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1941 ~ 1945, 태평양전쟁 - (4)

개마두리 2024. 10. 9. 23:01

코코다 전투와 일본군의 정신력

 

할복, 옥쇄, 자살돌격을 불사할지언정 항복을 모르는 일본군이야말로 일본인의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혹자(或者. 어떤 사람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는 그것이 일본군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엔 중대한 오해가 숨어 있다. 이 오해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큰 장애를 일으킨다. 상식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 이유(까닭 옮긴이)를 저기압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무당의 기도에서 찾는 것과 같다.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동남아의 남방전쟁 등에서(같은 전쟁에서 옮긴이) 보여준 일본군(근대 왜군[倭軍] - 옮긴이)의 연속적이고 압도적인 승리는 (세계가 옮긴이) 일본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들은 그 내막을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할 것인데 여기서 필요한 결론만 말하자면 러시아([Ro]시야 옮긴이)와의 전쟁을 제외한(옮긴이) 나머지 전쟁들은 일본이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 전쟁들은 옮긴이) 어른과 열 살 난 아이의 싸움 같은 것이다. (서기 옮긴이) 1905년의 러일전쟁과 1939년 몽골 국경에서 소련과 벌인 노몬한 전투(올바른 이름은 할힌골 전투’ - 옮긴이) , 즉 러시아와의 전쟁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은 전쟁다운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일본군 전력과 정신력의 실체는 제대로 된 전쟁을 통해 다시 확인해야 한다.

 

194112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후(옮긴이) 일본군은 단 몇 개월(몇 달 옮긴이)만에 동남아와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지역인 옮긴이) 서태평양 전체를 장악했다. 연합군은 6개월이 지난 19425월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방어와 공격을 시작한다. 그 첫 개시 중 하나가 7월 말 뉴기니(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 있는 섬. 오늘날에는 독립국가인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주[]파푸아로 나누어진다 옮긴이)에서 벌어진 코코다 전투. 이 전투는 앞서 6월에 벌어진 미드웨이 전투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국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 전사(戰史. 전쟁[]의 역사[] - 옮긴이)에 기록된 이 전투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뉴기니는 호주(濠洲. 오스트레일리아 옮긴이)의 북서쪽을 둘러싼 큰 섬이다. 이 섬의 동쪽 끝 남부 해안(바닷가 옮긴이)에는 포트모르지비가 있는데, 호주 북부 해안과 최단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군은 이 포트모르지비를 점령하고 싶어 했다. 거기서부터 호주를 제압하고 동시에 미국과 호주 간의 소통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처음엔 바다를 돌아 해안에서 포트모르지비를 공략하려 했으나, 미 해군이 이를 막았다. 이것을 코랄해 전투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일본은 해군이 아닌 육군을 통해 포트모르지비를 공격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포트모르지비의 반대쪽 즉 뉴기니 섬의 동단 북부 해안인 고나/부나지점에 상륙했다. 뉴기니 동쪽 끝에서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포트모르지비와 고나/부나 두 지점 사이엔 오언스탠리산맥이 있고, 그 정상 부근엔 코코다 마을이 있다. 또 여기에 비행장이 있다.

 

일본군은 오언스탠리 산맥을 올라 코코다 마을과 비행장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일거에 포트모르지비로 돌격하려 했다.

 

이에 맞선 것은 호주군(오스트레일리아군[] 옮긴이)이다. 앞서 말했듯 이때까지는 준비가 덜 된 연합군에 비해 일본군의 전력이 훨씬 우세했다. 당시 호주군은 거의 민병대 수준으로 장비나 병력에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지역은 혹독한 열대의 밀림과 우림지역이다. 동남아의 밀림 전투에 숙달된 일본군 정예를 맞아 호주군은 더위, 질병, 무성한 숲과 골짜기 등 최악의 조건에서 방어전을 치렀다.

 

그러나 호주군은 거듭되는 후퇴를 반복하면서도(되풀이하면서도 옮긴이) 끝까지 싸웠다. 일본군이 그 유명한 돌격전(왜어[倭語]에서 만세를 뜻하는 반자이를 따와 반자이 공격이라고도 한다. 근대 왜군이 이 공격을 할 때 반자이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옮긴이)을 누차(여러 차례 옮긴이) 감행했어도 호주군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다.

