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학살, 슬픈 시리아

개마두리 2012. 3. 17. 15:16

 

- <한겨레 프리즘>

 

아직 철이 없던 중학생 시절, 5. 18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1980년 봄이었다. 당시 광주 외곽에 있던 우리 집에도 쫓기는 대학생이 숨어들었다. 간간이 총소리도 들렸다. 광주와 바깥을 잇는 교통과 통신은 모두 끊겼다. 열흘쯤인가 휴교령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나갔을 땐 뭔지 모를 침울함이 흘렀다. 낮은 목소리로 흉흉한 이야기들도 돌았지만, 금세 10대의 발랄함이 일상이 됐다. 5. 18의 기억은 한동안 유보됐다.

 

서울로 대학을 왔다. 대학 새내기의 우쭐한 희망은 매캐한 최루가스에 묻혔다. 5월 어느 날, 학생회관 광장에서 열린 ‘광주 학살’ 사진전 앞에서 얼어붙었다. 난생처음, 처참하게 짖이겨진 주검들을 무더기로 봤다. 인간이 인간에게 한 짓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사진들 밑에는 독일어 설명이 달려 있었다. ‘학살’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시리아는 기원전 3500년(지금으로부터 5512년 전 - 옮긴이)께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꽃피웠던 지역이다. 지중해와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 오랜 기간 번성했다. 그곳에서, 1년째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바샤르 아사드(47세) 독재정권의 탱크와 로켓포와 총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많게는 7000명이 죽었다. 인터넷 유튜브와 페이스북엔 현지에서 올린 생생한 동영상들이 넘쳐난다.

 

학살은 비대칭적, 일방적 폭력에 의한 집단 살해다. 인도주의에 대한 최대 범죄이자 인간성 파괴의 정점이다. 그러나 노엄 촘스키가 지적한 대로, 학살에는 “정치적 편향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 자신의 대규모 잔혹범죄는 ‘건설적인’ 것이고, 반대로 가해자가 강대국의 적이거나 무너뜨려야 할 대상 국가라면 그 잔혹행위는 ‘사악한 것’이 된다.”(<학살의 정치학>, 박종일 옮김) 서구한테 시리아는 적국이 아니라 중동(서西 아시아 - 옮긴이) 전략의 지렛대다.

 

학살을 막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유엔의 군사개입이지만, 리비아의 전례 탓에 논란의 여지와 우려되는 부작용이 크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리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 정권 퇴진과 책임자 처벌 없이는 그 피가 절대 씻겨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사적 원한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대개는 강요나 명령 때문이다. 군대는 합법적 의무로 살인을 강요한다. 군인의 살인은 ‘살인’이 아니다. 단, 그런 면책은 무장한 적군과의 교전 중에만 인정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전쟁범죄다.

 

살인에는 물리적 거리, 심리적 거리, 문화적 거리가 있다. 군대의 역사는 그런 거리를 늘림으로써 살인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거부감과 죄책감을 완화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을 향해 자신의 총을 쏜 군인의 비율은 15~20%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한국전쟁에서 50%, 베트남 전쟁에서 90%로 급증했다.”(<살인의 심리학>, 데이브 그로스먼 지음, 이동훈 옮김)

 

지난주 시리아의 어느 도시에서 열린 반독재 민주화 시위 도중 10살 안팎의 소녀의 사진이 전세계 언론을 탔다. 소녀는 커다란 인형을 안은 채 “아사드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어요.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쓴 메모를 펴 보였다. 맑고 예쁜 눈망울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시리아 학살이 우리에겐 전혀 남의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80년 광주 학살은 외국 언론의 보도로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고립무원의 광주 시민은 전세계 양심의 지지에서 위안을 얻고 항거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서 시리아 소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법이 마땅치 않아 안타깝다.

 

- 조일준(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서기 2012년 2월 20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