하(天下 : 순수한 배달말로는 “누리” - 옮긴이)’에 균일하게(고루 – 옮긴이) 관철(貫徹. 끝까지 밀고 나가 목적을 이룸 – 옮긴이)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천자의 지배[왕화(王化)]는 곧 ‘유일한 문화’의 구현이었던 만틈 그것에의 편입 여부는 단순한 정치 권력에 대한 참여 또는 복속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갈림길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전자를 ‘화(華 : 중화 - 옮긴이)’ 후자를 ‘이(夷 : 오랑캐 – 옮긴이)’로 구분하여 차별하는 이른바 화이(華夷) 사상이 발전하였는데, 특히 ‘이(夷)’가 왕도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가(까닭이 – 옮긴이) 주로 그들의 거주지와 자질면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공간적인 개념, 즉 ‘내외(內外. 안팎 – 옮긴이)’ 또는 ‘중국’과 ‘사방’과 아울러 ‘인(人 : 사람 – 옮긴이)’과 ‘비인(非人. 사람[人]답지 못한[非] 사람 – 옮긴이)’의 개념이 결부되었다.
즉 ‘이(夷)’의 위치는 왕기(王畿. 왕도[王都/왕성] 부근의 땅 – 옮긴이)에서 너무 멀어 사실상 왕화(王化)가 미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실제 그들(이른바 ‘이[夷]’ - 옮긴이)은 문명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구비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하’ = 왕화(王化) 문명의 세계{ 화(華) = 중[中](국[國]) = 내(內) = 인(人) }+ 화외야만(化外野蠻.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살며, 미개하고 문화 수준이 낮음 – 옮긴이)의 세계{ 이(夷) = 외[外](사방[四方]) = 예[裔](변[邊 : 가장자리 - 옮긴이]) = 시[尸 : 시체/시신 – 옮긴이](사인[死人 : 죽은 사람 - 옮긴이]) 또는 금수(禽獸 : 짐승/행실이 무례하고 추잡한 사람 - 옮긴이) }라는 공식을 얻을 수 있는데[ 『 설문해자(說文解字) 』(동아시아 최초의 동방문자[‘한자’] 사전 – 옮긴이) 선진시대(先秦時代. 진[秦] 제국 이전의 시대 – 옮긴이) ‘만이(蠻夷. 남쪽 오랑캐[蠻]와 동쪽 오랑캐[夷] – 옮긴이)’의 대칭 개념으로 흔히 사용된 ‘하(夏)’를 ‘중국(中國)의 인(人 : 사람 – 옮긴이)’으로 해석하고(풀이하고 – 옮긴이) 있는데, 주대(周代. 주나라 때 – 옮긴이)의 금문(金文. 구리나 청동이나 쇠에 새겨진 글 – 옮긴이) 및 선진(先秦. 진 제국 이전 – 옮긴이) 문헌에서 ‘이(夷)’가 사인(死人)을 의미하는 ‘시(尸)’와 왕왕(往往. 이따금/때때로) 통용(通用. 넘나들어 쓰임 – 옮긴이)된 것은 ‘이(夷)’가 사인(死人)의 세계에 속한, 따라서 산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통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관념을 입증해준다.(다시 말해 중화사상에 따르면, 한국인을 비롯한 ‘한족[漢族]’이 아닌 겨레는 [그리고 그들이 세운 나라도] ‘사람’이나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시체/죽은 자’나 ‘죽은 자들의 나라’라는 이야기다! - 옮긴이) - 글쓴이의 주석 ]
도전을 불허하는 ‘화(華)’인 ‘중국’의 ‘이(夷)’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 및 그 지배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관념이 바로 중화 사상의 핵심일 것이다.
[ 『 좌전(左傳.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을 줄인 말. 공자가 정리한 역사책이자 경전인 『 춘추[春秋] 』 를 ‘좌구명[ 左丘明 ]’이라는 벼슬아치가 주석을 달고 풀이한 책이다. 좌구명의 성이 ‘좌’씨이기 때문에, ‘좌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주석을 달고 풀이한 책’이라고 해서 ‘춘추좌씨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책도 유교의 경전들 가운데 하나다 - 옮긴이 ) 』 에 산견(散見. ‘흩어져서[散] 보임[見]’ → 여기저기에 보임 : 옮긴이)되는 “오랑캐는 중국의 일을 모의할 수 없고, 오랑캐는 (또한) 중화를 어지럽힐 수 없다.[옮긴이]”(“裔不謀夏 夷不亂華.”), 『 맹자( 孟子 ) 』「 등문공 편(藤文公 篇) 」 의 “나는 ‘중국을 통해 오랑캐를 바꾼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랑캐 놈들로 (중화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옮긴이].” (“吾聞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는 이 점을 단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 글쓴이(이성규 교수)의 주석 ]
물론 화와 이의 인적(人的) 실체는 각각 ‘중국인’과 비(非) ‘중국인’이며, 전자는 하(夏. [화(華)])를 중핵(사물의 한가운데에 있어 조직 형성에 중요한 부분. 핵심/중심 – 옮긴이)으로 확대 발전한 한족(漢族)이며, 후자는 역대 만이융적(蠻夷戎狄)으로 불린 주변의 여러 비한족(非漢族. 한족[漢族]이 아닌[非] - 옮긴이) 집단이다.