 

코코다 마을과 비행장을 점령하고 포트모르지비가 눈앞에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했으나 일본군의 전력은 거기서 바닥이 났다. 부족한 보급과 누적된(쌓인 옮긴이) 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포트모르지비로 진격하지 못했다. 줄곧 이겼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문법/어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옮긴이) 일본군은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머지 부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 휘하 연합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의 상세한 부분이야 어쨌든 그 이전 동남아나 중국(당시에는 중화민국 옮긴이) 등지에서 벌였던 전쟁과 질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서는 일본군이 돌격하는 대로 적군 병사들이 달아나거나 후퇴했으나, 코코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열악한 조건에서 방어전투를 이어간 호주군의 애국심(나라 사랑하는 마음 옮긴이)과 정신력은 결코 일본군에 뒤지지 않았다(덧붙이자면, 2차 대전 때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들의 정신력도 근대 왜군에 뒤지지 않았다. 그들이 악명 높은 경제대공황 때 태어나 자란 나머지, 정신적으로 단련이 되어 웬만한 괴로움이나 아픔은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2차 대전 때, <일본군[근대 왜군]>은 정신력을 바탕으로 싸웠고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물량을 바탕으로 싸웠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옮긴이).

 

또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육탄돌격(이른바 반자이 공격’/돌격전 옮긴이)도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육탄돌격의 위력은 용맹한 정신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탄돌격이 통할 수 있는 상대, 즉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모자란 옮긴이) 상대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 코코다는 처음으로 이 사실을 연합군 세계에 입증한 전투로 기록된다.

 

이것이 더욱 확연하고 영구적으로 입증된 전투가 과달카날 전투. 19428월에 시작되어 코코다 전투와 같이 진행된 이 전투에서 주목할 만한 요점만 살펴본다.

 

당시 과달카날에는 일본군의 소수 병력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여기에 미 해병이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그 비행장을 빼앗아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일본군의 전반적인 전력이 아직 우세했다. 과달카날을 둘러싼 전투가 해상과 공중에서 산발적이지만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과달카날에 진주한 수천 명의 미 해병은 고립되고 말았다. 그리고 섬의 다른 지역에서는 일본군의 정예부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앞서 옮긴이) 말했듯이 섬에 고립된 병력은 외부 지원이 끊기면 얼마를 버티든 결국 전멸하게 된다. 이 때문에 과달카날 주변의 해역에서는 공방전이 치열해진다. 과달카날 바깥의 하늘과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지만 보급선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달카날의 생사를 결정하는 전투들이다. 과달카날 내부의 육지전은 이러한 주변의 공방전이 진행되는 동안 양국(미국과 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의 육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바로 이것이 태평양전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투 중(가운데 옮긴이) 하나다.

 

일본군(근대 왜군[倭軍] - 옮긴이)은 주로 야간을 틈타 미군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미군은 겁먹고 도망치기는커녕(달아나기는커녕 옮긴이) 달려드는 일본군을 거의 몰살시켰다. 일본군의 돌격전은 여기에서 전혀(조금도 옮긴이)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한다 옮긴이)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똑같은 공격을 거듭 반복한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똑같았다.

 

시간이 지나 주변 해상에서의 전투도 미군의 우세로 돌아서자, 보급이 불리해진 일본군 대병력은 기아(굶주림 옮긴이)와 질병과 부상으로 죽어 나갔다. 마침내 과달카날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미드웨이 전투와 더불어 태평양전쟁의 운명을 뒤바꾸게 된다.

 

이 전투에서 자주 회자되는 부분은 일본군의 무모한 돌격전이다. 이전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한 자만, 일본군 사령부의 무지와 교만, 심지어 일본 군대조직의 생리나 일본인의 속성에 대한 논의까지 있다. 모두 의미심장한 것들이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 주목한다. 정신력이란 측면에서 호주군과 미군 등 연합군은 일본군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기에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미 해병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용기와 감투(敢鬪. 용맹스럽게[] 싸움[] 용감하게 싸움 - 옮긴이) 정신이 줄어든 건 아니다. 오늘날까지 미 해병대의 자부심을 지탱하는 불퇴의 정신은 이 과달카날 해병의 용맹과 헌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2차 세계대전 때 옮긴이) 미 해군 지휘관 중(가운데 옮긴이) ‘황소(Bull)’로 명성이 높았던 윌리엄 F. 홀시제독의 어록엔 이런 말과 명령이 있다.

 

일본말은 이제 지옥에서나 듣게 될 것이다.”

 

일본군을 사살하라. 더 많이 사살하라.”

 

상처받고 분노한 모든 정상적인 군인은 이러게 마련이다. 호주군과 미군은 한국(대한제국 옮긴이)과 중국(중화민국 옮긴이) 그리고 동남아의 찢기고 억눌린, 무장도 훈련도 빈약한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니다. 싸울 힘이 충분한 병사와 지휘관 중에 코코다나 과달카날의 연합군 같지 않은 자들은 없다. 독일군도 소련군도 심지어 일본군 자신도 그렇다. 준비된 병사는 누구나 용감하다.

