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편에서 계속 )
▶ 세 명분의 급료와 열여섯 명의 선생님
하르게이사 대학에서 서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공터는 난민 수용소가 되어 있었다. 길가에 초라한 양철 지붕으로 이루어진 판자촌이 펼쳐져 있다.
그 중앙 광장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시크누르’ 초등학교가 있다. 주위에 난민 수용소가 들어서기 시작한 1998년, 유니세프가 일본 정부로부터 원조를 받아 세운 학교 중의(가운데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하나다. 그 당시 일본의 원조로 각 지역에 10여 개의 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원조받은 금액은 모두 합쳐 7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적은 금액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원조였다.
교장 ‘마하디(38세)’의 말에 의하면(따르면 – 옮긴이), 처음에는 1학년과 2학년 두 반, 학생 70명으로 출발했다. 그 당시 수용소 주민은 1,000명 정도로 아동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때까지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동도 모두 1학년이나 2학년으로 출발했다. 열두 살짜리 1학년생도 있었다. 선생님은 마하디를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하지만 학교가 설립된 순간, 수용소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이웃 지역에서 이사를 해 왔기 때문이지요.”
수용소 주민의 수는 5,000명으로 증가했다.
출발 당시에 1학년이었던 학생이 지금은 6학년이 되어 있다. 6학년만이 한 학급이고 아동의 수도 서른다섯 명으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5학년 이하는 네 반씩이다. 아동의 수를 모두 합하면 1,087명으로 열여섯 반이다. 1학년생은 268명이나 있었다.
3학년의 한 교실을 들여다보았는데 70명이 앉아 있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다.
2인용 의자에 다섯 명이 앉아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의자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 교과서도 부족해서 두 권을 다섯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선생님도 처음의 세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아동들이 늘기 시작한 2000년, 이 지역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교사들을 모았다. 자격은 ‘고졸’로 제한했지만 경력이나 나이는 묻지 않았다. 지역 주민 열세 명이 자원해 주었다. 하지만 재정난에 허덕이는 정부는 정규 교사 세 명의 급료밖에 지불해 주지 않는다. 정규 교사 한 사람의 급료가 30달러로 합계 90달러다. 그것을 열여섯 명이 나누어야 한다.
소말릴란드에서는 공무원의 평균 월급이 약 35달러다. 물가가 싸고 어느 가정이든 해외(국외 – 옮긴이) 거주자가 있어서 달러나 파운드를 송금해 주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그런대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90달러를 열여섯 명이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학교는 – 옮긴이) 학생 한 집당 80센트씩의 수업료를 받아 그것을 급료에 보충했다. 하지만 수업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가정도 있고, 형제가 많은 가정도 있다. 수업료는 모아도 큰 액수가 되지 않는다.
“매일(날마다 – 옮긴이) 부모님들이 옥수수나 감자, 양파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 옮긴이)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합니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 아니다. 젊은 선생님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지요. 정부도 충분한 급료를 지불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거든요.”
정부는 현재 가장 중요한 과제인 ‘치안’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그 공백을 선생님과 부모들이 메우려 하고 있었다.
( → 9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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