그러므로 중화사상을 주변 제민족에 대한 한민족(漢民族. ‘한족[漢族]’을 일턷는 다른 말 – 옮긴이)의 자기 주장의 정신적 원리로서 일종의 한민족 ‘민족주의’라고 규정하는 견해도 전혀(조금도 – 옮긴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며, 실제 역사상 한민족(漢民族)의 자존/자긍심은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고[勿], - 옮긴이) 자신을 위협하는 타집단(다른 집단/다른 무리 – 옮긴이)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과 저항을 자극/고무한 것도 바로 중화사상이었다고 해도 과언(過言. 지나친 말 – 옮긴이)은 아니다.
그러나 중화사상이 제민족의 평등한 관계를 배제(排除. 물리쳐서 제외함 – 옮긴이)한 원리였음에도 불구하고(여기서 ‘불구하고’는 빼야 한국의 문법/어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 옮긴이) 동아시아의 여러 비한족의 대외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민족(漢民族)의 우월적인(우월한 – 옮긴이) 위치가 상실된 정도가 아니라 ‘중국’ 영토의 일부 또는 전체가 이민족[이(夷)]에 의해 정복 통치되는 이른바 ‘정복 왕조’의 시대(결코 짧지만도 않았던[ 사실상 (튀르크인의 한 갈래였던 – 옮긴이) 사타부족(沙陀部族)이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는 (5대 10국 시대의 – 옮긴이) 후당(後唐. 서기 923 ~ 936년)/ 후진(後晉. 서기 936 ~ 947년), 후한(後漢. 서기 947 ~ 950년)은 차치(且置. 내버려 두고 문제삼지 않음 – 옮긴이)하더라도, 250년 이상 화북 지방을 북방 이민족이 정복 지배한 남북조시대, 요(遼. 정식 국호는 ‘키타이’ 제국)/금(金)/몽고(蒙古. 바른 이름은 ‘몽골’ - 옮긴이)가 화북 또는 중국 전체를 지배한 남송에서 원(元. 몽골 연방 제국의 종주국. 정식 국호는 ‘몽골 울루스’ - 옮긴이)에 이르는 약 240년간, 청조(淸朝)지배 약 270년을 모두 합치면 진(秦)의 통일(BC[서기전] 221년) 이후 신해혁명(서기 1911년)에 이르는 약 2,100년 중(가운데 – 옮긴이) 화(華)/이(夷)의 위치가 전도된 기간은 대체로 1/3(3분의 1 – 옮긴이)에 해당된다(만약 5호 16국 시대와 – 한족(漢族)의 문화를 받아들인 탁발부[‘탁발선비’/‘타브가치’족]가 세운 나라인 수/당[隋/唐]의 지배기간까지 합치면 그 기간은 2/1[2분의 1] 이상이 된다! - 옮긴이) : 글쓴이의 주석 ])에도 화이사상이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의 논리뿐 아니라 그 지배의 정당성을 보증한 논리로도 기능하였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화이사상(華夷思想. ‘중화와 오랑캐를 [나누는] 사상’. 그러니까 ‘한족[漢族]’들이 자신을 ‘중화[中華]’라 일컬으며 떠받들고, 주변의 다른 겨레들을 ‘오랑캐[夷]’라 부르며 천하게 여긴 사상을 일컫는 말이다. 중화사상과 거의 같다고 여기시면 된다 – 옮긴이) 단순한 한민족(漢民族)의 자기 주장의 논리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물론 일정한 범위 내에서[안에서 – 옮긴이]) 세계 질서의 원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內包. [어떤 성질이나 뜻을] 속[內]에 품음[包] - 옮긴이)하였음을 시사(示唆. 미리 간접적으로 일러줌 – 옮긴이)하는데, 이 문제를 (살펴보기 – 옮긴이) 위하여 먼저 중화사상을 구성하고 있는(‘구성하는’ - 옮긴이) 몇 가지 기본 개념들의 함의(품은 뜻 - 옮긴이)를 분석/정리해 보자.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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