 

일본군의 정신력이 더 우월하다는(뛰어나다는 옮긴이)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굳이 우열(뛰어남과 모자람 옮긴이)을 나누라 하면, ‘천황의 신국(神國)’을 외치는 일본군의 사이비 종교적 열망이 아니라 명분과 합리성을 갖추고 착한 일본인이란 죽은 일본인밖에 없다.”며 분노하던 연합군 쪽이 더 우월했다.

 

그렇다면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의 자살돌격과 옥쇄란 무엇인가?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정신력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병사란 집단 속에서 훈련되며 전쟁이 발발하면 그 집단의 행보에 자동적이고 직접적으로 편입된다.

 

지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반복된(되풀이된 옮긴이) 자살 돌격과 옥쇄의 관습은 전쟁에 패배한 일본군의 호흡 같은 관습이다. 게다가 이 관습은 일본 군대의 악명 높은 억압체제 속에서 강제되고 길들여진 것이다. 이런 식의 기계적 반응은 오히려 정신적 부재상태에서 가능하다. 죽기 전에 다들 (총검을 들고 옮긴이) 돌격하는데 그 속에 있는 일개 병사에게 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아무런 종류의 정신도 아니다.

 

일본군에게 정신력이 있었다면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투 중에 이루어진 일본 병사의 용맹과 헌신에 있다. 예를 들어 가미카제가 생기기 전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 항공기 조종자 중에는(가운데는 옮긴이) 항공기가 미군의 대공포(對空砲. 지상에서 공중의 목표물을 쏘는 대포 옮긴이)에 명중되었음에도 탈출하지 않고 끝까지 미군의 함선으로 돌진한 병사들이 있었다.

 

가미카제처럼 명령을 받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전투의 승리와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려 했다.

 

이런 측면에서는 미군도 마찬가지다. 비행기 기총(‘기관총을 줄인 말 옮긴이)의 실탄이 떨어지자, 한 미군 조종사는 다가오는 일본군 비행기를 향해 육탄으로 돌격했다. 운이 좋아 일본군 비행기가 먼저 피하다 추락하는 바람에 살아난 이 조종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만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죠.”

 

이처럼 병사는 전투 속에서 용감하고 헌신적이며 이 역시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다른 것을 배우지 못해 그저 죽으려고 뛰어가는 일본군의 육탄돌격은 이와 같은 정신력과 아무 상관도 없다.

 

할복도 마찬가지다. 책임을 진답시고 할복자살한 일본군 장교들에 대한 신화가 난무하지만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서기 옮긴이)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자살한(극단적인 선택을 한 옮긴이) 일본군 장교는 독일(도이칠란트 옮긴이) 패배 이후 자살한 나치 장교와 그 숫자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학자 존 다우어(MIT 명예교수)’가 명저 패배를 껴안고 (최은석 옮김, 민음사, 2009)에서 지적한 사실이다.

 

그러나(패전을 알리는) 천황(왜왕[倭王] - 옮긴이)의 방송이 나간 뒤에 구슬 같은 삶(‘구슬을 부순다.’는 뜻의 옥쇄를 말함 필자)을 택한 자의 수는 상상했던 것보다 적었다. 군 장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백 명의 자살자가 나오긴 했지만, 이는 애국적 자살이라는 신념이 없었던 독일에서 죽음을 택한 나치 장교의 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37)

 

편견과 달리 일본 지도자들은 패배했다고 해서 쉽게 죽는 자들이 아니다. 그 동기도 천황에 대한 충성이나 일본정신따위라 할 수 없다. 말을 뭐라 하든 패배하여 절망 속에 자살한 나치 장교나 여타 전투에서 패배한 패장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할복의 고상한(?) 신화는 완전히 헛소리다.

 

자살(극단적 선택 옮긴이)의 독특한 방식으로써 배를 가르는 할복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토록 모진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뒤에서 논할 일본 무사의 성장 과정을 감안하면 이 또한 기계적 행동이기는 마찬가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할복을 보고 듣고 연구하고 연습하고 칭송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할복은 일상만큼이나 익숙하다. 많은 경우 뒤에서 목을 쳐주거나 총을 쏴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어차피 자살을 해야 할 상황이면 이들에게 할복은 투신자살이나 권총자살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칭찬까지 받기 십상이니 정황을 감안하면 일본인의 할복은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간의 보편적인 자살행위의 한 방식일 뿐이다.

