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의문을 품으면서 '칭송'한다는 것 - 정명옥의「Eye」

개마두리 2012. 6. 17. 16:28

 

 

 

* 이 글은 제가 서기 2004년(8년 전) 11월 24일에 쓴 것입니다 : 잉걸 

 

 

며칠 전,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 딸린 동아리 방에서 우연히 8년 전에 나온『화이트』지를 보았습니다(그 잡지는 서기 1997년 10월에 나온 거였죠). 다른 작품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단 한가지, 정명옥 선생님의 만화인「체험 이야기 속으로 - Eye」만은 제 눈과 마음을 모두 잡아끌더군요.

 

 

그 만화는 다른 만화들처럼 부드럽고 화려한 선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특별히 극적인 사건이 나오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잘 생기고 예쁜 주인공들이 나오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단 말이죠.

 

 

만화는 옛 이집트 시절(그러니까 무려 3320년 전)의 벽화 안에 그려진 이집트인 여인과, 투탄카멘 왕의 관이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에서 시작되는데요, 투탄카멘은 여인에게 "네 찬미엔 기쁨이 퇴락 하였구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인은 (벽화 속에서) 파라오를 찬미하는 자들은 "그 찬미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줄 모"른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들을 통해" 제 모습을 보았고 왕을 통해 잘못됨을 유추해냈다고 덧붙이죠.

 

 

파라오는 여인에게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고, 여인은 - 원래 왕의 관은 앞 얼굴만 새겨놓았으므로 - 평소 자신이 보지 못했던 "옆모습"을 보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쓰레기에 불과한 형편없는 연극에서 활동하는 형편없는 배우들 속에, 아주 빛나는 연기를 하는 한 배우"가 "고지식함" 때문에 연극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비유를 들려주며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죠.

 

 

여인은 "그건 고지식함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그 배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연기를 잘못한 다른 배우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대답했지만, 파라오는 "관객의 시선 또한 필요"한 법이라며 여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화가 난 여인은 '당신의 옆모습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하나, 파라오는 "물러가라. (너는) 내게 감히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며 거부합니다.

 

 

실망한 여인은 "당신의 옆모습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편한 대로 저들의 편에 설 수도 있겠지요."라고 비아냥거리죠. 파라오는 화가 나서 "불경한 언사로고!"라고 외치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저는 당신의 절대성을 추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파라오는 "나를 찬미하지 않는 너의 신념이란 유리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건 단단해도 깨어지기 쉽다. 또 깨어진 건 너를 베고 찌를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인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합니다. 여인은 "잔인하시군요. 당신은 자신을 숨기면서도 복종을 강요하십니다."라고 말한 뒤 '당신은 어째서 그 권좌에서 일어나, 저희들 사이를 걸어다닐 수 없는 것입니까...정녕 그리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물러나죠.

 

 

그러나 이 여인은 벽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인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파라오를 응시하다가 자신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파라오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바꾸려고 한(사물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보려고 눈동자를 움직인) 그 여인은 벽화 안에서는 '병X'이라고 불리며 놀림을 받고, 벽화 밖에서는 '멀쩡하지 않은' "불협화음"이라는 말을 들으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죠(그녀를 본 박물관 직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저놈의 눈알을 X던지, X우던지, '제자리'에 놓는 수밖에...'라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과 신의 관계, 그리고 피지배자와 지배자 사이의 관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투탄카멘 파라오는 "곡창과 도리깨를 든" "저승신 오시리스"와 "합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여인이 투탄카멘에게 바치는 찬양은 단순히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심이 나타난 것으로 여기면 안 되고, 오히려 인간이 신을 찬양하는 마음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인이 투탄카멘을 찬양하면서도 그저 무작정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신'이자 '왕'이고 '절대자'인 투탄카멘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신을 찬양하면서도 그 신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인간의 본성)을 알려고 들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비판하며, 투탄카멘이 보여주지 않는 "옆모습"을 보려고 하는 모습은 인간이 신이나 지배층을 따르면서도 '어쩌면 내가 따르는 대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누군가를 존경하고 믿고 따르려면 그 사람을 무조건 추켜세우면 안 되고,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현상과 비슷해요.

 

 

그러나 '신'은 그런 인간의 요청을 거부하고(또는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 세상을 "형편없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형편없는 연극"에 빗대면서 "너처럼 튀는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이 오히려 더 엉망이 된다. 왜 남들처럼 가만히 따르지 못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러면서 '남들의 인식("관객의 시선")'에 맞추어서 세상을 살아나가라고 강요하지요.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잘못되었고 대중이 무조건적으로 찬양(내지는 복종)만 할 줄 아는 '바보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반항아가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무조건적으로 시류를 따라가는 저 바보들에게 있지요. 세상의 숨겨진 면을, 숨겨진 진실을 찾으려고 들지 않는 저 바보들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반박하게 됩니다.

 

 

물론 그 '반항'은 오래가지 못하죠.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나머지 분격한 피지배자는 "당신의 옆모습은 고정되지 않아서(확고부동한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편한 대로 저들(대중)의 편에 설 수도 있겠지요."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 반항아는 "전에는 안 그랬는데, 당신이 본 모습(속마음이나 진실)을 보여주지(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의구심이 생겼다. 당신은 의심으로 가득찬 내 신념을 깨뜨리지 못했다. 당신은 이 모순투성이이고 잔인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나를 따라야 하고 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왜 그러시는가?"라고 따지지만, 불행히도 칼자루는 그 사람에게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외침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서 사라질 뿐입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다스리는 못난 신, 비밀이 많은 지배자, 그리고 이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그들을 무작정 따라가는 사람들...이런 경향은 33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죠.

 

 

우리가 이런 못난 신에게, 잔인한 임금에게, 머리로 생각하거나 따질 줄을 모르는 추종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 정상에 묶여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면서도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것을 옳다고 여겼듯이, 이집트 여인이 투탄카멘에게 옆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며 눈동자를 움직여 사물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했듯이, 그들이 못났음을 인정하고, 지나친 기대를 거두고, 화가 나면 그들에게 악을 쓰고, 따지면서, 때로는 용서하고 때로는 비난하면서 꾸준히 걸어나갈 수 밖에요.

 

 

저는 그것이 이 작품을 통해 '보라, 진실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은 인정받기는커녕 이렇게 비웃음을 산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물으신 정명옥 선생님께 드릴 만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명옥 선생님, 좋은 만화를 그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 정명옥 선생님의 작품은 그림체가 수수하고, 간단하면서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올림