 

일본인의 정신력이 별나게 우월한(뛰어난 옮긴이) 것이 아니라면, 그 독특한 성격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 특이한 정신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디에 쓰는 것인가. (글쓴이인 김상태선생 옮긴이)로서는 그 이유(까닭 옮긴이)를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 이 정신력은 (서기 옮긴이) 12세기 (최초의 옮긴이) 무사정권 (성립 옮긴이) 이후 일상적으로 반복된(되풀이된 옮긴이) 내전의 필요에서 발명되었다. (자기들끼리 옮긴이) 언제나 싸우고 있으므로, 이들 사이의 전력은 거의 평준화되어 있다. 죽기 살기의 특이한 정신력이 힘을 발휘하는 때는 이 조건에서이다. 힘이 비등하기(견주어 볼 때 서로 비슷하기 옮긴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잔인하고 저돌적인 쪽이 유리하다.

 

한편 이런 전투에서는 기습이나 선제공격이 중요하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돌진이 긴요(매우 필요하고 중요해짐 옮긴이)해진다. 전력이 비등한 상황에서 항상(옮긴이) 싸워야 하는 자들은 이 독특한 태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지나지 않는 옮긴이)이 괴상한 정신력을 일본인은 물리적 전력이나 합리적 전술의 대안 혹은 그 이상이라고 오판(잘못 판단함 옮긴이)했다. 나아가 그렇게 믿으려고 기를 썼다.

 

결국 아무 정신력도 아니었던 것인데, 이것을 인간이 지닌 보통의 정신력과 비교하자면(견주자면 옮긴이) 기도를 통해서 소원을 이루겠다는 점술가의 정신력과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목적을 이루겠다는 과학자의 정신력 차이와 같다.

 

둘째, 이 정신력은 약자를 위협하고 강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다루려면 방법이 필요하다. 설득, 회유, 배력, 폭력 등이( 따위가 옮긴이) 그것이다. 일본 무사지배계급도 이 모두를 사용했지만 그들이 행사한 가장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수단은 물리적 폭력이다. 그러니까 무사다. 그러므로 이 폭력을 치장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폭행이나 다름없는 사무라이의 행태를 정신력으로 치환하는 조작이 벌어진다.

 

심지어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태도를 경멸하는 것이라는 주장조차 진실은 이와 반대다. 누구나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게 마련이지만 그런 기질이 가장 심한 자들이 바로 사무라이다. 그런 행태를 호도하고 신비화하여 약자의 공포심을 극한까지 자아내려 한 것이 일본 무사정신의 본질이다. (이와 옮긴이) 근사(近似. 거의 같음 옮긴이)한 게 있다면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는 조직폭력배의 고도로 훈련된 방식들이다. 조폭 영화가 의리와 용기의 화법으로 치장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고로 비()정신적인 행태가 최고로 정신적인 행위로 조작되는 것이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용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호주군과 미군을 비롯하여 영국군, 독일군, 소련군도 그만큼 용감했다. 1930년대 이후 활약한 마오쩌둥(모택동 옮긴이)의 항일 홍군도, 베트남(비엣남. Vietnam 옮긴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의 군대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준비된 군대가 용감하지 않은 적은 없다.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6년 전쟁 옮긴이) 때 준비되지 않은 조선군(근세조선 관군 옮긴이)은 지리멸렬했지만, 준비된 이순신의 수군은 역사상 그 어떤 군대보다도 용감했다.

 

그것 외에(그것 말고는 옮긴이) 일본군의 용맹과 정신력은 그 괴기스러운 성격 외에 아무런 우월성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인류 역사상 가장 열등한(형편없는 옮긴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고?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중일전쟁 초창기에 난징(남경[南京]. 서기 1930년대에는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옮긴이)에서 벌인 강간(성폭행 옮긴이)부터 태평양전쟁 말기에 마닐라에서 벌인 강간에 이르기까지, 제국(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 육해군은 입에 올리기도 힘든 잔인성과 강간마(성폭행범 옮긴이)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그들은 스스로를(자신을 옮긴이)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일본인들은 절망적인 자살공격으로 목숨을 잃고 전장에서 굶어 죽었으며 적의 손에 넘겨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명분으로 부상당한(다친 옮긴이) 전우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사이판이나 오키나와(유구[琉球] - 옮긴이) 같은 곳에서는 민간인 동포들(나는 유구 유민들이 근대 왜군의 동포였는지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옮긴이)을 살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또 소이탄(목표물이나 사람을 태워 버리는 폭탄 옮긴이)이 조국(근대 왜국 옮긴이)의 도시들을 불길로 휘감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서 일본(근대 왜국 옮긴이)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1일본인은 구슬처럼 산산조각 나는죽음(옥쇄)을 각오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결국 대동아공영권이 남긴 유산이란 죽음과 파괴뿐이었다. (14)

 

( 5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